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축구는 깊다. 격렬함 속에는 치열한 고뇌가 숨어 있다. 보이지 않는 축구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다리가 필요하다. ‘풋볼리스트’가 축구에 지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마련했다. 금요일마다 축구를 둘러싼 깊고, 다양한 이야기를 준비한다. <편집자주>

 

이창민(제주유나이티드)은 20여년 전의 윤정환(현 세레소오사카 감독), 고종수(현 수원삼성 코치)처럼 타고난 플레이메이커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K리그에서 가장 순수한 공격형 미드필더는 이창민이다. 공격과 미드필드 사이에 혼자 배치되는 선수는 이창민뿐이고, 이 역할을 완벽하게 하는 선수도 이창민뿐이다.

이창민의 패스 센스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았던 기라성같은 선배들에 비해 평범해보일지도 모른다. 대신 더 다재다능하고, 더 헌신적인 팀 플레이 능력이 있다. 이창민은 ‘2017년형 플레이메이커’의 조건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이창민이 참고하는 선수는 레알마드리드의 이스코다. 두 선수는 각각 한국 최고와 유럽 최고 무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어난 활약을 한다. 현대 축구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어떤 선수여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순수한 공격형 미드필더, 모든 득점에 관여하는 이창민

제주는 최근 3-4-1-2 포메이션을 쓴다. 4개의 라인 중 2선을 이창민 혼자 책임진다. 최근엔 잘 쓰이지 않는 포진이다. 이창민도 시즌 초반에는 이 위치가 아니었다. 원래 투톱 아래는 마르셀로의 자리였다. 마르셀로가 지난 6월 일본 오미야아르디자로 이적하자 이창민이 이 위치를 이어받았다. 마르셀로 이적 직후, 이창민은 햄스트링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해 있었다. 제주는 이창민 없는 경기에서 2무 1패로 부진했다. 이창민이 선발로 돌아온 뒤 제주는 선두 전북현대를 잡아내며 빠르게 상승세를 탔고, 5경기에서 4승 1패를 올렸다.

이창민의 영향력을 확인하려면 공격 포인트로는 부족하다. 이창민은 마르셀로 이탈 이후 311분을 소화했고,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이창민이 대단한 건 자신이 그라운드에 있는 동안 터진 나머지 5골에도 모두 관여했다는 것이다. 이창민의 슛이 골대에 맞고 나온 걸 동료가 마무리한 상황 1회, 어시스트 바로 전 패스 1회, 이창민의 스루 패스가 페널티킥을 만든 경우 1회, 이창민의 패스가 프리킥을 만들어 골로 이어진 경우 1회, 득점으로 이어진 패스 전개에 참여한 경우 1회가 있었다. 이창민이 뛰는 한, 제주의 골 하이라이트에서 그가 빠지는 경우는 없다.

이창민의 역량에 대해 조성환 제주 감독은 “K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창민은 미드필더로서 토털 패키지다. 양발을 다 잘 쓰고, 공격형부터 수비형까지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 속공 상황에서 직접 드리블로 경기장 절반을 가로질러 공을 운반할 줄 안다. 상대 선수 여러 명 사이에서 공을 지키고 빠져나가는 장면도 곧잘 나온다. 공을 받을 때 위치 선정도 좋고, 동료의 동선도 잘 읽는 편이다. 양발로 모두 스루 패스와 중거리 슛이 가능하다. 자신감이 떨어졌을 때 이창민의 이런 다재다능함은 어정쩡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올해는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 이창민은 "자신감이 올라와서 플레이가 좋아졌다"고 말한다.

제주는 윙어가 없다. 이창민은 공격이 전개되는 방향으로 이동해 측면 공격의 짐도 진다. 2일 대구FC전에서 진성욱의 골을 이끌어낸 중거리슛의 경우, 슛에 앞선 과정도 이창민이 맡았다. 이창민은 오른쪽 측면에서 공격을 전개하다가 득점 기회가 안 생기자 드리블과 패스를 섞어가며 직접 공을 왼쪽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다시 패스를 받아 중거리슛을 날렸다. 이 공이 크로스바에 맞고 나온 걸 진성욱이 마무리했다.

