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축구는 365일, 1주일 내내, 24시간 돌아간다. 축구공이 구르는데 요일이며 계절이 무슨 상관이랴. 그리하여 풋볼리스트는 주말에도 독자들에게 기획기사를 보내기로 했다. Saturday와 Sunday에도 축구로 거듭나시기를. 그게 바로 '풋볼리스트S'의 모토다. <편집자 주>

한국대표팀이 북한에서 축구 경기를 치른 것은 1990년 10월 11일 국가대표 간 친선전 이후 27년 만에 처음이다. 북한이 '2018 AFC 여자 아시안컵' 예선전을 유치했고, 한국 여자대표팀이 북한에 속한 B조에 배정되면서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됐다. ‘풋볼리스트’는 뜻 깊은 경기를 기념해 남북 축구의 추억을 시대별로 정리했다. 이영무, 조진호, 최태욱 등 북한 축구와 직접 살을 맞대고 교류한 역대 대표 선수들이 전해온 경험을 생생하게 전한다.

1991년 세계 대회를 위해 결성한 남북 단일팀으로 아시아 챔피언이 됐다. 그때 나는 또래 보다 어렸지만, 그런 생각 없이 자신감이 있었다. 

세계 대회에 나갔고, 좋은 구장에서도 뛰고 영광이었다. 남북 단일팀이 처음 구성되었을 때라, 통일에 대한 염원도 커서 성적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8강, 4강까지 가야 한다는 마음을 남북 모두 갖고 있었다. 

목표대로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8강까지 갔다. 그때 포르투갈에 루이스 피구와 후이 코스타도 있었다. 그 우승멤버와 붙어서 0-1로 졌다. 역시 유럽 선수들의 수준이 한 단계 높더라. 브라질과도 경기했는데, 그때 호베르투 카를로스도 있었다. 5-1로 졌는데, 4-1이 되니까 브라질 선수들이 웃으면서 하더라.  그땐 사실 그 선수가 카를루스인 건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를루스였더라. 비디오 분석도 없던 시절이고, 상대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당시 단일팀에서 남한 선수들이 주로 수비를 구성했고, 공격은 북한 선수들이 많이 포진했다. 북한 선수들은 굉장히 싸움닭이었다. 훈련 중에도 남북 선수들끼리 티격태격한 적이 있을 정도로 격렬했다. 그때 북한 선수들은 이미 국가대표를 하던 선수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남한 선수들보다 수준이 조금 더 높았다. 

세계 대회에 나가서 득점은 못했지만 어시스트는 기록했다. 공격진에는 최철이나 조인철 등 북한 선수들이 많았는데, 사실 그때는 결정적인 순간 패스가 오지 않아 화가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일부로 안 줬다기 보다는 내가 볼을 받을 수 있는 낙하지점을 찾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혼자 어떻게든 넣어보겠다고 만들어서 슈팅도 해봤는데 결국 골은 넣지 못했다.

숙소를 같이 썼지만, 층은 달랐다. 밥 먹을 때와 훈련 때만 모였다. 왕래를 막는 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잠깐 장난 치고, 운동장에서 이야기하다 헤어지고 그런 것이 다였다. 교감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친해지려고 방에 찾아가고 그랬다. 북한 이야기도 물어보긴 했지만, 선수들이 경계를 많이 해서 소통이 잘 되지는 않았다.   

북한에서 해단식을 했다. 개성에서 기차를 타고 판문점으로 왔다. 북한 선수들이 거기까지 배웅을 했고, 헤어질 땐 서로 울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김정만에게 내가 은목걸이를 선물로 줬다. 줄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으니까, 다시 만나면 증표라고. (웃음) 

북한도 축구 대표 선수들은 그래도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하니까, 김정만은 그 중에 사상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 친구였다. 미드필더로 뛰는 지역이 같으니까 서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친해졌다. 놀러간 방도 김정만이 있던 방만 갔다. 

김정만도 지금은 감독이 되거나 할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더라. 연락해볼 수도 없고.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다. 김정만이 내게 따로 준 것은 없고, 북측에서 뱀술을 줬다. 아버님께 드렸다. 

구술=조진호 (현 부산아이파크 감독, 1991년 FIFA U-20 월드컵 참가)
정리=한준 기자
사진=국제축구연맹 1991 세계청소년대회 기술보고서,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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