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전주] 김정용 기자= 이재성은 여전히 K리그 클래식에서 가장 뛰어난 미드필더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 지 오래 됐다. 전북현대에선 김보경같은 플레이를 하느라, 국가대표팀에선 본연의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느라 자신을 잃을 뻔했다. 지금 이재성은 이재성답게 축구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인터뷰는 기분 좋은 경기 이후 진행됐다. 이재성은 17일 포항스틸러스 원정에서 2골을 터뜨려 4-0 대승에 일조했다. 이날의 주인공은 1골 2도움을 올려 K리그 최초 70-70클럽에 가입한 이동국이었다. 대기록을 이끌어낸 숨은 주역이 이재성이었다.

이동국의 프로 70번째 어시스트는 사실 이재성의 패스를 받아 이동국이 찬 슛이었다. 이 공이 한교원에게 살짝 굴절되고 들어가며 이재성은 기록지에서 이름이 빠졌고, 이동국의 도움과 한교원의 골이 기록됐다. 이어 이동국의 헤딩 경합으로 떠오른 공을 낚아채 골을 터뜨리며 이동국의 71호 어시스트도 만들어줬다.

이재성의 시즌 기록은 19경기 6골 6도움이다. 지난 시즌 공격 포인트 14개(3골 11도움)를 여유 있게 넘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시즌 초반 부상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 여름 이적 시장에서 이탈한 김보경(가시와레이솔)의 공백을 이겨내고 전북 미드필드의 중심으로 활약 중이다. 그러나 이재성은 여전히 중심이 될 생각이 없다. 공을 오래 쥐고 다른 선수들을 지휘하는 건 자기 역할이 아니다. 다양한 질문의 대답은 모두 ‘이재성다운 플레이’로 귀결됐다.

 

이재성답게, 전북을 우승으로

이재성은 5월 중순 왼쪽 다리 비골 골절상에서 회복했다. 전북이 지난해 아시아 우승 주역인 김보경과 이재성의 미드필드 조합을 되찾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둘의 호흡은 겨우 한달에 불과했다. 김보경이 6월 말 일본 구단 가시와레이솔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재성에겐 약간 심리적 압박이 생겼다. 지난해 김보경이 화려한 플레이를 담당했다면, 이재성은 철저한 팀 플레이어로서 김보경의 부담을 공수 양면에서 덜어주는 선수였다. 올해 전북 미드필드엔 이재성 이상 가는 테크니션이 없다.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이승기는 주로 윙어로 기용되는 중이다. 이재성은 다른 선수에게 맞추기보다 다른 선수들을 지휘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기 시작했다.“훈련장에서도 경기장에서도, 보경이 형 역할을 하려고 시도해 봤어요. 그런데 잘 안 되더라고요. 제가 원래 스타일로 플레이하는게 팀에 더 보탬이 된다는 걸 알았어요. 감독님도 더 빠른 템포로 패스해주길 바라시더라고요. 미드필드 지역이나 후방에서 쓸데없이 오래 공을 잡고 있는 성향은 줄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공을 오래 잡고 있을 때 빛나는 선수도 있지만, 이재성은 아니다. 이재성은 간결한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 진영으로 직접 들어갈 때 가장 빛난다. 이재성 특유의 빠른 패스 타이밍, 성실하게 공을 받으러 다니며 수비를 교란하는 움직임이 전북엔 더 필요했다. 이재성이 ‘김보경 흉내’를 내면 상대 수비가 진형을 갖출 때까지 시간을 주는 역효과만 났다. 이재성은 그동안 경기력에 기복이 있었다는 걸 인정했고, 앞으로 본인이 가장 잘 하는 플레이로 돌아갈 거라고 선언했다.

“포항전은 간결한 플레이를 많이 신경 쓰면서 뛰었어요. 최근 경기에서 전북다운 빠른 템포가 안 나왔는데, 거기서 벗어나려면 제가 달라져야 했어요. 앞으로도 보경이 형 역할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기존 플레이를 하려고 노력하려고 해요. 포항전에선 간결한 플레이, 문전 침투와 압박을 많이 신경 썼어요. 그래서 골을 넣을 수 있었죠. 체력적으론 좀 힘들지만 저답게 해야 팀에 도움이 되고 저도 빛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재성답게, 유럽 진출에 대한 조급증은 없다

이재성은 올해 초부터 유럽 진출 가능성이 가장 높은 K리거로 꼽혔다. 유럽 진출 의지에 대한 인터뷰도 했다. 그러나 겨울 이적시장에 이어 유럽 빅리그의 여름 이적시장도 지나가 버렸다.

이재성의 에이전트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잉글랜드 구단들의 본격적인 영입 의지가 취업비자 발급 가능성이 없어 무산된 뒤, 올해 겨울과 여름 이적시장에선 적극적으로 나서는 팀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재성은 빅리그면 어디든 된다는 입장이었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여러 구단이 이재성을 영입 고려 대상으로 올려뒀다. 그러나 원론적인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외국인 쿼터를 소진해가며 이적료를 제시하는 팀은 없었다.

몇 가지 문제가 겹쳤다. 2016년엔 이재성이 대표팀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지만, 이후 울리 슈틸리케 전 감독은 이재성의 기용을 꺼렸다.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우승에도 불구하고 이재성이 화려한 주역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이라이트 영상’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올해는 전북이 징계를 받아 ACL에 불참했다. 해외 스카우트들에게 보여줄 국제 대회 활약상이 없었다. 이재성이 부상 여파에서 회복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이미 늦은 7월이었다.

