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선수는 성장하고 진화한다. 한결 같은 패턴으로 경기하는 이도 있지만, 주어진 상황이나 포지션에 따라 경기 방식을 바꾸는 이도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프란체스코 토티 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풋볼리스트'는 진화하고 변화한 선수 이야기를 모았다. 

세르히오 라모스는 파올로 말디니에 대한 스페인의 대답이자, 카를라스 푸욜에 대한 레알마드리드의 대답이었다. 말디니와 푸욜 모두 지워지지 않는 축구사의 일부가 되었지만, 라모스는 이들의 뒤를 따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존재로 나아가고 있다. 

“푸욜과 말디니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나일뿐”이라는 말로 자신 만의 길을 개척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온 라모스는, 열정적으로 측면을 달리던 풀백에서 노련하게 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센터백으로 자리매김했다. 

라모스가 프로 경력 내내 포지션을 바꾸며 풀백과 센터백으로 모두 ‘월드베스트11’에 선정되었던 길은, 축구 전술사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라모스는 183센티미터의 신장에 우람한 체격은 아니지만, 현대 축구의 전술 진보에 따라 빠르고 기술적이며, 무엇보다 경기를 읽는 타월한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풀백과 센터백의 경계를 허물며 수비수 포지션의 새로운 교과서가 되고 있다.  

1기: 세비야 유스팀의 작품, 10대의 나이로 주전 라이트백 꿰차다

지금 세비야는 탁월한 선수 스카우팅 능력으로 주목 받지만, 헤수스 나바스와 세르히오 라모스를 배출할 때까지만 해도 유소년 팀의 성과가 돋보였다. 당시 세비야가 키운 선수들의 특징은 탁월한 측면 공격력이었는데, 경기 중 심장 마비로 사망한 레프트백 안토니오 푸에르타와 지금은 레알마드리드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세르히오 라모스가 공격적인 좌우 윙백으로 세비야 유스팀을 이끌었다. 

라모스는 아직 만 18세에 불과했던 2004년 2월 1일 데포르티보라코루냐와 라리가 22라운드 경기에 교체 출전해 프로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때 포지션도 라이트백이었다. 라모스는 2003/2004시즌 라리가 후반기에 총 7차례 출전 기회를 얻었는데, 초반 4경기는 교체로 잠시 그라운드를 밟았다. 시즌 말미에 35라운드 아틀레틱클럽, 36라운드 발렌시아, 37라운드 알바세테전까지 3경기 연속 선발 출전 기회를 잡았다. 두 경기는 라이트백, 한 경기는 레프트백으로 뛰었다. 

여전히 10대의 나이였던 2004/2005시즌에 라모스는 세비야의 주전 풀백으로 자리 잡았다. 라리가에서만 31경기에 출전했다. 전반기 내내 라이트백 자리에서 뛰었고, 레알소시에다드와 5라운드 경기에서는 홀로 1득점 1도움을 올리는 원맨쇼로 2-1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 시즌 막판 5경기에는 센터백으로 나섰는데, 기존 주전 센터백 아이토르 오시오와 하비 나바로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세비야에는 라이트백 자리를 볼 수 있는 다니 아우베스도 있었다. 라모스는 이 선수들과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라모스를 세비야 1군으로 데뷔시킨 호아킨 카파로스 감독은 두 포지션을 모두 맡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라모스가 데뷔 당시부터 멀티 수비수로 최고의 자질을 갖춘 선수였다고 회고했다.

“리아소르에서 풀백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중앙 수비수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센터백으로 나서면 측면에서 뛰는 선수를 잘 도왔다. 그는 언제 공을 자르러 나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풀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해 센터백의 공간을 차단했다. 라모스는 그런 정보를 갖고 있는 선수다.” (호아킨 카파로스)

2기: 2,700만 유로에 레알 이적, 이에로 등번호 이어받은 센터백

2005년 여름, 레알마드리드는 세비야가 낳은 스페인 축구 최고의 수비 유망주를 2,700만 유로 이적료에 영입한다. 레알은 팀의 레전드 수비수인 페르난도 이에로가 달았던 등번호 4번을 라모스에 선사하며 기대를 보냈다. 라모스는 2005/2006시즌 개막전을 세비야에서 센터백 자리로 소화한 이후 레알 유니폼을 입었다. 라모스는 레알에서 33경기에 나섰고 이중 26경기를 센터백, 6경기를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뛰었다. 

라모스는 이 시즌을 보내며 스무살이 되었는데,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큰 무대에서도 7차례 선발 출전을 하며 일찌감치 탁월한 능력을 펼쳤다. 이에로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충족했다. 라이트백 자리에서 라모스는 종종 수비 복귀가 늦거나, 포백 라인 컨트롤에 문제를 보여 수비력에 대해 지적 받았는데, 센터백으로 뛰는 경기에서는 오히려 빠른 스피드를 통한 안정적인 배후 커버로 수비측면에서 호평 받았다.

