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대한축구협회가 대표팀 지원 업무와 ‘한국 축구 백년지대계’를 분리하며 기술위원회를 둘로 쪼갠 지 반 년이 지났다. 그러나 어느새 기존 기술위원회 업무는 감독선임위원회를 이름의 새로운 기술위원회가 물려받았다. 김판곤 위원장은 감독 선임부터 한국 축구의 철학을 세우는 작업까지 도맡아 진행하고 있다.

 

대표팀에 집중한다던 감독선임위, 어느새 ‘사실상 기술위원장’으로

한국 축구는 기술위원회와 대표팀 지원 부서를 분리해야 한다는 지적을 오랫동안 들어 왔다. 유소년을 비롯한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기술위원회가 대표팀 업무까지 모두 하다 보니, 유소년 육성에 힘을 싣기 힘들었다. 기존 기술위원장은 국가대표팀이 부진하면 감독과 함께 경질되기 쉬운 자리였다. 오랫동안 책임지고 큰 그림을 그릴 새로운 위원회가 필요했다.

애초 축구협회가 기술위원회를 둘로 나눈다고 했을 때, 기존 기술위를 승계하는 쪽은 기술발전위원회였다. 지난해 11월 이임생 위원장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이용수, 황보관 전임 기술위원장들이 많은 일을 이뤘다”며 이들의 후임을 자처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처음 감독선임위원회를 만들 때 구상은 A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만 전담하는 전문적인 조직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홍명보 전무이사는 “선임위원회는 대표팀 감독과 올림픽대표팀 감독 선임만을 맡게 된다”며 선임위의 역할이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하는 일의 범위가 좁은 만큼 더 전문적으로 대표팀을 지원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선임위를 맡을 김판곤 위원장이 올해 1월 취임하면서 두 위원회의 비중이 바뀌었다. 김판곤 위원장이 한국 축구의 ‘테크니컬 디렉터’ 역할까지 맡는다고 발표가 된 것이다. 선임위는 기존 방침대로 A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의 감독 선임 및 지원을 맡는다. 이뿐 아니라 한국 축구 미래 전략을 설계하는 역할도 김판곤 위원장에게 주어졌다.

김판곤 위원장이 선임위를 맡은 뒤, 기술발전위의 역할은 크게 축소됐다. 기술발전위는 U-20 대표팀부터 그 아래 연령대 대표팀을 지원하는 역할만 하게 됐다. 유소년 축구 전체가 아니라 연령별 대표팀만 지원하는 작은 조직이 됐다.

김판곤 위원장은 홍콩 대표팀 감독 시절에도 테크니컬 디렉터 역할을 했다. 감독과 기술위원장을 겸하며 홍콩 축구 발전을 위한 장기 로드맵을 만들었다. 김판곤 위원장이 자신의 지도자 경력 중 가장 큰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것도 이 ‘테크니컬 디렉터’ 경험이었다. 한국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려 한 것이다.

이때부터 기존 기술위의 역할 대부분을 감독선임위가 맡는 꼴이 됐다. 결국 ‘기술위원회와 감독선임위원회를 분리한다’는 애초 의의는 흐릿해졌다. 감독선임위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기존 기술위의 역할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한국 축구의 철학을 세운다’는 역할을 했다. 기술발전위는 딱히 역할이 없어졌다.

업무 중심에서 밀려난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은 큰 역할과 비중 없이 활동하다가 7월 개인 사정을 이유로 사퇴했다. 한 기술위원은 “그동안 러시아월드컵 준비 및 지원에 협회 역량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기술발전위가 뭔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임생 위원장이 사퇴한 뒤에도 업무 정지 상태다. 위원 중에서는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유소년 현장에서 노력하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협회 전임지도자 등 자신의 원래 역할에 따라 일하는 것이지, 기술발전위 차원에서 진행하는 일은 없다고 보시면 된다”라고 말했다.

