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마리우

[풋볼리스트] 축구는 365일, 1주일 내내, 24시간 돌아간다. 축구공이 구르는데 요일이며 계절이 무슨 상관이랴. 그리하여 풋볼리스트는 주말에도 독자들에게 기획기사를 보내기로 했다. Saturday와 Sunday에도 축구로 거듭나시기를. 그게 바로 '풋볼리스트S'의 모토다. <편집자 주> 

축구장도 뜨겁고, 유세장도 뜨겁다. 장미 대선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라운드 위에서 뛰는 선수들도 선거권을 지니고 있고, 피선거권을 지녔다.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실제로 선거에 뛰어들기도 했다. 경기하는 방식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도전한 선수들이 존재한다. ‘풋볼리스트’는 좌와 우 그리고 제3지대에서 목소리를 낸 선수를 찾았다. 

좌파의 의미는 진보적이거나 복지를 우선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을 뜻한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개최된 국민의회의 좌석 배치에서 유래됐다. 왼쪽에 앉은 이들의 성향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자는 주장을 했다. 축구에서 우스개 말로 왼쪽 발을 주족으로 쓰거나, 주로 왼쪽에서 뛰는 선수들을 지칭할 때도 있지만,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다.

하지만 그라운드를 떠나 정말 좌파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 이들도 있다. 선수 혹은 지도자 시절 얻은 명성과 인기를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정치적 신념의 정당성을 역설한 이들이다. 유니폼을 벗고 양복을 입고 국가의 미래를 논하고 있다.

기호 1번 : 호마리우 : 좌파를 좌파답게!  공정한 브라질! 
호마리우는 브라질 축구의 전설이다. 1985년 바스쿠 다 가마에서 데뷔해 바로 유럽으로 무대를 옮겼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활약한 아인트호번에서는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득점왕 역시 그의 몫이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었는데,  첫 시즌 33경기 30득점의 기록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다시 브라질로 돌아갔다. 플라멩구, 바스쿠 다 가마, 플루미넨시 등에서 활약했다. 끊임없는 열정은 마이애미, 애들레이드유나이티드 등 미국 메이저리그사커에서도 불혹이 넘은 나이까지 활약하는 원동력이 됐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고, FIFA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했다. 그야말로 ‘월드 스타’다. 적어도 브라질에서는 ‘축구 대통령’이나 다름 없었던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은퇴 1년 만인 2010년 브라질 사회당에 입당해 리우데자네이루 지역구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당히 당선됐다. 당시 득표율은 63.4%로 당시 선거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하원의원 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특히 브라질의 월드컵 개최를 반대했고, 제프 블라터 전 화장의 부패를 주장했다. 2018년 월드컵이 러시아로 확정되자 “잉글랜드가 도둑맞았다”는 등 의견을 냈다. 2014년에는 상원의원에 도전했고 역시 당선됐다. 

기호 2번 : 그르제고르슈 라토 - 당당한 좌파! 세탁기에 넣고 돌립시다!
그르제고르슈 라토는 폴란드 축구선수 중 최초로 센츄리클럽(100경기출전)에 이름을 올린 전설이다. 1966년 스탈 마엘레츠에서 데뷔해 14년간 활약했다. 윙어로 활동한 그는 두 차례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74년과 1977년에는 폴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됐다. 1980년에는 벨기에로 무대를 옮겼다. KSC로케런에서 두 시즌간 활약하며 벨기에 올해의 축구선수로 선정됐다. 이후 멕시코의 아틀란테에서는 북중미카리브축구연맹(COCNACAF)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견인했고, 1991년 캐나다의 폴로니아 해밀턴에서 은퇴했다. 선수 생활은 여러 나라를 거쳤지만 은퇴 후 그는 조국 폴란드를 위해 헌신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민주좌익연합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거쳤고, 2008년에는 폴란드 축구협회장에 선출되며 다시 축구계로 돌아왔다 

기호 3번 : 소크라테스 – 정치적 탄압을 받은 축구인, 누구입니까! 좌파가 이깁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브라질 축구의 전설이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보타포고, 코린치안스, 플라맹구, 산토스 등 굵직한 팀을 거쳤다. A매치에서는 60경기에 출전해 22득점을 기록했다. 1982년과 1986년 두 차례 월드컵에 출전했다. 우승 경험은 없다. 현역 시절 지코, 팔카우, 세레조와 함께 브라질의 ‘황금 4중주’의 일원이었다. 현역 시절 ‘괴짜’라는 평가를 받았다. 술과 담배를 즐겼고, 은퇴 후에는 의대에 진학해 의사 자격증을 땄다. 덕분에 ‘소크라테스 박사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코린치안스에서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 군부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결성한 정치 운동 ‘코린치안스 민주화 운동’을 공동 창당했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팀 동료들, 팬들이 함께했다. 1984년에는 대통령 국민 직선제를 주장하는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2백만명 앞에서 연설을 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이탈리아의 피오렌티나에서 활약했는데,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한 해외 이적이었다. 한 시즌 만에 브라질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 정권의 몰락 덕분이었다. 어린 시절 영웅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그리고 존 레넌이다. 지난 2011년 작고했다.

기호 4번 : 올레게르 프레사스 – 새로운 카탈루냐! 독립을 요구합니다! 
올레게르 프레사스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바르셀로나에 몸담은 중앙 수비수다.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 라리가 우승 등을 다양하게 경험했다. 워낙 팀에 쟁쟁한 스타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좌파 성향은 확실히 각인시켰다. 바르셀로나의 연고지, 카탈루냐의 독립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대표적 인물이다. 카탈루냐의 독립 뿐만 아니라 축구 자체에 대한 시각도 특별했다. 그는 현역 시절 “너무 많은 돈과 권력이 축구를 좌지우지한다. 돈을 벌기 위해 경기 일정이 만들어지고, 상업적 이익과 TV 광고가 우선시된다”며 축구 구단들의 과도한 상업화를 비판했다. 현역 시절은 물론 은퇴 후 저서를 다수 집필하고, 카탈루냐 지역지에 기고를 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포함될 수 있었지만 그는 카탈루냐 대표팀을 선택했다. 정치적 발언 및 성향 때문에 축구화 후원이 끊긴 경험도 있다. 

기호 5번 : 지안니 리베라 - 선수 노조, 제가 대표였습니다! 정의로운 좌파!
지안니 리베라는 알레산드리아 칼초 라는 이름의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9년 열 다섯의 나이에 인터밀란과 프로 데뷔전을 가졌고, 결국 열 여섯의 나이에 AC밀란으로 이적했다. 무려 20시즌 동안 활약하며 658경기 출전, 164득점을 기록했다. 세리에 우승은 물론 유러피언 컵 우승 2회 등 굵직한 경험을 했다. 1969년 이탈리아 클럽 소속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60경기에 출전해 14득점을 기록했다. 선수 시절부터 리베라의 의식은 꺠??있었다. 선수 노조의 대표로 활동하며 선수들의 권리를 찾는데 앞장섰다. 은퇴 후 AC밀란에서 부회장으로 일곱 시즌 동안 재직했다. 하지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한 후 사임했다. 이후 정치계에 입문했다. 이탈라아 기독민주당에 입당해 1987년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4선을 했다. 2001년 로마노 프로디 정부에서는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미 축구인의 향기 보다 정치인으로 더욱 강한 족적을 남기게 된 그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는 이탈리아를 대표해 유럽의회에 입성해 청소년 교육 부분 부의장을 역임했다. 2013년에는 연어처럼 축구계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았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호마리우 홈페이지

관련기사

저작권자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