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선수는 성장하고 진화한다. 한결 같은 패턴으로 경기하는 이도 있지만, 주어진 상황이나 포지션에 따라 경기 방식을 바꾸는 이도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프란체스코 토티 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풋볼리스트'는 진화하고 변화한 선수 이야기를 모았다.

스티븐 제라드는 현역 시절 팀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으로 ‘리버풀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플레이스타일도 심장처럼 팀 전체에 동력을 제공하고 동료들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리버풀은 제라드에 의존해 많은 위기를 돌파해 나갔다.

제라드 포지션은 큰 틀에서 미드필더였을뿐, 구체적인 위치를 가리지 않았다. 측면 미드필더로 데뷔한 제라드는 어느 포지션에 배치해도 능력이 아쉬운 선수였다. 결국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전성기를 보내긴 했지만 좀 더 후방에 있을 때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도 있다. ‘완벽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라는 건 미드필더로서 모든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1기 :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잉글랜드식 4-4-2’의 완성형 선수(1998~~ )

9세에 리버풀 유소년팀에 입단한 제라드는 17세에 프로 계약을 맺었고, 이듬해인 1998년 11월 교체 투입되며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 바로 다음 경기에서 선발 출장했다. 상대는 토트넘홋스퍼였다.

선발 데뷔전에서 제라드가 맡은 위치는 오른쪽 미드필더였다. 이때 제라드가 ‘윙어’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어식 표현에서 윙어(winger)는 한국식 표현의 ‘윙 포워드’에 가깝다. 4-3-3, 3-4-3 등의 포메이션에서 측면 공격수로 뛰는 선수를 주로 윙어라고 부른다. 4-4-2의 좌우를 맡는 선수는 공격수가 아니라 미드필더로 분류되며, 윙어보다 부지런하게 공수를 오가야 한다.

특히 잉글랜드에서 좌우 미드필더는 중앙 미드필더와 큰 차이가 없는 역할을 맡곤 했다. 활동량 많은 미드필더 4명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공을 쫓는 것이 과거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였다. 그래서 훌륭한 측면 미드필더는 곧 훌륭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들의 임무였다. 제라드와 비슷한 세대 중에는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리 보이어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슬라이딩 태클과 돌파력이 모두 좋은 제라드는 팀 사정에 따라 측면과 중앙으로 자주 오갔다. 선발 데뷔전에서 오른쪽에 배치된 제라드는 상대 왼쪽 미드필더인 다비 지놀라를 막아야 했다. 지놀라는 그 시즌 P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다. 너무 어려운 상대와 매치업을 가진 제라드는 후반 10분에 교체 아웃됐다. 나중에 “폴 인스가 계속 내게 뭐라고 했고, 지놀라는 날 바보로 만들었다. 내 포지션이 아니었고 내 깜냥도 아니었다”며 데뷔전이 끔찍한 기억이었다고 회고했다.

제라르 울리에 감독은 1999/2000시즌 제라드를 본격적인 주전으로 활용하면서 중앙에 더 많이 배치했다. 제이미 레드납의 파트너였다. 당시 좌우 측면에서 뛴 데이비드 톰슨, 파트리크 베르게르 역시 중앙과 측면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역동적인 선수들이었다.

제라드에게 더 어울리는 포지션이 중앙이라는 건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2000/2001시즌, 제라드는 리버풀의 ‘미니 트레블(FA컵, 리그컵, UEFA컵)’을 이끌며 활약했다. 중앙 미드필더 주전을 차지한 제라드는 UEFA컵 결승전을 비롯해 총 10골을 넣으며 공격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2기 : 실험 끝에 찾은 답, 토레스의 파트너(2007~ )

제라드의 활용법에 대한 고민은 울리에 감독이 떠나고 2004년 라파 베니테스 감독이 부임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제라드는 2003년부터 사미 히피아의 뒤를 이어 주장 완장을 찼고, 팀내 영향력이 높아진 뒤에도 그날그날 전술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떠도는 신세였다. 특히 2004년 사비 알론소가 영입된 뒤에는 두 선수의 이상적인 공존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2004/2005시즌 베니테스 감독의 해법은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 디트마어 하만까지 투입해 4-3-3에 가까운 포진을 짜는 것이었다. 제라드와 알론소는 하만의 보좌를 받으며 경기 조율과 미드필드 장악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버풀 선수단은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상태였고, 이 조합이 정답은 아니었다.

시즌 내내 실험을 계속한 베니테스 감독은 특유의 ‘컵대회 DNA’를 살려 UEFA 챔피언스리그(UCL)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결승전 포진은 4-4-2에 가까웠다. 알론소와 제라드가 중앙을 맡고, 욘 아르네 리세와 루이스 가르시아가 좌우 미드필더를 맡았다. 해리 큐얼이 섀도 스트라이커를, 밀란 바로스가 최전방 공격수를 맡았다. 그러나 큐얼의 부상, 전반전만에 3골을 내주는 끔찍한 경기 장악력 때문에 베니테스 감독은 하프타임부터 도박을 시도했다. 하만을 투입하고 당시만 해도 정상급 경기에서 잘 쓰이지 않던 스리백을 시도해 후반전에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제라드는 이 과정에서 오른쪽 윙백을 맡았다가 최전방으로 쇄도하는 등 전술적 만능키 겸 ‘심장’으로서 맹활약했다. ‘이스탄불의 기적’이다.

