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선수는 성장하고 진화한다. 한결 같은 패턴으로 경기하는 이도 있지만, 주어진 상황이나 포지션에 따라 경기 방식을 바꾸는 이도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프란체스코 토티 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풋볼리스트'는 진화하고 변화한 선수 이야기를 모았다.

필립 람이 측면 수비수를 떠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며 보여준 완벽한 플레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함께 깨달음을 안겨줬다. 수준 높은 축구를 하려면 신체와 기술보다 두뇌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람이 늘 월드클래스로 인정받은 것도 그의 두뇌에 탑재된 축구 매뉴얼이었다.

2002년에 프로 데뷔, 2003년부터 본격적인 주전 생활을 시작한 람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예정이다. 완벽한 풀백으로서 20대를 보낸 람은 30대로 접어든 뒤 주젭 과르디올라 감독을 만나 축구의 진수를 보여줬다.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내내 영광스러웠던, 행복한 선수 시절이다. 지난 19일(한국시간) 마지막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치른 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포지션과 스타일에 따라 돌아본다.

 

1기 : 월드클래스로 데뷔한 오른발잡이 레프트백(2003~ )

바이에른뮌헨 유소년팀에서 성장한 람은 독일 청소년 대표였던 2003년 슈투트가르트로 전격 임대된다. 임대 기간은 통상보다 긴 2년이었다. 슈투트가르트를 독일분데스리가 2위로 이끌며 화제를 모은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 젊은 선수 위주로 선수단을 리빌딩하며 람을 끌어들였다.

람은 원래 라이트백이었으나 마가트에 의해 레프트백으로 위치를 바꿨다. 당시만 해도 람과 비슷한 수준의 유망주로 평가됐던 안드레아스 힌켈이 라이트백으로 뛰고 있었다. 람은 국가대표 출신 베테랑 하이코 거버를 밀어내고 왼쪽을 차지했다. 왼쪽에서 뛴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영리한 람은 완벽하게 적응해냈다.

오른발잡이지만 레프트백 위치에서 뛰어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판단력이었다. 람은 오버래핑할 타이밍을 정확히 파악했다. 상대 수비와 무리한 싸움을 벌이지 않고 가벼운 볼 컨트롤로 틈을 만든 뒤 오른발 크로스를 날렸다. 람의 오른발 크로스는 슈투트가르트가 가진 중요한 무기였다. 틈이 생기면 재빨리 상대 문전까지 파고들어 공격수에게 패스를 밀어줬다.

주전으로 자리잡은 첫 시즌부터 분데스리가 최고 레프트백은 람이었다. 람은 2004년 2월 20세 나이로 대표팀에 발탁됐다. ‘유로 2004’에서 독일은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었지만 람은 주전으로 뛰며 10년 뒤 찾아올 월드컵 우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중앙으로 파고들었을 때는 오른발 슛을 날리기 편했다. 득점이 많은 선수는 아니지만 인상적인 득점을 종종 만들어냈다. ‘2006 독일월드컵’ 개막전에서 넣은 대회 첫 골이 그랬다. 측면에서 공을 잡은 뒤 중앙으로 툭툭 치고 나간 람은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렸고, 그리 강하지 않은 듯 보였던 슛은 순식간에 골망을 흔들었다. 독일월드컵은 공인구가 대회의 주인공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대회다. 람은 팀가이스트 특유의 묘한 궤적을 가장 먼저 이용한 선수였다.

2005년 바이에른으로 돌아간 람은 분데스리가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의 풀백으로 인정받고 있던 두 대선배와 재회하게 된다. 프랑스 출신인 비센테 리사라수와 윌리 사뇰이다. 1990년대 레전드인 리사라수는 이미 36세 나이로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고, 28세인 사뇰은 아직 팔팔했다. 자연스럽게 람은 리사라수와 로테이션 멤버로 뛰다, 한 시즌 뒤 리사라수가 은퇴하자 레프트백 주전으로 자리 잡게 된다.

2기 : 오른쪽으로 복귀한 ‘어시스트 머신’(2009~ )

사뇰이 하향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바이에른은 좌우 풀백의 보강을 위해 여러 선수를 수급하지만, 생각만큼 뛰어난 선수를 찾기 힘들었다. 독일 대표 레프트백 마르셀 얀센은 겨우 한 시즌(2007/2008) 만에 떠났다. 오른쪽을 크리스티안 렐처럼 실력이 부족하거나, 마시모 오도처럼 이미 하향세에 접어든 선수가 맡는 풀백 암흑기가 이어졌다. 2009년 유프 하인케스 감독이 부임한 뒤엔 원래 센터백인 루시우를 오른쪽에 배치할 정도였다.

