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월드컵의 해다. ‘풋볼리스트’는 러시아에서 한국과 경기할 3개국의 축구 문화를 다양한 시각에서 해부한다. 행정, 전술, 관중문화 등 주제를 가리지 않고 독자 여러분께 흥미로운 내용을 전달해 드릴 예정이다. <편집자 주>

축구 대표팀의 저력은 종종 한 국가의 사상과 정치에서 비롯된다. 독재국가들은 체제 강화와 선전을 위해 대표팀의 성공에 집착하곤 했다. 현재 세계 챔피언인 독일 축구의 저력도 국가 정체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 복지국가라는 정체성이다.

독일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인 유소년 축구 정책으로 새로운 인재들을 끝없이 발굴했다. 근간을 이루는 건 독일축구협회(DFB)가 아닌 클럽이다. 인구 8,000만 명 중 DFB에 등록된 축구인이 약 600만 명이고, 그중 유소년이 175만 명에 달한다. 축구협회 중심으로 관리하기에 너무 많은 숫자다. 독일은 지방분권에 기초한 연방공화국답게 지역별 축구협회가 독립성을 갖고 각 영역을 관장한다.

클럽이 중심인 구조 안에서도 DFB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래가 창창한 엘리트 선수를 더욱 지원하고, 낙오될 위기에 처했지만 재능 있는 선수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프로팀이 놓친 선수 찾아 ‘소외 지역 영재 교육’

독일 유소년 육성은 2002년 시작된 퍼포먼스 센터(Leistungszentrum), DFB 베이스(DFB-Stutzpunkt), 엘리트 축구학교(Eliteschule des Fussballs)를 세 축으로 삼아 진행된다. 가장 일반적인 성장 경로는 프로 구단마다 마련돼 있는 퍼포먼스 센터다. 마리오 괴체처럼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로 순탄하게 자란 선수는 DFB 기관의 도움이 ‘보너스’ 수준이다. 퍼포먼스 센터를 통해 축구 실력을 키우고, 연령별 유소년 대표를 한 단계씩 밟아 A대표로 성장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선수가 클럽의 스카우트망 안에 있는 건 아니다. 어딘가 동네 축구교실에서 축구 재능이 출중한 선수가 공을 차고 있을지 모른다. 촉망받는 선수가 부진이나 부상으로 인해 소속팀에서 낙오될 수도 있다.

DFB는 프로팀이 놓친 미래의 스타를 찾아내기 위해 자원봉사 스카우트, 자원봉사 코치를 전국 규모로 가동한다. 이렇게 찾은 선수를 교육하는 기관이 전국 366개 DFB 베이스다. 유소년 프로젝트 이전인 2000/2001시즌 분데스리가에서 21세 이하 선수의 비중은 8%였다. 2013/2014시즌에는 16%(476명 중 75명)로 늘어났다. 이들 중 DFB 베이스 출신이 28명이나 됐다.

순탄하게 자란 엘리트들과 한번 낙오된 선수들을 모두 포함해, DFB 베이스에서 퍼포먼스 센터로 성장한 선수들은 지난 15년 동안 6,000명이 넘는다. DFB 베이스는 마리오 고메스, 토니 크로스, 귄도간, 베네딕트 회베데스, 마르셀 슈멜처, 안드레 쉬얼레 등 미래의 독일 대표 선수들이 분데스리가 유소년팀에 들어가기 전 먼저 훈련을 시켰다.

 

실패한 소년 선수에게 재기할 기회 주는 지원 정책

DFB 베이스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안드레 쉬얼레다. 쉬얼레는 2010년부터 독일 대표로 뛰며 ‘2014 브라질월드컵’ 우승에 일조한 선수다. 그러나 16세까지 고향 도시 루드비히스하펜에 머무르며 소규모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인근 지역 축구협회의 DFB 베이스가 프로팀보다 먼저 쉬얼레를 발견했다. 쉬얼레는 DFB 베이스의 교육과 관리를 받다가 16세에 마인츠05 유소년팀에 들어갔고, 19세에 프로로 데뷔하고는 이듬해 대표팀에 뽑혔다.

엘리트 유소년 축구는 끝없는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독일 대표 선수가 되려면 점점 좁아지는 피라미드를 올라야 한다. 독일 축구계도 물론 경쟁의 연속이다. 대신 경쟁의 방향을 다양하게 만들고,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 독일 유소년 축구의 ‘사회안전망’이다.

패자부활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데니스 아오고가 있다. 아오고는 손흥민과 함께 함부르크에서 뛰던 시절 독일 대표로 자주 뽑혔던 왕년의 스타다. 그러나 유소년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명문 칼스루헤 유소년팀에서 성장하던 아오고는 성장이 정체되자 13세 때 지역 소규모 구단인 발드호프만하임으로 옮겨야 했다. 아오고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

DFB는 아오고가 다시 엘리트 선수로 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고, 쇠네크 시(市)에 위치한 DFB 베이스를 통해 추가 교육을 제공했다. 아오고는 2년 뒤 프라이부르크 유소년팀에 입단하고 청소년대표로 발탁되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독일의 유소년 정책은 축구 강대국답게 발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본적으로 축구 자원이 풍족한 나라에 어울리는 맞춤형 전략이다. 인구가 적은 네덜란드나 벨기에가 한정된 자원을 더 크게 성장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것과 대조적이다. 2015년 대한축구협회는 유럽 각국을 돌며 유소년 육성 전략을 공유했다. 당시 한국은 독일보다 네덜란드, 벨기에의 현실에 가깝고, 이들의 정책을 더 참고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잡았다.

세 번째 축인 엘리트 축구학교는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도록 만든 엘리트슐레(Eliteschule des Sports) 제도의 축구 버젼이다. 프로 구단의 유소년팀이 인근 학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학생 선수를 관리한다. 훈련과 학업을 오가는 철저한 시간표로 수업에 최대한 참석하게 만들고, 높은 성적을 받도록 유도한다. 독일은 프로 유소년 선수 출신이 운동을 그만둔 뒤 얼마든지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는 학생 선수’를 잘 키우는 국가다.

 

‘두 번째 기회’가 독일 대표팀을 강하게 만들었다

정치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용접공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된 주인공은 ‘패자를 위한 두 번째 기회 지원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두 번째 기회’는 복지사회에 대한 논의가 벌어질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표현이다. 축구계는 자본주의 사회처럼 무한경쟁의 장이지만, 복지국가가 사회안전망을 갖추듯 한 번 낙오된 선수가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도 있다. 재능 있는 선수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적인 정책이기도 하다. 복지국가인 독일은 축구 선수를 육성할 때도 같은 철학에 기반을 둔다.

독일의 ‘2014 독일월드컵’ 우승은 스타 한두 명, 명장 한 명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독일의 저력은 축구협회 전체의 정책에서 나온다. 유소년 축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여기서 배출된 스타 선수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대표팀 구조를 갖추고, 코칭 스태프를 전략적으로 형성했다. 그래서 독일은 축구 역사상 가장 강력하진 않지만, 가장 안정적인 대표팀이 될 수 있었다.

글= 김정용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관련기사

저작권자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