“이적시장 전부터 유럽 진출을 계획했고, 실제로 추진도 했어요. 그러나 딱히 제대로 된 제안이 없었어요. 저 스스로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계기가 됐어요. 결국 제가 더 나은 능력을 갖춰야 좋은 미래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앞으로도 노력하고 도전할 생각이에요. 거기 얽매일 생각은 없고, 늘 준비하고 있다 보면 다가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눈높이를 낮춘다면 더 일찍 유럽행이 성사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재성은 “좋은 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돈을 더 받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플레이스타일 때문이었다. 이재성은 좋은 동료의 실력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팀 플레이어다. 기술이 좋은 미드필더와 짝을 이룰 수 있다면 유럽에서 더 인정받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아시안게임 우승과 4주 군사훈련으로 이미 병역 의무를 해결한 이재성에겐 시간도 많은 편이다.

“전 혼자 능력으로 경기를 한 순간에 뒤집는 선수도 아니고, 타고난 선수도 아니에요. 팀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게 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동료들과 어우러져 플레이할 때 빛나고, 그런 경기에 익숙해져 있어요. 유럽 팀에서 저 같은 선수를 찾을 때 가야지, 찾지도 않는데 욕심 내서 안 맞는 팀에 가면 상황이 나빠질 수 있어요. 저를 찾는 팀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재성답게, 대표팀에서도 미드필더로서 기여하고 싶다

슈틸리케 감독 말년에 제기되던 국가대표팀의 문제 중 하나는 이재성의 활용법이었다. K리그에서 가장 팀 플레이가 좋은 미드필더 중 하나인 이재성을 미드필더로 써야 한다는 제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월드컵 예선 막판에 지휘봉을 잡은 신태용 감독 역시 이재성을 중용하지 않았다. 신 감독은 슈틸리케 감독 시절의 3인 미드필더 체제 대신 중앙 미드필더가 2명인 포메이션을 주로 시도했다. 이재성은 이란과의 홈 경기에서 오른쪽 미드필더로 출장했다. 슈틸리케 감독 시절과 비슷한 역할이었다. 자신의 장점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후반 27분 교체됐다. 이어진 우즈베키스탄전은 아예 투입되지 않았다.

이재성은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2연전에 대해 “선수들 사이에서도 경기력에 만족하진 못하지만, 일단 제일 중요한 목표를 이뤄내서 안도했다는 분위기였다”고 정리했다. 이란전은 감독 교체 이후 첫 경기인데다 서울 월드컵경기장은 홈인데도 불구하고 잔디 상태가 엉망이었다. 전술적 완성도가 낮은 경기였다. 다들 고전하는 가운데 특히 좌우 미드필더로 배치된 손흥민과 이재성은 공격적인 자세에서 거의 공을 받지 못하고 백패스를 반복해야 했다. 팀 차원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경기였다.

이재성은 앞으로 대표팀에서도 ‘이재성 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대표팀에서도 중앙에서 뛰며 공격, 수비에서 많은 기여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감독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게 있으니 선수라면 거기 맞춰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죠.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가 어떤 스타일인지 감독님께 말씀 드릴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떤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뭘 보여드릴 수 있는지.”

신 감독이 부임 직후 두 경기를 통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재성은 러시아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여름까지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란전과 우즈벡전은 신 감독이 원하는 축구를 하기에 시간이 짧았고, 그래서 전술적으로 여러 가지를 자제한 경기들이었다. 팀을 만드는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슈틸리케 감독 말년의 불안했던 팀 분위기는 신 감독 특유의 유쾌한 태도, 훈련장에서의 높은 집중력, 이동국 등 고참 선수들의 발탁으로 빠르게 개선했다. 이재성은 월드컵까지 상승세를 탈 신태용호를 기대하고 있다.

“월드컵은 모든 선수에게 꿈이죠. 지금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클래스 있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래야 K리그와 대표팀에서 더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으니까. 다가오는 10월 A매치는 해외파 위주로 소집된다고 했으니 11월, 12월 일정 때 대표팀에 들어가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에필로그 : 쓰지 못하는 돈 만 원

클럽하우스 라커룸의 이재성 자리엔 돈 만 원이 몇 달째 꽂혀 있다. 다른 선수들의 자리에 꽂혀 있는 돈은 가벼운 내기 때문에 오가는 돈이지만 이재성의 만 원은 특별하다. ‘주영 이모 왔다 간다. 화이팅, 힘 내’라는 문구 때문이다.

만 원을 준 주인공은 이재성의 대표적인 팬이자 ‘전북현대 후원의 집’ 중 한 곳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다. 올해 초 후원의 집 대표들을 초청한 클럽하우스 투어를 통해 라커룸을 방문한 ‘주영 이모’는 이재성에게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고, 마침 수중에 있던 지폐에 메시지를 적어 자리에 꽂아 뒀다. 만 원을 먼저 발견한 김보경이 사진을 찍어 이재성에게 보내줬다. 그 뒤로 이재성은 이 돈을 건드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남겨 뒀다. 이재성은 휴일에 이 팬의 직장을 깜짝 방문해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일본 원정 경기를 찾아가던 이 팬과 이재성의 가족이 길에서 만나 여정을 함께 한 기억도 있다. 지폐에 적힌 문구대로, 이재성의 자리는 유독 정리가 잘 되어 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닌 건 만 원짜리 한 장 뿐이다.

사진= 김완주 인턴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