 

한국 축구의 철학, ‘내가 만들었다’는 듯한 김판곤 위원장

김판곤 위원장은 취임 당시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과 조율을 통해 한국적인 축구 철학을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7월 기자회견에서 한국 축구의 새로운 철학을 소개할 때는 자신이 주도해서 정립한 결과물이라는 걸 분명히 했다. 김판곤 위원장은 ‘능동적인 스타일로 경기를 지배하고 승리를 추구하는 축구’를 A대표팀뿐 아니라 각 연령별 대표팀, 나아가 유소년 축구 전체가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임생 위원장님 등과 이야기를 하고 다 동의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김판곤 위원장은 “이임생 위원장이 많은 일을 하셨다. 조용한 헌신에 감사드린다”라고 했지만 그동안 이임생 위원장이 했다는 일의 목록을 보면 위원장이라기보다 실무자에 가깝다. “유스 프로그램 만드는 일을 하셨다, 골든에이지 프로그램이 잘 되는지 보러 지방에도 많이 내려가셨다. 코치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이야기까지 들어가며 일 하셨다. 또 연령별 대표팀 관리, 전지훈련, 스케줄 짜는 것 등을 하셨다.”

김 감독이 밝힌 한국 축구 철학은 대표팀보다 유소년 육성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김판곤 위원장은 A대표팀부터 각 유소년 팀까지 관통하는 철학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축구협회가 접촉했다고 알려진 해외 감독들을 보면 김판곤 위원장이 말한 철학과 큰 관련이 없고, 각 인물 사이에서도 공통점이 딱히 없다. 한국 축구 철학이 A대표 감독 선임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유소년 육성의 실무는 전임지도자들 및 기술발전위에게 맡겼지만, 가장 핵심적인 건 유소년 발전 방향을 수립하는 일이다. 그 첫 단계인 한국 축구 철학 정립을 김판곤 위원장이 주도하면서 두 단체의 성격 구분은 더욱 불확실해졌다. 

 

‘대표팀 따라 흔들리는 기술위원회’ 전례 반복 우려

애초에 기술발전위와 선임위를 분리한 건, 한국 축구의 ‘장기 프로젝트’인 유소년 육성이 대표팀 성적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취지였다. 기술발전위는 꾸준히 유소년 육성에 신경 쓰고, 대표팀 성적에 따라 흔들리기 쉬운 선임위를 별도로 분리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표팀 철학을 만드는 일도, 월드컵 현장에서 대표팀을 지원하고 평가하는 일도, 대표팀 감독을 선임하는 일도 김판곤 위원장 한 명에게 모두 맡겨져 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김판곤 위원장이 오랫동안 대표팀을 맡아 힘써 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축구협회는 여론에 민감한 조직이다. 다음 대표팀이 뜻대로 운영되지 않아 부진에 빠지거나 논란이 생길 경우, 김판곤 위원장 역시 입지가 흔들린다. 한국 축구의 철학을 정립한 인물이 또 단기간에 축구협회를 떠나는 일이 반복될 위험이 있다. 김판곤 위원장에게 ‘테크니컬 디렉터’와 같은 일을 맡기려면 기술발전위원회를 맡겨야 했다.

기술발전위원회 자체가 점점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축구협회는 이임생 위원장이 사의를 밝힌 지 한 달이 가깝게 지나도록 후임 위원장을 선임하지 않았다. 축구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축구협회 임원진은 새 위원장 선임을 두고 고심을 하고 있다. 기술발전위 업무는 박지성 본부장이 있는 유스전략본부 등 다른 실무 부서와 겹친다. 이 참에 부분적인 조직 개편을 하는 방안도 있다. 이 경우 기술위원회를 둘로 나눈 시도는 사실상 조기 종료되는 셈이다.

김판곤 위원장은 최근 국가대표팀 차기 감독 선임에 집중하고 있다. 김판곤 위원장은 9일부터 18일까지 해외 출장을 통해 대표팀 후보군과 1차 접촉을 했다. 19일에는 선임위를 열어 러시아월드컵 대표팀에 대한 평가를 하고, 앞으로 본격 접촉할 대표팀 후보를 선정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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