2009/2010시즌부터 람은 문제가 심각한 오른쪽 풀백으로 포지션을 옮긴다. 어렸을 때 더 많은 경험을 쌓았고, 더 자연스럽게 크로스를 올릴 수 있는 위치를 되찾은 시기다. 왼쪽 수비는 다니엘 프라니치, 에드손 브라프하이트, 디에고 콘텐토 등이 돌아가며 맡았다. 시즌 중 1군으로 승격한 유소년팀 출신 다비드 알라바는 아직 주전이 될 만한 경험이 없었다.

오른쪽으로 돌아간 람의 플레이스타일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더 자연스럽게 사이드라인을 타고 질주하며 오버래핑했고, 오른발로 빠르게 크로스를 올렸다. 평범한 풀백의 플레이가 가능해졌다.

라이트백으로 돌아간 람의 표면적인 변화는 어시스트의 숫자다. 앞서 시즌당 1~3개 정도에 불과했던 람의 도움은 라이트백에서 더 자주 크로스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분데스리가에서만 2009/2010시즌에 8개, 2012/2013시즌에 11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람의 장점 중 하나는 경기장을 흘끗 보고 각 선수의 위치를 동시에 파악하는 능력이다. 람은 킥력이 그리 좋은 선수가 아니다. 빠르고 날카롭게 휘어지는 크로스는 람의 특기가 아니었다. 대신 람은 느리고 완만한 크로스라도 노마크 상태에서 받아 넣을 수 있는 동료를 기막히게 찾아냈다. 문전을 흘끗 본 뒤 날리는 크로스는 상대 수비의 빈틈을 찔렀다.

2011/2012시즌 수준급 라이트백 하피냐가 영입되며 람은 다시 레프트백으로 이동했고, 다음 시즌 알라바가 1군 레프트백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자 람의 위치는 오른쪽으로 또 바뀌었다. 람의 위치가 바뀌면 요아힘 뢰브 독일 대표팀 감독이 재빨리 반응했다. 선수가 소속팀에서 뛰는 포지션을 최대한 유지해주는 것이 뢰브 감독의 기조였다. 이에 따라 독일은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람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레프트백에는 제롬 보아텡을 기용했다. ‘유로 2012’에서 람을 왼쪽으로 옮겼고, 이에따라 보아텡이 라이트백을 맡았다.

람은 출장 시간 측면에서도 팀 기여도가 엄청난 선수였다. 2009/2010시즌과 2010/2011시즌엔 분데스리가 전 경기에서 풀타임을 소화했다. 역사적인 3관왕을 차지한 2012/2013시즌, 람은 비교적 많은 결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드플레이어 중 가장 많은 4,019분(3개 대회 통산)을 소화했다. 경기 중 기복도 적기 때문에 꾸준하게 적절한 패스와 크로스가 동료들에게 제공됐다. 람은 바이에른과 독일의 전통적인 주장들처럼 투지의 화신도, 눈에 띄는 존재감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대신 꾸준한 플레이 자체가 리더십이었다.

 

3기 : 과르디올라의 뇌 구조를 이해하는 미드필더(2013~ )

3관왕을 달성하기 전부터 하인케스 감독의 은퇴가 예정돼 있던 바이에른은 차기 감독으로 주젭 과르디올라를 선임해 둔 상태였다. 첫 프로 팀인 바르셀로나를 엄청난 성공으로 이끈 뒤 1년간 휴식을 취한 과르디올라는 바이에른에서도 부임 초기 연전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부상자가 많았고, 특히 중앙 미드필더가 심각한 문제를 겪기 시작했다.

과르디올라의 가장 큰 과제는 바르셀로나에서 ‘4번’이라고 불린 ‘피보테’의 적임자를 찾는 일이었다. 과르디올라식 공격 전개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는 지능적인 선수가 맡아야 한다.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2군 선수였던 세르히오 부스케츠를 주전으로 발탁한 이유 역시 이 포지션에 맞는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바이에른에는 토니 크로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이 있었지만 이 위치에 대한 적응도가 떨어졌다.

미드필더들의 줄부상으로 람이 중앙에 배치되긴 했지만 처음엔 크로스가 빌드업의 중심을 맡는 가운데 람의 역할은 옆에서 거드는 정도였다. 그런데 두 선수의 역할을 바꾸자 경기가 더 잘 풀렸다. 람이 ‘피보테’를 맡고, 크로스가 비교적 부담이 없는 위치에서 공수를 오가는 것이 나은 조합이었다. 이때부터 람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분신이 됐다. 170cm에 불과한 선수를, 그것도 나이 서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신시키는 건 독일 사람들에게 상상하기 힘든 조치였다.

