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디종(프랑스)] 김정용 기자= 유럽 도시는 축구팀 이름으로 기억된다. 이경규 씨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도시 이름 대기 게임을 할 때 “살케공사”를 비롯해 부정확한 축구팀 이름을 나열한 적이 있었다. 축구는 한국인이 외국 도시 이름을 외울 때 쓰는 가장 좋은 기억법이다. 축구팬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디종이라는 지명이 한국인들에게 낯설었던 것도 명문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디종은 아름다운 건축물과 유럽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겨자 소스를 가진 도시다. 그러나 축구 실력으로 따지면 빛난 적이 없다. 2011/2012시즌 프랑스리그앙으로 승격했다가 한 시즌 만에 다시 강등됐다. 2016년 다시 승격해 사상 첫 잔류에 성공했다. 중위권 순위를 유지 중인 2017/2018시즌이 구단 역사상 최고 전성기다.

권창훈은 한국 사람들에게 디종을, 디종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린다. 디종의 이번 시즌 전반기 순위는 10위였다. 역사상 가장 좋은 시즌의 중심에서 권창훈이 맹활약했다. 권창훈은 5골 2도움을 기록했다. 프랑스에서의 상승세는 한국으로 이어졌다. 디종의 새 시즌이 시작되고 약 한 달 뒤, 신태용 감독이 한국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2016년 리우데자이네루에서 강한 신뢰를 보냈던 신 감독은 곧바로 권창훈을 팀의 중심에 끌어들였다.

대표 데뷔 이후 2년간 교체 멤버로 취급됐던 권창훈은 이제 한국의 중심이다. 권창훈은 4-4-2 포메이션의 오른쪽 미드필더로 배치돼 중앙으로 파고들며 왼발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한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없는 4-4-2는 팀이 경직되기 쉬운 전형이다. 권창훈의 동선에 따라 팀은 4-3-3이나 4-3-1-2 모양으로 순간적인 변화를 겪으며 유연성을 갖는다. 신 감독은 지난해 11월 평가전에서 권창훈에게 이 역할을 맡기며 가능성을 봤고, 국내파 위주 평가전에서도 이재성을 같은 자리에 테스트하며 월드컵의 ‘플랜 A’가 될 것을 예고했다.

권창훈을 만나러 가는 6일(현지시간), 파리 기차역을 벗어나니 눈밭이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프랑스 역시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디종에는 눈 대신 비가 내렸다. 몸을 꽁꽁 싸매고 훈련한 권창훈은 샤워를 한 뒤 특유의 미소 띤 얼굴로 인터뷰에 응했다. 권창훈은 월드컵에서 활약할 자신을 예고했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음은 권창훈과 한 인터뷰 전문.

-1년 동안 불어는 많이 배우셨나요?

공부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두 번. 이제 기본적인 건 배웠죠. 근데 말이 쉽게 안 나오더라고요. 리스닝은, 음, 그것도 모르겠어요. 프랑스 사람들은 말이 너무 빨라요. 오늘 오후 운동을 안 하고 단체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하더라고요. 팀에 멘탈리스트 코치가 새로 왔거든요. 그럴 때는 불어로 진행되죠. 저는 못 알아들어요. 훈련장에서는 그래도 말이 어느 정도 통하지만 이런 자리에선 이해햐기 힘들어요. 그래서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 애들에게 어떤 이야기였냐고 다시 물어봐요.

 

-동네도 조용하고, 팀 분위기도 정다운 것 같던데요.

지역 분위기의 영향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팀 자체에 예전부터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팀과는 조금 다르게 한국식 느낌이 나요. 제가 처음 왔을 때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챙겨주려고 했어요. 감독 말을 이해 못한 것 같으면 어떻게든 알려주려고 옆에서 끙끙대더라고요. 도움을 많이 받았죠. 여기 선수들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먼저 반갑게 인사해 줘요. (우사마) 하다디처럼 친한 몇 명에게는 한국어를 가르쳐 줬어요. 이제 그 친구들은 저와 저의 아버지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하죠.

 

-2016/2017시즌 후반기와 2017/2018시즌 전반기는 디종도 권창훈도 눈에 띄게 달라졌어요. 팀 성적도, 본인 기록도 좋아졌잖아요. 한국에서도 관심이 확 늘었고요.

1년 전 디종에 처음 왔을 땐 갑자기 팀에 투입된 거였고, 이번엔 전지훈련부터 함께 했으니까요. 디종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처음엔 선수들과도 서먹서먹하고, 감독이 뭘 원하는지 몰랐죠. 그땐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손짓발짓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알아갔던 게 도움을 준 것 같아요.