제주가 공격할 때 이창민의 활동 영역은 2선 전체다. 이창민은 후방까지 내려가 패스를 받는 대신 2선에 의식적으로 머무른다. 윤빛가람, 권순형 등 동료 미드필더들의 배급 능력을 믿고 좀 더 앞에서 공을 받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과거 전설적인 플레이메이커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창민이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은 결정력이다. 조 감독은 “이창민의 슛 강도는 K리그에서 최고를 다툴 것”이라고 본다. 이번 시즌 자신감이 붙으면서 타이밍이 빨라지고, 정확도가 향상됐다. 그러나 상대 골키퍼에게 아슬아슬하게 걸리고 골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재까지 공격 포인트가 18경기 2골 3도움에 불과하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선 741분 만에 3골 1도움을 기록하며 준수한 득점 생산력을 보였지만 리그에선 아직 아쉽다.

 

이창민이 합류해야 수비 조직이 완성된다

윙어 없이 공격형 미드필더를 한 명 쓰는 4-3-1-2, 3-4-1-2 등은 최근 ‘사양 전술’로 취급되곤 했다. 이 전형이 유행하던 시절은 1990년대 말이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는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의 보좌를 받았고, 앞에는 투톱이 있어 패스 선택지가 많았다. 유벤투스 시절 지네딘 지단, AS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 2000년대 AC밀란의 카카 등이 이탈리아에서 이 역할을 아름답게 소화해 냈다. 이탈리아어로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라고 부른다. 2000년대 중반 유럽에서 4-3-1-2 전형의 ‘1’로 활약한 후안 로만 리켈메는 ‘현대 축구의 반역자’라고 불렸다. 마지막 반역자 이후 이런 포진은 희귀한 것이 됐다.

수비 문제가 컸다.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면 수비진을 제대로 형성하기 힘들다. 좌우 측면을 모두 빈틈 없이 방어하려면 한 라인에 4명이 필요하다. 네 명씩 두 줄을 세우는 4-4-2, 윙어를 조금 내려 역시 네 명씩 두 줄을 만들기 쉬운 4-2-3-1이 현대축구의 기본 포진인 이유 중 하나다. 스리백의 경우 3-5-2가 먼저 유행했다. 4-4-2와는 수비진 모양이 다르지만 역시 8명으로 수비라인을 형성할 수 있다. 3-4-3이나 3-4-2-1의 경우 공격진이 수비에 가담해 8~9명으로 수비망을 친다.

트레콰르티스타 한 명과 투톱이 모두 수비를 소홀히 하는 팀은 수비진 숫자가 7명에 불과하다. 제주 역시 이창민이 수비에 가담하지 않을 경우 7명으로 수비를 해야 할 위험이 생긴다. 두 윙백이 스리백 옆으로 후퇴해 파이브백을 형성하면, 그 앞을 지키는 미드필더가 두 명만 남는다. 지나치게 적은 숫자다. 상대는 제주의 2선과 3선 사이를 자유롭게 공략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이창민의 역할이 중요해 진다. 이창민은 수비형 미드필더 출신답게 뒤로 자주 후퇴해 윤빛가람, 권순형 등과 같은 라인에서 수비를 한다. 제주는 3-5-2처럼 수비할 수 있게 된다. 이창민과 조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면, 기본적으로는 두 수비형 미드필더가 옆으로 벌리고 이창민이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수비가 시작될 때 이창민이 측면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땐 이창민이 미드필드 저지선 중 왼쪽이나 오른쪽을 맡기도 한다. 조 감독은 “기본 원칙은 정해주지만, 경기 상황에 따른 순간적인 변화를 벤치에서 다 지시할 순 없다. 그건 창민이를 비롯한 선수들의 판단과 호흡에 맡긴다”고 말했다. 제주는 오른쪽 윙백 안현범을 자주 끌어올리기 때문에 수비 대형이 4-4-2와 똑같은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이창민의 활동량은 전방 압박을 할 때도 큰 힘을 발휘한다. 상대가 후방에서 공격을 시작할 때 직접 달려들어 공을 빼앗는 것은 물론, 상대 미드필더가 신경 쓰이는 위치에서 은근히 견제하며 동료의 인터셉트를 돕는 경우도 많다. 이창민은 “매 경기 많이 뛰자고 다짐하고 경기에 나간다. 상대 수비에게 압박해서 공을 빼앗는 게 재미있다. 희열도 느낀다. 한두 개 성공하다보니까 계속 하게 된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 레벨에서 보여준 이스코의 수비 가담