라모스는 이미 세비야 소속이던 2005년 3월 살라망카에서 치른 중국과 A매치 친선 경기에서 만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는 당시까지 스페인 축구 대표팀에서 반 세기 만에 최연소 국가대표 출전 기록이었다. 2006 독일월드컵에 참가했고, 유로2008 예선전에도 주전 자리를 꿰찼는데, 모두 라이트백 자리에서 뛰었다. 소속팀 레알에서 주어진 임무와 달랐다.

레알에서 다시 포지션을 바꿔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루며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되는 파비오 칸나바로가 가세했고, 2007년 여름에는 포르투에서 탁월한 수비력을 보인 페페가 영입됐다. 라모스는 2006/2007시즌에 센터백과 라이트백 포지션을 번갈아 소화했으나 센터백 비중이 더 컸다. 

페페가 합류한 2007/2008시즌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라이트백으로 뛰었으며, 2008/2009시즌에는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로 전진배치되어 뛸 정도로 측면 지향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때 라모스는 세트피스 상황에서 헤더로 득점하는 능력과 더불어 오버래핑 상황에서 예리한 크로스패스로도 많은 도움을 올렸다. 라울, 판니스텔로이, 이과인 등을 향해 배급한 크로스로 세 시즌 동안 1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라모스의 수비 라인 파트너였던 칸나바로는 라모스가 센터백과 라이트백으로 모두 훌륭하지만 공격 재능을 뽐낼 수 있는 라이트백 자리가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르히오는 두 포지션에서 모두 잘할 수 있는 선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난 그가 풀백으로 뛰는 게 더 좋다.  나에겐 기대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도 풀백으로 뛰었더라면 더 즐겁게 축구를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파비오 칸나바로)

3기: 대표팀에선 라이트백, 레알에선 센터백

라모스의 기량은 점차 원숙해졌다. 라모스와 마찬가지로 본래 풀백으로 시작했다가 센터백으로 자리를 잡은 카를라스 푸욜이 건재하던 시기, 라모스는 대표팀에서 풀백으로 뛰었다. 유로2008 우승을 이루던 당시는 물론, 2010 남아공월드컵 우승까지 라이트백 자리에서 해냈다. 라모스는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으로 평가 받았다. 갈락티코 2기 군단이 형성된 2009/2010시즌까지 레알에서도 라이트백으로 경기에 나서는 비중이 더 컸다.

라모스는 “어느 자리는 좋다. 감독이 맡기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해왔다. 라모스는 두 포지션 모두의 장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선수다. 그는 이 시기에 어느 위치를 가장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여러 인터뷰에서 받았다. 

“측면에서는 더 많은 자유가 있다. 더 많이 뛰어야 한다. 골에 더 가까운 플레이를 한다. 선수 입장에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크고, 피지컬적으로 요구되는 게 많은 자리다. 센터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라모스는 2010 남아공월드컵 이전에 대표팀에서는 풀백으로 뛰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월드컵 우승 이후다. 2010년 여름 레알에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하고, 스페인 대표팀에서 푸욜이 은퇴하면서 라모스는 센터백포지션에 정착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레알마드리드에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라이트백들이 있다. 예를 들면, 세르히오 라모스다. 내가 아주, 아주 좋아하는 선수다. 하지만 내가 축구를 보는 관점에서는, 라모스는 라이트백 보다 센터백 자리에서 훨씬 더 좋은 수비수가 될 수 있다.” (주제 무리뉴)

라모스 역시 체력 부담과 수비 불안이라는 측면으로 인해 센터백이 더 편한 자리인게 사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센터백이 더 편하고, 공과의 접촉도 많다. 지금은 이 자리가 더 좋다.” 2010/2011시즌에 라모스는 라리가에서 라이트백으로 21차례, 센터백으로 8차례 선발 출전했다. 2011/2012시즌에는 34차례 라리가 경기 중 29경기를 센터백 자리에서 소화했다. 유로2012 우승 과정에서 라모스는 6경기를 모두 센터백으로 뛰었다. 

4기: “라모스는 말디니가 가진 모든 것을 가졌다”

세계 축구계에는 풀백과 센터백을 겸하며 최고의 수비수 칭호를 받은 전례가 여럿 있다. 이탈리아의 파올로 말디니와 바르셀로나의 푸욜이 대표적이다. 라모스는 푸욜과 함께 뛰며 근거리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푸욜을 존경한다. 그는 센터백 포지션에서 귀감이자, 한 명의 동료로서도 큰 귀감이 되는 선수다.” 하지만 라모스는 제2의 누군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라모스는 ‘제1의 라모스’가 되기 위한 길을 택했다. 