중앙 미드필더로 모하메드 시소코가 추가로 합류한 뒤에는 제라드가 오른쪽에 배치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리버풀은 서서히 최상의 조합을 맞춰 나갔다. 2007년 1월에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합류하며 미드필드가 더 두터워졌다. 베니테스 감독은 로테이션 시스템에 따라 알론소와 시소코, 마스체라노와 제라드를 각각 번갈아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으로 가면서 알론소와 마스체라노에게 미드필드 후방을 맡기고 제라드를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배치하는 경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7년 여름 마침내 페르난도 토레스가 합류했고, 반 시즌 정도 실험을 거쳐 후반기에 마침내 제라드와 토레스의 황금 라인이 만들어졌다. 제라드는 경기 조율을 알론소에게, 중원 장악을 마스체라노에게 맡기고 공격력에 힘을 실을 수 있게 됐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제라드는 돌파, 패스, 슛, 전방 압박 등 다양한 무기를 가진 뛰어난 선수였다. 지네딘 지단처럼 우아한 플레이는 할 줄 모르지만 리버풀의 강한 압박과 빠른 경기 속도에는 제라드가 더 어울렸다. 좌우에는 라이언 바벌과 디르크 쿠이트가 있었다. 토레스가 24골, 제라드가 11골을 몰아쳤다. 가장 정답에 가까운 조합이었다.

완성된 멤버로 치른 2008/2009시즌, 리버풀은 우승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보다 승점 4점 뒤쳐진 리그 2위를 기록한다. 제라드와 토레스가 함께 전성기를 누린 시기다. 공격수 로비 킨을 영입했다가 반년 만에 돌려보내는 실수를 겪으며 토레스의 시즌 득점은 14골에 불과했지만 제라드가 16골을 넣으며 공격을 주도했다. 리버풀은 ‘4강’ 라이벌이었던 맨유, 첼시, 아스널을 상대로 4승 2무를 기록했다. 토레스는 14골 중 5골을 이 6경기에 집중시켰다. 제라드와 토레스의 조합은 상대가 강할수록 마주 강해졌다.

완벽한 듯 보였던 조합은 겨우 두 시즌만에 깨졌다. 사비 알론소가 레알마드리드로 가며 큰 타격이 생겼다. 알론소의 자리를 당시만 해도 유망주였던 루카스 레이바가 메워봤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여전히 토레스, 제라드를 중심으로 한 전방의 공격력은 강했지만 리버풀은 리그 7위에 머물렀고 UCL에서도 조별리그 통과에 실패했다. 베니테스 감독까지 떠났고, 리버풀은 로이 호지슨 감독과 케니 달글리시 감독을 거치며 계속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2011년 1월 토레스까지 떠났다. 제라드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등을 오가며 활약했지만 혼자 힘으로 순위를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3기 : 실수 뒤에 잊혀진 경기 조율 능력(2013~ )

나이를 먹어가며 제라드의 플레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침착하게 경기를 조율하지 못한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던 제라드가 역동적인 젊은 시절의 플레이 대신 노련한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는 ‘유로 2012’였다. 제라드는 리버풀에서도 함께 했던 호지슨 감독의 답답한 4-4-2 포진 속에서 중앙 미드필더를 맡았다.

32세 제라드는 20대 시절처럼 경기 내내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침착하게 좋은 위치를 선점해 상대 공격을 저지했다. 뛰어난 킥으로 동료의 공격 기회를 이끌어 내거나, 오른쪽으로 잠시 이동한 뒤 날리는 얼리 크로스로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제라드의 이런 모습은 2013/2014시즌 리버풀이 다시 한 번 우승 직전까지 갈 때도 발휘됐다. 제라드는 미드필더 중 가장 후방에 배치돼 경기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젋었을 때는 알론소에게 일임했던 임무였다. 제라드의 빠른 판단과 정확한 킥은 리버풀의 공격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고, 루이스 수아레스와 다니엘 스터리지를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우승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던 4월, 첼시전에서 어이 없는 실수로 실점을 헌납해 스스로 기회를 걷어찼다. 13골 13도움을 올리며 팀을 이끌어 온 제라드지만 그 시즌을 대표하는 명장면은 뎀바 바 옆에서 미끄러진 순간이었다. 제라드는 “내 인생 최악의 3개월”이었다고 회고했다.

제라드의 선수 경력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가 전술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제라드는 ‘하고 싶은 것 다 해’라고 말하는 감독 아래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활약할 때 가장 좋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제라드를 풀어놓는 것 역시 전술이다. 울리에 감독은 적절한 전술을 찾지 못했다. 제라드는 울리에와 함께한 5시즌 반 동안 28골 득점에 그쳤지만, 베니테스 아래서는 6시즌 동안 104골을 몰아쳤다.

나이를 먹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가 좀 더 후방에서 안정적인 플레이에 집중하는 것도 흔히 발견되는 생존법이다. 제라드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폴 스콜스도 그랬고, 지금 이탈리아에서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모든 걸 갖춘 미드필더’가 ‘모든 것’을 동시에 발휘하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제라드에게도 그랬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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