이번 시즌 세 경기 연속골 넣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가장 최근에 넣은 왼발 논스톱 슛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는데?) 그쵸. 뭐, 모르겠어요. 그때는 그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발이 나가서 저절로 됐거든요. 그게 자신감 아닐까요. 그런 마음으로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골은 넣어도 완전히 만족하는 경기는 없어요. 불만족스러운 경기는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어요. 만족을 잘 못 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수원삼성 시절에는 권창훈이 공격 자원인지, 뒤쪽에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미드필더인지 잘 모르겠다는 시각도 있었어요. 유럽에서 뛰면서 정체성이 더 확실해진 것 같나요?

일단 다양한 포지션을 볼 수 있는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고 팀을 위해서요. 여기는 더 확실하게 선수 역할을 구분하는 것 같아요. 번호도 딱 정해져 있잖아요. 공격형 미드필더는 10번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저는 늘 사이드, 오른쪽 사이드를 맡고 있어요. 그러니까 공격 작업을 더 잘 해야 하죠. 골과 어시스트뿐 아니라 경기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더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게 부족하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대표팀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잖아요. 권창훈 선수가 디종에서 상승세를 탄 시점과 대표팀에서 신 감독에게 중용되기 시작한 시점이 비슷했어요.

두 팀에서 제 포지션이 비슷하고 플레이하는 방식도 좀 비슷하다보니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두 감독님 모두 사이드에 넓게 벌려 있는 걸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서 미드필드를 강화하면서 플레이하기를 원하세요. 그런 점에서 저도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플레이예요. 그게 팀 전술과 잘 맞아 돌아갔던 것 같아요. 제가 안으로 파고들 때 동료들이 다같이 움직이면서 도와주니까요.

 

-양쪽에서 시너지 효과가 났다는 거군요.

네. 서로 좋은 상황 같아요. 디종에서 계속 경기를 뛰어야 대표팀에서도 시너지를 유지할 수 있고. 대표팀에서 경기를 잘 하면 디종에서 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두 가지가 어우러지면서 서로 잘 된 것 같아요.

 

-유럽에 나오려 했단 보람이 있네요. 요즘엔 중동, 중국 같은 선택지도 있는데 권창훈 선수는 늘 유럽에 가길 원했죠.

항상 오고 싶었어요. 어느 팀이든 일단 와서 경험해보고 싶었고 증명하고 싶었거든요. 축구를 하는 동안 저 자신을 더 발전시키고 싶었어요. 이제 시작이죠. 이제부터 발전해야죠. 처음 와서는 발전보다 적응부터 시작해야 했으니까.

 

-유럽 진출 1주년이 갓 지났는데요, 그동안 발전한 게 있다면?

확실히 경기 템포와 공수 전환 속도가 빨라요. 처음에는 그 속도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수비하고 공격하고, 쉴 틈 없이 또 수비하고 공격해야 하니까. 그 속도전 속에서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며 준비하게 돼요. 생존법? 뛰어야죠! 일단 뛰어야죠. 안 뛰면 저에게 공이 안 올 뿐 아니라 제 주위 선수들의 플레이까지 안 되거든요. 그 속에서 피지컬이 좋아지는 면도 있고.

 

-피지컬이 좋아졌다고요?

여기 애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거든요. 저도 웨이트를 늘렸어요. 무엇보다 빠른 경기를 소화하다보니까 경기 체력이 늘어났죠. 지구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한국 선수들은 유럽에서 다들 많이 뛰며 살아남았잖아요. 저도 많이 뛰어야만 하니까.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올리비에 달롤리오 감독과 코칭 스태프에게 특별히 받은 요구가 있어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오른발이었어요. 오른발을 많이 쓰면 상대가 막기 어려울 거라고요. 그래서 훈련 중에 오른발을 많이 쓰게 되는 것 같아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요. 그렇다고 해서 오른발 킥을 따로 연습하진 않아요. 킥 연습을 할 때는 여전히 왼발 위주로 하죠.

 

-구단 시설이 수원보다 좋다고는 볼 수 없는데요. 오히려 수원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렇죠. 훈련법도 요즘은 유럽이나 한국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한국 코치님들이 유럽에서 배워 온 걸 한국에 적용하시니까요. 컨디션 관리에 대한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운동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있다는 거? 저는 어떻게든 운동을 더 하려고 했어요. 여기 선수들은 자기 컨디션에 맞춰서 운동해요. 저는 지난 경기를 안 뛰었으니까 훈련을 조금 더 했죠. 지난 경기를 소화했다면 운동을 많이 하지 않고 몸 상태만 조절하더라고요.

