[풋볼리스트] 선수는 성장하고 진화한다. 한결 같은 패턴으로 경기하는 이도 있지만, 주어진 상황이나 포지션에 따라 경기 방식을 바꾸는 이도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프란체스코 토티 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풋볼리스트'는 진화하고 변화한 선수 이야기를 모았다.

박지성이 막 등장했을 때, 아직 한국 축구는 포백이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많이 뛰는데다, 빠른 스피드를 갖춘 미드필더 박지성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공격과 수비를 부지런히 오가야 하는 ‘윙백’으로 설정되었는데, 이는 공격수들에게 점점 더 수비적인 역할을 많이 요구하는 현대 축구에 적합한 ‘신형 날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거스 히딩크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은 스리백 체제에서도 박지성이 전방에서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고 여겨 윙어로 기용했고, 이를 기점으로 그가 가진 능력이 현대 전술에서 극대화됐다. 수비의 중심은 후방에서 전방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박지성을 유명하게 만든 대회는 ‘2002 한일월드컵’이지만, 그의 전성기는 2005년부터 2012년 사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주전 선수로 수많은 유럽 메이저 트로피를 휩쓸 던 시기일 것이다. 이때 박지성은 산소탱크나 세 개의 폐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수비형 윙어라고도 불렸다. 박지성은 ‘언성 히어로’라 불리며 동료 선수들로부터 가장 저평가된 선수라며 지지를 받았다. 

박지성이 많이 뛰는 선수로 부각된 것은 그가 실제로 많이 뛰기도 했지만, 공격이든 수비든 언제든 적재적소에 팀을 위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라운드 위의 홍길동이었던 박지성은 부지런한 노동자형 선수처럼 보였으나 실제론 공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매순간 가장 적절한 위치를 찾아갔던 그의 빼어난 축구 지능이 빛난 결과가. 물론, 이를 위한 체력과 헌신이 기반이었다. 박지성은 늘 자신이 아니라 팀을 위해 뛰었던, 축구 정수를 이해하고 있던 선수다.

2010년의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방 압박’은 더 이상 몇몇 팀이 구사하는 ‘전략’이 아니라 전술의 기본처럼 여겨진다. 이제 수비형 윙어가 아니라도, 윙어의 수비적 역할이 적지 않다. 어쩌면 박지성은 미래를 살았던 선수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되기에 체구가 작고, 공격 창조성이 돋보이기엔 무궁한 체력이 아까웠고, 윙어가 되기엔 힘있는 킥력이 부족했지만, 그가 가진 다양한 장점을 활용해준 지도자들을 만난 박지성은 한국축구가 낳은 가장 화려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전설이 되었다.

박지성은 윙어로 전성기를 보냈지만, 고질적 무릎 부상과 체력 저하가 찾아온 황혼기에는 축구 선수로 막 꽃을 피웠던 초기의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서 경력을 마무리했다. 중앙 미드필더 박지성은 맨유 시절 안드레아 피를로를 막기 위한 변친 기용으로 일명 ‘센트럴 파크’라 불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박지성은 중앙 미드필더로 수비력뿐 아니라 전체 경기를 조율하고, 경기장 이곳저곳에 영향을 미치고, 과감한 배후 침투로 공격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역량도 갖췄다. 퀸즈파크레인저스에선 기대치에 이르지 못했으나 다시 돌아간 PSV에인트호번과 언제나 맨유에서 보다 공격적인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박지성은 훨씬 더 많이 공을 만지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지성은 자리를 가리지 않고 제 몫을 하는 선수였다. 그는 많이 뛰었던 선수가 아니라 언제든 팀에 수적 우위를 안겨주는, 매우 영리했던 선수, 그라운드 위의 ‘원 플러스 원’으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1기: 시드니 올림픽에 선발된 박진섭의 백업 윙백(2000~)
고교와 대학시절 박지성의 본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중앙 지역에서 공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엔진이었다. 박지성이 윙백으로 전환한 것은 명지대 시절. 김희태 감독이 체력과 포지션 전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스리백 형태에서 측면 공격 역할이 크게 주어지는 윙백으로 뛰었다. 