“푸욜은 푸욜이고 나는 나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인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푸욜에게 항상 많은 걸 배우지만 나 역시 매일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라모스가 아직 센터백과 라이트백의 기로에 서 있던 2009년, 말디니를 만난 일이 있다. 스페인 스포츠 신문 ‘마르카’는 두 선수의 합동 인터뷰를 주선했다. 라모스는 이 자리에서 “파올로 말디니는 내 우상이자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세비야에서 살 때 아버지와 형제들이 말디니의 비디오를 보여주며 배우라고 했었다 .말디니는 아마 모든 축구 선수들의 귀감일 것이다. 그는 전설이다. 내 이름도 말디니처럼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말디니는 라모스가 자신에 버금하는, 혹은 뛰어넘을 수 있는 전설적인 수비수가 될 수 있다고 덕담했다. “그렇게 못될 이유가 어디 있나? 세르히오는 모든 것을 가졌다. 빠르고, 힘있고, 기술이 뛰어난데다, 위대한 팀에서 뛰고 있다. 내가 밀란에서 뒨 것처럼 많이다. 레알은 밀란처럼 역사와 전통, 수많은 트로피를 가진 팀이다. 세르히오는 젊고 시간도 많다.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무궁하다.”

말디니가 이 멘트를 남긴 이후 8년의 시간이 흘렀고, 라모스는 두 번의 챔피스리그 우승과 한 번의 월드컵 우승을 이루며 세계 축구사의 전설이 됐다. 라모스와 라데시마를 이룬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밀란에서 말디니와 같은 일을 해낸 바 있다. 그런 안첼로티 감독이 라모스가 말디니와 비견할만한 선수라고 공인해줬다.

“라모스는 말디니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진 선수다. 인성, 기술력,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 모두 팀을 이끄는 능력까지. 지금까지 누구도 말디니와 비교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세르히오는 세계 최고의 수비수다.” (카를로 안첼로티)

현재: ‘역대급 득점력’ 공격수의 정신을 가진 센터백

이제 라모스는 풀백과 센터백을 오가는 선수가 아니라 센터백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특별한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라이트백으로 뛰어야 하는 경우는 없다. 지난 5년 사이 라모스가 우측면 지역에서 경기를 뛴 것은 5회를 넘지 않는다.

라모스도 이제는 “축구 경력을 오래 해왔고, 이제는 한 자리에서 견고하게 뛰고 싶다. 지난 몇 년간 맡아온 센터백 포지션이 좋다. 대표팀에서도 그렇고 소속팀에서도 센터백으로 뛰고 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안정적이다. 내가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 좋다”고 말한다. 

풀백에서 센터백을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라모스는 성장과 진화를 거듭했다. 어느덧 만 31세가 된 라모스는 지금도 발전하고 있다. 라모스는 현재 진행 중인 2016/2017시즌 라리가에서만 7골을 기록 중이다. 왠만한 스트라이커 못지 않은 득점력이다. 전체 공식 경기에서 33경기 출전 10득점으로 두 자릿수 득점에 도달했다.

라모스는 어려서부터 득점력이 탁월한 수비수였다. 레알 입단 이후 한 시즌 최소 득점 기록이 3골이다. 2015/2016시즌의 일이다. 2013/2014시즌과 2014/22015시즌에는 각각 7골을 넣었고, 2005/2006시즌 입단 이후 네 시즌 연속 6골씩 넣었다.

라모스의 헤더의 제왕이다. 레알에서 기록한 골이 대부분 세트피스 상황의 헤더다. 2005/2006시즌 라리가에서 넣은 4골이 모두 헤더 득점이었고, 같은 시즌 챔피언스리그 데뷔골도 헤더로 성공했다. 레알에서 뛴 511경기에서 68골을 기록 중인데, 이중 44골을 머리로 넣었다.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순간 넣은 골이 많아 임팩트도 컸다.

레알 레전드 산티야나는 이런 라모스의 헤더 득점력에 대해 “우리 시대에도 헤더를 잘 하는 선수는 있었지만 라모스가 보여주는 피지컬은 단연 인상적이다. 특히 점프력이 대단하다. 라모스는 공격수처럼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공격수의 정신을 가졌다. 공이 어디로 갈지를 예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는 경기를 미리 읽을 수 있는데, 그게 가장 큰 힘이자 열쇠”라고 설명했다.

산티야나는 라모스와 같은 능력은 훈련으로 구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슈팅은 연습할 수 있지만, 예측 능력과 위치 선정 능력은 깨닫는 것이다. 어디에 있어야 하고, 언제 뛰기 시작해야 하고, 언제 점프를 해야 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임팩트를 줘야하는데, 어떻게 몸을 돌려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공격수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라모스에게 공격수의 감각이 있다고 말한 것은, 세비야 시절 그를 지도했던 카파로스 감독도 언급한 바 있다. 라모스는 직접 프리킥으로도 심심치 않게 득점하고 있고, 축구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기술적인 면 뿐 아니라 팀 원 전체를 이끌며 팀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타고난 리더다. 라모스의 축구 경력은 아직 한창이고, 몇 년 뒤에는 그가 또 다른 길을 개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라모스는 때로 중앙 공격수가 된 것처럼 생각을 한다. 슈팅도 아주 아크로바틱하게 구사한다. 세르히오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중거리 슈팅 능력도 좋아지고 있다. 이에로처럼 정밀해지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도 계속 발전하기 위해 훈련하고 있다.” (호아킨 카파로스)

글=한준 기자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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