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톈진(중국)] 김정용 기자= 시스템은 개인보다 강하다. 중국으로 간 축구 선수들은 연봉 수십억 원을 버는 ‘고연봉 전문직’이지만 ‘당의 명령’ 앞에서는 무기력한 신세다. 권경원(25, 톈진췐젠)도 그랬다.

올해 1월, 중국축구협회는 중국슈퍼리그의 외국인 규정을 갑자기 바꿨다. 매 경기 엔트리의 외국인 선수가 기존 5명에서 3명으로 대폭 축소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뜻으로 알려졌다. 외국인 선수 중에서도 ‘4옵션’ 혹은 ‘5옵션’이었던 한국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센터백 대부분이 중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대표팀에도 문제였다.

시즌 초 완전히 밀렸던 한국 수비수들은 실력으로 점차 입지를 회복해갔다. 권경원, 황석호(톈진테다), 김주영(허베이화샤), 홍정호(장쑤쑤닝) 등이 일제히 리그 경기에 출장했다. 고난의 시간 동안 ‘돈만 보고 중국으로 가더니 꼴 좋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던 선수들이 어떤 투쟁을 해 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제도 변화에 휩쓸리고 있는 이들이 어떤 심경인지 궁금해진 ‘풋볼리스트’는 가진 것 없이 시작해 최근 주전으로 복귀한 권경원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권경원은 슈퍼리그의 한국인 선수 중 유일하게 대표 경력이 없다. 그러나 최근 톈진췐젠에서 3경기 연속으로 선발 출장했다. 팀은 3경기에서 단 1실점만 내주고 3연승을 거두며 중상위권인 6위로 도약했다.

권경원은 그동안 스트레스가 심했고, 이제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5월 28일 중국 톈진에 위치한 구단 클럽하우스에서 진행됐다. 권경원이 시즌 세 번째 선발 출장 경기를 마친 이튿날이었다.

#권경원이 말하다, 뛰지 못하는 선수의 심정

권경원은 지난해 12월 톈진췐젠으로 이적했다. 이적하기 전 구단주인 슈유후이 췐젠그룹 회장과 직접 영상통화까지 했다. 그런데 뒤이어 세계적 스타 악셀 비첼과 알레산드리 파투가 영입됐다. 스스로 느끼는 팀내 입지는 “외국인과 중국 선수 사이” 정도였다. 파투처럼 특급 대우를 받지는 못하지만, 중국 선수 이상의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처음엔 자신에 차 있었다. 전지훈련에서 자기 능력을 다 보여줬으니 외국인 선발 쿼터가 단 3명으로 줄어들었더라도 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경기부터 벽에 부딪쳤다.

“내 몸 상태가 제일 좋다”고 자신한 권경원은 내심 첫 경기부터 선발 출장을 기대했지만 엔트리에 이름은 없었다. 톈진췐젠은 선수들을 다 모아놓고 라인업을 발표한다. 보통 경기 당일 아침에, 화이트보드 뒷면에 명단을 붙여 놓았다가 180도 홱 돌려서 한 번에 보여준다. 마치 TV 프로그램 같은 쇼맨십이다. 선수들은 재빨리 선발 11명, 그것도 아니면 교체 7명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기 위해 눈으로 명단을 훑는다. 권경원은 처음 세 경기 정도 기대를 품은 채 명단을 훑다가 3경기가 지난 뒤에야 현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아, 내가 뛰기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죠.”

칸나바로 감독은 권경원을 만나면 서툰 영어로 “널 보면 기분이 뭣 같다(when I see you, I feel shit)”고 말했다. 제도 때문에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매 경기를 보는 권경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뜻이었다. 권경원은 “규정 때문이니 미안해하지 마시고, 이기고 오시라”고 대답하면서도 속이 탔다. 다른 팀의 한국인 선배들 중에는 꾸준히 출장하는 선수도 있었다. “윤빛가람 선수나 홍정호 선수 같은 선배들은 그 팀에서 없으면 안되겠더라고요. 저도 우리 팀에서 그런 존재가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지 않았죠. 어떤 선수는 동료 용병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걸 보면 운명인가 싶기도 했어요. 전 뛸 운명이 못 됐던 거죠.”

한때는 화이트보드가 돌아갈 때마다 “쿵쾅쿵쾅 거리는 가슴으로” 선발 라인업을 확인했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위험할 정도로 쌓였던 것이 약 한달 전이었다. 선발 명단에 들기 위해 부상을 감수해가며 치열한 훈련을 했는데, 옆에 있는 브라질 출신 공격수는 ‘난 어차피 선발이니까’라는 듯 적당히 훈련하고도 다음날 경기를 소화했다. 그걸 보고 좌절감이 들었다. “방황을 2주일 정도 했어요. 지금 이게 공평한 상황인가? 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다잡으려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더라고요. 꽤 오래 갔어요. 예전 같으면 훈련할 때 태클했을 상황에서도 그때는 발만 슬쩍 뻗어서 막는 시늉만 했어요. 남들은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운동을 대충 하고 돌아오면 그게 더 짜증이 나고, 침대에 누우면 죄책감이 들고. 악순환의 반복이었죠.”