박지성은 자서전 ‘마이스토리’에서 “공격 할 때는 미드필더 역할을 하고, 수비 할 땐 수비수로 내려와 뛰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많이 뛸 수 있는 체력과 공격을 하면서도 수비에 가담하는 나의 강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박지성은 수원공고 졸업 이후 K리그와 주요 대학팀에서 모두 외면 받았다가 명지대에서 올림픽 대표팀과 가진 연습경기 활약을 통해 인생에 극적 반전을 맞이한다.

허정무 감독이 이끈 올림픽 대표팀에서 박지성이 주목 받은 자리도 윙백. 당시 왼쪽 윙백 이영표과 오른쪽 윙백 박진섭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다. 박지성은 명지대에서 본래 왼쪽 윙백이었으나 오른발잡이였기 때문에 박진섭이 부상당한 시점에 오른쪽 윙백으로 나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박지성의 기량에 만족한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의 본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 자리로 옮겨 시드니올림픽 본선에서는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썼다. 

2기: 히딩크 감독이 선택한 2002 월드컵의 라이트윙(2002~)

거스 히딩크 감독을 만난 것은 박지성의 축구인생에 또 다른 전기였다. 히딩크 감독은 2001년 1월 첫 훈련 멤버에 올림픽 대표 주전이자, 아시안컵 경기에 나섰던 박지성을 불렀다. 박지성은 히딩크호에서도 꾸준히 뛰었으나 주 포지션은 여전히 윙백이나 중앙 미드필더였다. 박지성의 역할이 바뀐 것은 2002년 4월 치른 중국과 친선경기. 이때 한국은 4-3-3 포메이션을 가동했고, 박지성을 라이트윙 포지션에 배치했다. 

그동안 수비적으로 헌신하는, 많이 뛰는 선수로 알려져온 박지성은 저돌적인 공격 능력을 보이며 주목 받았다. 대회 직전인 5월 치른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와 경기에서 모두 이 자리에 선발 출전한 박지성은 잉글랜드전에 헤더, 프랑스전에 오른발 슈팅으로 득점했다. 박지성은 이 경기에서 기술력을 검증 받았고, 큰 경기에 강한 면모, 득점력을 발휘했다. 박지성 스스로도 큰 팀을 상대로 연이어 넣은 골로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결국 본선 포르투갈전에 이영표의 크로스 패스를 가슴으로 받은 뒤 감각적인 트래핑에 이은 발리 슈팅으로 그림 같은 결승골을 넣었다. 박지성이 이전부터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왕성한 체력 뿐 아니라 빼어난 전술 이해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수 전환 상황에서 흐름을 읽고 반응하는 능력이 걸출했다.

그가 윙백으로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킥력 또한 날카로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힘 있고 강한 크로스 패스나 슈팅을 뿌린 것은 아니지만 안정적으로 원하는 방향에 공을 보낼 수 있었다. 공격적인 역할을 맡고 자신감까지 오르자 박지성이 가진 장점이 월드컵 본선에 모두 발휘됐다. 멋진 골을 넣은 포르투갈전 외에 득점을 올리진 못했으나 이탈리아와 16강전에서도 박지성은 인상적이 측면 공격을 펼쳤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이후 PSV에인트호번 사령탑으로 부임했고, 박지성을 영입했다. PSV에서 주전으로 자리 잡기까지 혹독한 적응기가 있었으나 한국 대표팀에서와 마찬가지로 측면 공격수 역할을 맡아 활약했다. 2004/2005시즌 PSV를 UEFA챔피언스리그 4강으로 이끈 것은 2002 한일월드컵 4강 진출만큼이나 대단한 성과였다. 

이때 4강에서 만난 AC밀란의 젠나로 가투소가 박지성을 “모기 같은 선수”라고 표현했는데, 과감한 침투를통해 완성한 짜릿했던 골 장면도 대단했지만 전방에서 부지런한 수비로 밀란의 빌드업을 괴롭힌 전술적 활약이 더 대단했다. 

