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피렌체(이탈리아)] 김정용 기자= 같은 편이었다가 적으로 돌아서면 더 심한 적이 된다. 피오렌티나 팬들에게는 페데리코 베르나르데스키가 그런 존재다.

 

10일(한국시간) 이탈리아 피오렌티나의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에서 열린 ‘2017/2018 이탈리아세리에A’ 24라운드 경기를 관전했다.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일종의 르네상스 문화재인 곳이고, 로맨스 작품의 배경으로 쓰이며 낭만적인 이미지가 덧입혀진 곳이다. 아르테미오 프란키만큼은 여느 축구장과 마찬가지로 욕설과 악다구니의 현장이다. 유벤투스에 0-2로 진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욕설을 집중적으로 받은 선수는 베르나르데스키다. 피오렌티나 유소년 팀 출신인 베르나르데스키는 이탈리아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며 팀의 현재이자 미래로 각광받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피오렌티나에 남겠다는 말을 뒤집고 유벤투스로 향하며 팬들과 척을 지게 됐다. 여전히 길거리 노점상들은 베르나르데스키의 피오렌티나 시절 번호가 새겨진 ‘짝퉁’ 유니폼을 팔지만 홈 팬들의 애정은 거의 없어진 상태다.

 

베르나르데스키는 이적 이후 처음으로 아르테미오 프란키에서 세리에A 경기를 가졌다. 붙박이 주전은 아니지만, 파울로 디발라가 부상으로 빠졌기 때문에 스타일이 비슷한 베르나르데스키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피오렌티나 팬들은 홍염을 터뜨려가며 열렬한 응원을 준비했다.

경기는 기대 이상으로 팽팽했다. 두 팀 모두 4-3-3 포메이션으로 나와 치열한 압박 대결을 펼쳤다. 압박과 탈압박에 필요한 미드필더들의 조직력은 유벤투스가 분명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유벤투스는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만큼 피오렌티나 수비수들이 집중력을 갖고 분전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반 8분, 서포터들의 노랫소리가 잠깐 멈추고 대신 야유의 휘파람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베르나르데스키가 처음 공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2분 뒤, 이번엔 큰 함성이 나왔다. 베르나르데스키가 실책을 저지르자 이를 축하해주는 옛 서포터들의 따뜻한 마음씨였다. 피오렌티나 팬들은 베르나르데스키가 뭐든 잘못을 저지르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피오렌티나의 좋은 전반전은 거의 승리로 돌아올 뻔했다. 전반 18분 유벤투스 수비수 조르조 키엘리니의 손에 공이 맞았고, 주심은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그런데 킥을 하기 직전 경기를 지연시킨 주심은 손으로 네모를 그려 비디오 판독(VAR)이 이뤄졌음을 밝힌 뒤 킥을 취소시켜버렸다. VAR에서 어떤 판정이 내려졌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 것이 이탈리아의 방식이다. 이때 전광판에는 광고가 계속 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관중은 당연하다는 듯 기자들에게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물어봤다.

이탈리아에서 오래 생활한 영국인 존 후퍼는 책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를 통해 이탈리아인들은 분명한 사실을 정하기보다 여러 가지 입장을 공존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축구장에서도 판정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관중들이 토론할 여지를 주는 것이 이탈리아식에 가깝다. 그럴수록 팬들은 더 흥분했다. 몇몇 팬은 벌떡 일어나 기자석을 돌아보며 현란한 제스처와 함께 판정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기자들도 웃어넘기지 않고 열심히 자기 의견을 밝혔다.

 

피오렌티나는 후반전 초반까지도 경기력이 좋았다. 전반 39분 지우 디아스가 날린 슛이 아슬아슬하게 골대에 맞고 나왔다. 후반전 초반에는 페데리코 키에사가 위협적인 돌파를 감행했다. 그러나 골은 터지지 않았다. 유벤투스를 상대로 득점 기회를 낭비하면 언젠가 응징을 받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응징을 한 선수가 다름 아닌 베르나르데스키였다는 점이다. 후반 11분, 밀란 바델리에게 걸려 넘어진 베르나르데스키는 스스로 만들어낸 프리킥을 절묘하게 처리했다. 그때까지 엄청난 야유를 견디느라 제대로 플레이를 하지 못했던 베르나르데스키가 세트 피스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가치를 보여준 순간이었다.

 

옛 소속팀에 대한 예우 따위는 없었다. 베르나르데스키는 환하게 웃으며 유벤투스 벤치 쪽으로 동료들을 불러 모아 기쁨을 나눴다. 공을 잡을 때마다 욕설을 퍼붓던 홈 팬들도 이때만큼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베르나르데스키는 실력으로 잠시나마 저주에서 벗어난 셈이다. 사이가 나빠 보였던 건 선수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나르데스키는 전 동료들과 신경전까지 벌여가며 치열하게 뛰었다. 경기 후에도 피오렌티나 선수들과 전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피오렌티나는 동점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향에서 노력했다. 그러나 다음 골은 후반 41분 유벤투스의 곤살로 이과인에게서 나왔다. 두 팀 모두 잔뜩 전진하며 공수 간격이 매우 좁아진 상태였다. 유벤투스 센터백 키엘리니가 기습적인 스루 패스로 피오렌티나 수비진을 한 번에 뚫어냈다. 이과인이 골을 차 넣으며 사실상 승부가 기울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도 피오렌티나 팬들은 응원을 멈추지 않았다. 추가 시간이 되자 스카프 머리 위로 펼치기, 스카프 돌리기 등 더 다양한 응원 패턴이 나왔다. 이 경기의 가장 큰 볼거리는 팬의 응원과 야유였다. 사실상 수화에 가까운 제스처 능력을 가진 이탈리아 사람들답게 판정에 불만에 있으면 현란한 손동작으로 그 내용을 100m 밖에 있는 주심에게 설명하려 들었다. 반면 베르나르데스키를 향한 제스처는 아무런 해독이 필요 없었다. 빳빳하게 세운 가운데손가락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경기는 흔히 현지시간 오후 9시에 시작한다. 늦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식당 대부분이 오후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저녁 장사를 하기 때문에 경기가 끝난 뒤에도 식사와 함께 한잔 할 공간이 많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 먼저 빠져나간 관중들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경기장 앞 카페와 술집을 먼저 장악하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로 “키엘리니” “이과인” “베르나르데스키” 등 오늘 피오렌티나를 못살게 군 선수들의 이름이 들렸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풋볼리스트

 

관련기사

저작권자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