권경원을 지탱해준 건 친형이었다. 톈진에서 함께 생활하는 형은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였다. 형과 함께 숙소에서 본 ‘더 킹’, ‘미녀와 야수’, ‘겟 아웃’ 등 영화들은 고민을 없애주진 못해도 잠시나마 잊게 해 줬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만나는 김기희, 황석호 등 선배 수비수들이 따뜻한 격려를 해 줄 때면 ‘대표 형들도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내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같은 도시에 사는 황석호는 좋은 삼겹살집을 함께 찾아가고 생활에 대한 팁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초반 9경기 중 주전 센터백의 징계 공백을 틈타 단 1경기만 소화했다. 권경원은 부담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20일 10라운드 경기에서 선발 라인업에 포함된 자기 이름을 발견했다. 외국인 선수 중 부상자도 없었기 때문에 뜻밖이었다. 이후 권경원은 3경기에 연속 출장했고, 팀은 이 기간 동안 6득점 1실점으로 3연승을 거뒀다.

권경원은 자기 때문에 팀 수비가 비약적으로 좋아졌다기보다 밸런스를 위해 자신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스스로에게 냉정한 분석을 내놓았다. “제가 뛰기 시작한 뒤로 실점이 줄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외국인 공격수가 들어가면 수비를 안 하고 공격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대 역습 상황에서 끊어주지도 않고요. 반면 같은 포지션인 중국 선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 열심히 수비에 가담하거든요. 그 덕분에 수비수들 입장에선 위험한 상황을 훨씬 덜 겪게 되죠. 제 덕분이 아니고 팀 상황 때문에 실점이 줄어든 거예요.”

권경원은 앞으로 시즌 끝까지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거라는 섣부른 낙관보다 늘 긴장하는 자세로 시즌을 보내겠다고 했다. “축구라는 게 그렇거든요. 한 번 실점이 늘어나고 팀이 안 풀리기 시작하면 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거 아니에요? 앞으로 더 좋은 선수가 영입된다는 말도 있고.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칸나바로가 가르쳐주는 ‘쉬운 수비’

권경원의 감독인 파비오 칸나바로는 순수한 수비 실력을 인정받아 2006년 발롱도르를 수상한, 수비수 역사를 통틀어도 순위권에 있는 인물이다.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바꾼 지 2년 남짓 지난 권경원으로선 칸나바로를 만나 성장할 자신을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칸나바로 아래서 약 5개월을 보낸 지금, 칸나바로의 세밀하면서도 직관적인 가르침은 권경원에게 배우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 줬다. 초반엔 훈련 일지를 쓰며 꼼꼼히 기록해놓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서 공격수를 막을 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어떤 각도로 서야 하는지 코치가 말해주기 힘들거든요. 한국에서는 그냥 ‘이 정도 거리’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칸나바로는 한 팔을 뻗어서 상대가 닿을락말락한 거리를 유지하고, 어깨 각도를 이 정도로 만들면 된다고 말해줘요. 그렇게 생각하면 거리 유지가 엄청 쉬워지거든요.”

칸나바로는 늘 수비수 편에서 생각하는 감독이다. “이기면 공격수들이 영광을 다 채가고, 지면 수비수들이 책임을 떠안는 것이 축구다. 부당한 일이다”라는 것이 칸나바로의 지론이란다. “골을 먹으면 수비수가 공격수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근데 칸나바로는 그러지 말고 공격수들에게 가운데손가락을 들어서 흔들어주라고 해요. 정말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시범도 보여줬어요. 공격수가 도와주지 않은 게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권경원은 미드필더 출신 왼발잡이라는 희소성이 있는 센터백이다. 후방에서부터 차근차근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는 걸 좋아한다. 반면 칸나바로는 빠르게 상대 수비 배후로 보내는 공이 더 위협적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특히 슈퍼리그에선 어떤 상대를 만나든 웅크리기보다 맞불을 놓아야 한다는 지론이다. “말하는 게 좀 웃겨요. 패스를 정확히 주라고 하지 않고 ‘공은 공격수에게 뻥 차. 그럼 네 임무는 끝이야. 받는 건 걔네들이 알아서 해야지. 그게 공격수 능력인데’라고 하시거든요.” 대신 대인방어, 커버플레이 등 수비수 본연의 임무에 더 집중하는 플레이를 배워나가고 있다.

가르침을 주는 동료는 악셀 비첼도 있다. 권경원은 알아흘리(UAE) 시절에도 에벨톤 히베이루, 아사모아 기안 등 유명한 동료와 뛰어 봤다. 그러나 기안의 생활 습관이 방종에 가까웠던 것에 비하면 비첼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식단 관리를 통해 완벽한 체형을 유지하는 선수다. “전 먹고 싶은 걸 조금씩 먹거든요. 카페에 가면 초코칩 프라푸치노도 먹었고요. 그런데 비첼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샐러드 조금, 경기 전에는 파스타 조금. 그리고 재료의 질도 가려서 좋은 고기, 좋은 야채, 좋은 스프만 먹어요. 단 것도 엄청나게 절제하고요. 커피는 에스프레소만 마시더라고요.” 비첼을 따라 자기관리에 몰두한 권경원은 눈에 띌 정도로 턱선이 날카로워졌다. 체지방은 일생에서 가장 낮은 8%대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권경원은 여전히 성장 중인 자신을 즐기고 있다. 중동과 중국 모두 선수의 성장에 적합하지 않은 리그라는 평가가 있지만, 권경원은 리그를 옮길 때마다 배울 점이 많아서 좋다고 이야기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한국 선수들이 슈퍼리그를 대거 이탈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권경원은 잔류를 기본 방침으로 삼고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다.

사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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