박지성은 PSV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2004/2005)에 프로 데뷔 후 첫 두 자릿수 득점(11골)을 기록할 정도로 공격적인 선수로 활약했다. PSV가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에서 대체로 경기를 주도하며 공격적인 플레이를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박지성도 기회를 만들어주면 충분히 화려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던 시즌이다. 당시 박지성은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는 더더욱 주도적인 공격 플레이를 펼치며 아시아 팀들을 흔들었다.  

3기: 맨유의 ‘언성히어로’ 퍼거슨 활용한 수비형 윙어(2005~)

박지성이 PSV에서 펼친 활약은 곧 유럽 빅리그의 관심을 모았다. 몇몇 팀들이 이미 거론되고 있었으나 2005년 여름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게 될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영입 작업이 성사됐다. 맨유에서도 박지성의 역할은 측면이었는데, 웨인 루니와 뤼트 판니스텔로이가 투톱을 이룬 4-4-2 포메이션의 측면 미드필더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역시 이때는 측면 미드필더로 뛰어 공격 포인트가 많던 시기가 아니다. 박지성과 호날두가 좌우 측면에서 호날두와 판니스텔로이를 지원하는 형태의 경기가 주를 이뤘다. 라이언 긱스는 황혼기를 맞아 측면이 아닌 중앙으로 들어와 공격을 지원했다. 박지성읜 맨유 공격진에서 수비적으로 가장 많은 임무를 부여 받았다. 판니스텔로이가 마무리, 루니가 돌진, 호날두가 돌파하고 긱스가 공을 뿌렸다. 박지성은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면서 이들의 전방 수비 부분을 커버했다. 공 없이 공간을 채우는 역할을 주로 한 ‘언성 히어로’였다.

2006/2007시즌에 박지성이 부상으로 고생한 사이 맨유는 호날두는 보다 골문에 가까운 위치로 세웠다. 루니-사아-호날두의 역동성이 빛났다. 부상 복귀 이후 박지성은 다시 본래 역할인 측면 미드필더 혹은 측면 공격수로 뛰며 수비적으로 헌신하면서 종종 번뜩이는 공격력을 보이며 당시 유럽 무대 최정상을 지배하던 맨유의 위상에 걸맞은 선수로 활약했다.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각종 트로피를 섭렵하던 화려한 맨유에서 박지성은 수비형 윙어라는 전술적 호평을 들으며 유럽축구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지금은 전방 압박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수비력이 출중한 윙어와 공격수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박지성 타입의 윙어는 드물었다. 지금도 활동량, 특히 적재적소에서 상대를 괴롭히는 진능적인 ‘오프 더 볼 움직임’에서 박지성 수준의 경기력을 보이는 선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4기: 피를로 지운 센트럴 파크, QPR-PSV의 중원 리더(2012~)

고질적인 무릎 부상은 ‘세 개의 폐’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산소탱크’ 박지성의 기동력에 문제를 야기했다. 퍼거슨 감독은 2009/2010시즌 AC밀란과 경기에서 당시 최고의 레지스타로 경기를 설계하던 안드레아 피를로를 막기 위해 박지성을 중앙에 배치해 꽁꽁 묶었다. 이때의 중앙 배치는 수비적인 선택이었는데, 이후 박지성은 국가대표팀에서 실질적으로 공격 지역의 프리롤에 가깝게 뛰었다. 

맨유에서 피를로 방어 전술은 일시적인 변화였지만 2012년 여름 QPR로 전격 이적한 뒤 주장 완장을 차고 활약할 때 박지성의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다. 속력이나 순발력이 다소 떨어졌으나 중앙 지역에서 공수를 오가며 엔진 역할을 했다. 하지만 QPR에서는 팀의 전체적인 부진과 부상 등이 겹쳐 맨유 시절에 보인 수준을 재현하지 못했다. 

박지성은 2013년 여름 유럽의 첫 번째 팀 PSV로 이적해 유종의 미를 거뒀다. PSV에서도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다. 에레디비시 23경기에서 2골 5도움을 기록하며 젊은 팀에서 베테랑 역할을 톡톡히 했다. 측면에서 전성시대를 보냈으나 중원에서 시작해 중원에서 마무리했다. 전천후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박지성은 필드 위 어느 곳에든 필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선수였다.

글=한준 기자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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