 

-편하게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축구하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아요. 외지 경험이 처음인데다 본격적인 주전 경쟁도 처음이고.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은데요.

프로 1, 2년차에도 주전 경쟁은 했지만 그땐 스트레스를 느꼈다고 하기엔 좀, 뭔가 달랐죠. 지금처럼 경쟁하는 건 처음이죠. 스트레스라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연히 처음에는 기회가 없을 걸 알았고, 제가 훈련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에 따라 팀 생각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불만보다는 훈련장에서 더 노력해야 했어요. 제가 가진 걸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돌아오는 건 없잖아요? 어쨌든 해내야 되는 일이니까.

-유럽에 온지 1년 만에 여러 이적설이 나온 건 잘 했다는 뜻 아닐까요? 현지 팬들은 권창훈 선수가 독일 팀으로 이적할까봐 걱정도 했다던데.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사실 저는 잘 몰라요. 저에게까지 공식적으로 들어온 이야기는 없었거든요. 어쨌든 1월은 지나갔고, 이제 디종을 위해 열심히 해야죠. 물론 관심을 받았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부정하고 움츠러들 필요는 없잖아요. 더 자신감 있게 뛸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권창훈 선수가 계속 화제에 오르니까 프랑스 리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 같아요. 이재성 선수도 좋은 팀 이적을 노리다가 최근에는 프랑스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했고요.

저는 재성이 형에게 나오라고 하죠. 형만 오케이라면 언제든지 유럽으로 오는 게 좋겠다는 말을 지난번 만났을 때도 했어요. 한국 선수들이 유럽에 많이 오고 자신을 증명해가는 건 긍정적인 것 아닌가요? 선수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일이잖아요. 저는 프랑스를 추천하고 싶어요. 재성이 형만 원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곳 같아요. 워낙 능력이 좋은 형이니까 어딜 가도 잘 할 거고요.

 

-잠깐 둘러봤는데 이 도시는 좀 심심해 보이던데요.

할 게 없어 보이죠? 시내가 작아서 나가도 할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차를 마시러 가서 바람 쐬는 정도? 파리에 자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원래 한국에서도 안 나가서 별 차이는 없어요. 오전 운동하고, 점심 먹고, 쉬다가 한숨 자고, 산책 하고, 오후 운동하고, 저녁에는 다음날 오전에 운동해야 하니까 자고. 아, 불어 공부 하는 날에는 공부하고. 그것 뿐? 그나마 하는 거라면 외식 정도죠.

 

-외식은 입에 맞아요? 프랑스 요리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많이 갈리던데.

전 맛있던데요? 달팽이도 맛있고, 빵이 맛있어요. 바게트가 제일 맛있고요. (풋볼리스트: 빵 이야기를 했으니 기사 제목이 하나 나오는 셈인데) 어, 그럼 그만 할게요. 근데 빵 종류도 많고 맛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연어, 닭가슴살, 한 군데 알아놓은 식당의 맛있는 스테이크.

 

-수원 소식은 계속 보나요?

기사도 계속 보고, (염)기훈이 형과 종종 연락해요. 기훈이 형은 대표팀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에게 프랑스 좋냐고 물어보던데요.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해 주시더라고요. (풋볼리스트: 기훈이 형에게 연락한다고 도움이 되진 않을텐데) 사실 그건 그렇죠. 기훈이 형도 힘드실텐데. 저 있을 때도 계속 주장으로서 팀을 이끄는 거 보면서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올해 수원이 기대를 많이 받던데요.

우승하지 않을까요? 제 바람 반, 예상 반이예요. 데얀에게 골 기회를 만들어 줄 선수가 기훈이 형 말고도 많이 들어온 것 같던데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생애 첫 월드컵을 1년 반 앞둔 시점에서 유럽에 도전했어요. 수원 시절보다 더 성장한 모습을 월드컵에서 보여줄 자신이 있나요?

그럼요. 항상 자신감을 갖고 축구해야죠. 제 기량이 계속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선수가 될 수 없어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축구해야 기분이 좋은 만큼 몸도 좋아지죠. 일단 3월 평가전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때까지 디종에서 좋은 모습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죠. 그리고 5월부터 월드컵 일정에 돌입하니까 그때까지 경기장에서 집중하고 싶어요. 부상을 피하는 것도 중요할 테고.

요즘 대표팀 경기는 다 보고 있어요. 잘하던데요. 제 빈자리가 별로 보이진 않더라고요. 뭐, 제가 팀에 꼭 필요한 선수인 것도 좋지만 다른 선수들이 잘 해주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사진= 풋볼리스트

*권창훈이 바라는 K리그 우승팀 영상 보기(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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