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도하(카타르)] 한준 기자= 축구 감독에게 철학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울리 슈틸리케(63) 감독은 독일 출신이지만, 스페인 클럽 레알마드리드의 레전드로, 한국 대표팀을 맡기 전까지도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었다. 슈틸리케 감독의 지도철학은 독일식 실용주의보다 스페인식 이상주의에 가깝다. 

슈틸리케 감독은 승리의 기술을 강조하는 레알마드리드보다 직접 그라운드에서 맞대결을 펼친 이후 흠모하게 된 요한 크라위프의 바르셀로나식 축구를 숭상한다. 볼을 소유하고, 상대 지역을 지배하며, 개별 선수들의 창조성을 통해 승리하는 축구다. 

#원인 분석 대신 현상 해설하는 슈틸리케

슈틸리케 감독이 대동한 피지컬 코치 카를로스 아르무아 역시 주제프 과르디올라가 지휘하던 당시 바르셀로나의 모델을 이상향으로 꼽으며 볼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슈틸리케 감독의 이상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다. 대개 그가 인터뷰에서 꺼내는 말 중에 ‘틀린 말’은 없다.

슈틸리케 감독의 발언을 살펴보면 개별적으로는 모두 정답을 말한다. 문제는 평론가의 관점에서 해설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점이다. 전략적 관점의 성찰보다 현상을 설명하고, 이상을 말하는 데 집중한다. 발언 자체는 합리적이지만,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법론을 꺼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 세밀하게, 더 과감하게. 혹은 더 자신있게라는 추상적 개념 하에 선수들에게 맡긴다.

축구 선수의 개별 발전을 위해선, 정해진 패턴 안에 선수를 가두기보다, 능동적으로 해결책을 찾기 위한 훈련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소년 축구에 더 적합한 개념이다. 더불어 충분한 훈련 시간을 보장 받았을 때 가능하다. 

더구나 슈틸리케 감독이 이상향으로 삼는 축구를 구현한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이나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은 창조적인 플레이를 위해 가혹할 정도로 강한 규율 속에 수 많은 시간을 디테일한 훈련에 집중한다. 완벽한 플레이를 위해 완벽한 준비를 한다. 수비 전술도 고도화된 지금 크라위프 시대의 방향성 만으로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없다. 

클럽 팀에 비해 소집 시간이 많지 않은 대표팀 레벨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자국리그 빅클럽 선수들을 뼈대로 부족한 조직력과 훈련 시간의 공백을 지우는 스페인, 독일 등 몇몇 유럽의 축구강국을 제외하면 국가대표 축구는 실리에 집중한다. 단단한 수비조직을 바탕으로 몇 가지 명확한 패턴 플레이를 조합해 결과를 추구한다. 치치 감독 부임 이후 브라질 대표팀이 개선된 배경에도 구조적 안정성과 중원 패턴 플레이의 완성도 향상에 있다. 

대표적인 축구 강국 역시 결과를 내기 위해선 견고한 조직 플레이를 필요로 한다. 개인에 의존하는 팀은 덜 창조적이라도 약속된 플레이를 확실하게 수행하는 팀에 질 수밖에 없다. 축구 경기에서 선수의 이름이 경기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 이유다. 슈틸리케호가 색깔이 없고, 전술이 없다는 지적을 받는 대목은 여기에 있다. 공을 통제해서 경기를 통제하겠다는 ‘교과서적 이상’만 있을 뿐, 그런 축구를 구현하기 위한 디테일이 없다.

#개인의 창조성에 의존하는 슈틸리케 축구

슈틸리케 감독은 부임 이후 경기력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좋은 모습을 보인 경우는 대개 선수 개개인의 역량이 빛난 경우가 많았다. 슈틸리케호가 추구하는 방향이 재능의 집합 속에 나오는 창조성에 있기 때문이다. 경기력이 들쑥날쑥한 이유다. 

‘2015 호주 아시안컵’은 ‘2014 브라질월드컵’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선수들의 정신력, 이전 코칭 스태프가 승계되면서 유지된 조직과 패턴 등이 몇몇 행운을 만나 결승 진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이후 진행된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은 미얀마와 라오스 같은 명백한 약체를 제외하면 시원한 경기를 하지 못했다.

특히 상대 수준이 높아진 최종예선에 접어든 이후로는 매 경기가 험난했다. 홈에서 네 번 이겼으나 모두 1골 차 신승이었다. 카타르와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는 역전승으로 간신히 이겼다. 그것도 후반전에 장신 공격수 김신욱을 투입해 가동한 롱볼 공격 패턴으로 이룬 성취였는데, 김신욱은 이 패턴 플레이를 “브라질월드컵을 준비할 때 홍명보 감독과 함께 만들던 플레이”라고 했다. 

김신욱을 활용한 고공 공격은 이란 원정과 중국 원정에서 완전히 수가 읽혔다. 이 두 경기의 패배는 한국의 러시아행 가능성을 위험 수준으로 만들었다. 김신욱 활용을 통한 플랜B가 무력화된 이후 스리백을 실험했으나 완성도가 떨어졌다. 

지난 3월 28일 시리아전 1-0 승리로 한숨 돌렸으나 지난 14일 새벽 카타르 원정 2-3 패배는 슈틸리케 감독이 설파한 이상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슈틸리케 감독 본인이 “전반전 점수 차는 0-1이었으나 시작부터 공을 통제하지 못했고, 경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슈틸리케의 978일, 흐릿한 성취

카타르전은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 후 치른 37번째 경기였다. 2014년 10월 10일 파라과이와 친선전이 처음이었으니 2년 10개월간 대표팀을 지휘했다. 카타르전까지 총 978일의 시간동안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이는 한국대표팀 감독 역사상 최장기간이며, 기간으로 따지면 그 자신의 감독 경력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슈틸리케 감독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다. 슈틸리케호는 최종예선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두고 원점에서 고민하고 있다. 지난 시간이 남긴 성취는 흐릿하다. 명확한 색깔을 구축하지 못하고, 승리의 방법론까지 찾지 못한 시간이었다. 확고한 이상이 고집으로 변질됐다. 이상을 현실로 만들 방법론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패배를 안긴 이란과 중국, 카타르 모두 자신들이 잘하는 것에 집중하며 실리적으로 경기를 준비했다. 누군가는 이들을 결과주의적 감독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결과를 내지 못하는 이상은 공허할 뿐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정형화된 패턴 플레이를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대 축구는 얼마나 치명적인 패턴 플레이를 준비하느냐에 성패가 갈린다. 슈틸리케호는 잘할 수 있는 플레이보다 잘하고 싶은 플레이에 집중하다가 허점을 드러냈다.

교과서 안에는 이론이 있을 뿐 현실이 없다. 이상이 통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면 대안을 찾아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됐지만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카타르전 패배는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최종예선 초입부터 시작된 불안은 본선 진출 실패라는 폭탄 앞에 섰다.

흔들리는 감독에게 믿음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가만히 있어선 안될 때도 있다. 대한축구협회도 이상주의에 발목 잡혔다. 기다려 줘야 할 때 기다리지 못했고, 기다리지 말아야 할때 기다렸다. 모든 이상은 냉정한 현실인식에 기반해야 한다. 협회도 슈틸리케도 그점에서 실패했다.

사진=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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