이창민은 공격과 수비를 겸비했고, 공을 직접 몰고 다닐 수 있는 현대적인 선수다. 원래 참고하는 선수는 루카 모드리치(레알마드리드)였다. 모드리치만한 실력을 갖추려면 갈 길이 멀지만, 플레이스타일은 비슷했다. 그러다가 더 전방에 배치된 지금은 같은 팀의 이스코를 참고하고 있다.

이스코 역시 세계 최고 레벨에서 드물게 ‘1’을 소화하는 선수다. 지난 2016/2017시즌,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8강 진출팀 중 공격형 미드필더 1명을 쓰는 팀은 레알뿐이었다. 레알도 시즌 초반에는 4-3-3에 가까운 전형을 쓰다가 8강 2차전부터 이스코를 중용하며 4-3-1-2로 전형을 바꿨다. 지단은 현역 시절 세계 최고의 트레콰르티스타 중 하나였던 선수답게 레알에서도 자신의 후계자를 만들어냈다. 이스코는 지단의 요구를 능수능란하게 수행하며 우승에 일조했다.

수비 가담은 레알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스코는 유망주 시절 마음껏 공격에서 활개치는 선수였다. 그러다 레알 이적 이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아래서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하라는 요구를 받고 수비 전술에 대한 의식을 키웠다.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수비 가담을 열심히 연습한 이스코는 전보다 더 전술적으로 기민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이스코가 수비할 때의 역할은 이창민과 비슷하다. 레알은 수비 상황에서 네 명씩 두 줄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코는 3명의 미드필더와 합세해 4명으로 된 일자 라인을 이룬다. 주요 활동 영역이 왼쪽이기 때문에 이스코가 왼쪽 미드필더로 가고 나머지 세 명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고정된 틀은 없었다. 경기 상황에 따라 이스코가 가운데 끼고 다른 미드필더들이 조금씩 벌려 서기도 했다. 이스코가 더 후방에 있으면 모드리치나 토니 크로스가 더 전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빛나기 위해 필요한 것, 수비력

수치로 환산되지 않아 그리 돋보이지 못했지만, 이창민은 6월 이후 K리그에서 가장 순수한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 감독은 “창민이의 지금 위치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후방에서 경기를 넓게 보고 조율하는 역할도 잘 하는 선수다”라고 말했다.

거꾸로 말하면, 공격형 미드필더로 살아남고 싶은 선수는 수비 역량까지 갖춰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창민, 이스코처럼 후방에서 단련된 수비 전술과 풍부한 활동량을 겸비한 선수가 ‘1’을 맡는다. 그러지 않으면 팀의 균형이 붕괴된다. 토티처럼 공격수에 가까운 트레콰르티스타, 리켈메처럼 자기 할 일만 하는 플레이메이커의 시대는 지났다.

이창민과 이스코가 수비에 헌신하는 만큼, 다른 미드필더들은 경기 운영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제주는 윤빛가람과 권순형, 레알은 크로스와 모드리치가 있다. 각자 무대에서 최고 수준의 경기 운영 능력을 갖춘 동료들이다. 공격형 미드필더는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고 팀의 부품으로 뛰어도 된다. 포진은 과거와 비슷하지만, 선수의 역할은 더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바뀌었다.

사진= 제주유나이티드 제공, 게티이미지 코리아

관련기사

저작권자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