람은 엄청난 경기력으로 보는 사람들을 경악에 빠트렸다. 미드필더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능이라는 걸 람만큼 선명하게 입증한 선수도 드물었다. 공수 양면에서 빈틈이 없었다. 특히 빌드업의 중심 역할을 람이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지켜본 사람들은 ‘패스 능력’이 그저 정확한 킥이 아니라 지능적인 플레이를 뜻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람은 온몸으로 가르치는 축구 선생님이었다.

놀라운 포지션 변환은 경험, 재능,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람은 유소년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미드필더에게 가장 필요한 상황 파악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에이전트 등 측근들에 따르면, 그라운드에 존재하는 동료와 상대 선수들의 위치를 순식간에 감지해내는 것이 람의 재능이었다. 차비 에르난데스도 비슷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스피드와 기술이 압도적이지 않은 람은 사실 풀백 시절에도 이 지능을 바탕으로 월드클래스가 된 선수였다. 중앙에선 람의 초감각이 더 적극적으로 발휘될 수 있었다.

람은 사비 알론소나 안드레아 피를로처럼 놀라운 롱 패스로 직접 골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상대 미드필더를 교묘하게 유인해 공수 간격을 벌린 뒤 빌드업을 시작하므로써 잠시 후 토마스 뮐러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미리 만들어줬다. 프랑크 리베리와 아르연 로번이 상대 풀백과 일대일 대결을 할 수 있도록 좋은 타이밍에 공격 방향을 전환했다. 과르디올라가 "이제까지 지휘한 선수 중 가장 영리하다"고 말할 만한 플레이였다.

4기 : ‘중앙형 풀백’도, ‘측면형 중앙 미드필더’도 만능(2014~ )

2014년 여름 전문 피보테인 사비 알론소가 합류했고, 람은 다시 조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수비형 미드필더를 경험한 람의 플레이는 과르디올라 감독의 변칙적인 전술과 만나 계속 미묘한 상태로 이어졌다. 풀백으로 출장했는데 중앙에서 뛰는가하면, 미드필더로 출장한 줄 알았는데 측면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풀백을 측면으로 오버래핑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비형 미드필더 옆으로 이동시키는 전술 운영을 즐긴다. 일명 ‘중앙형 풀백’이다. 람은 이 전술을 가장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측면을 따라 오버래핑하는 것이 아니라 알론소 옆으로 이동해 빌드업의 기점을 하나 늘림으로써 패스 경로를 더 많이 열어주는 역할이었다.

풀백이 중앙으로 좁혀가며 활동하는 건 정상급 선수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되는 경기 방식이다. 레알마드리드의 마르셀루도 플레이메이커나 다름없는 활동 반경을 보일 때가 잦다. 람은 이 역할을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하며 현대 풀백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공했다.

또는 전문 윙어가 없거나 전문 풀백이 없는 경기에서 측면 공격에 힘을 더해주는 역할도 했다. 특히 토마스 뮐러가 오른쪽 윙어로 배치된 날은 명목상 중앙 미드필더인 람이 오른쪽으로 자주 이동했다. 람의 유연성은 동료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제공했다.

어렸을 때 포지션인 윙어를 맡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람은 이 임무마저 완벽하게 수행했다. '2014/2015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포르투를 6-1로 대파한 날, 부상당한 윙어들 대신 람이 오른쪽 측면을 맡았다. 람이 직접 기록한 어시스트는 하나도 없었지만 역시나 강한 압박과 적절한 크로스로 2골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2014/2015시즌 후반기에 특히 윙 플레이를 많이 했다.

포지션을 가리지 않는 람은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도 뢰브 감독의 만능열쇠였다. 대회 초반에는 바이에른에서 맡은 역할대로 수비형 미드필더였지만, 대회 중반 라이트백으로 이동했다. 주장으로서 독일을 월드컵 정상으로 이끈 뒤 영광스럽게 은퇴했다. 독일은 이때 이후 아직까지도 람의 완벽한 대체자를 찾지 못했다.

대체자를 찾는 건 바이에른에도 똑같이 던져진 대형 과제다. 람의 후보로 무난한 활약을 해 온 하피냐 역시 32세로 노장 반열에 든 선수다. 조슈아 키미히, 다음 시즌에 합류할 제바스티안 루디 모두 독일 대표팀에서 람의 대체자로 시험 기용된 선수들이지만 람만큼 안정적인 활약을 하진 못했다. 람은 34세가 됐지만 신체 능력은 조금만 하락했고, 지능은 오히려 20대 때보다 더 발전했다. 여전히 세계 최고 기량을 유지한 상태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미국 래퍼들처럼 은퇴를 번복하길 바라는 팬이 많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글= 김정용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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