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김정용 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간을 거슬러가기 좋은 도시다. 러시아 제국을 세운 표토르 대제가 1700년대 초반 이 도시를 건설했던 시절 머물렀던 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표트르 대제는 기술이 뒤쳐져 있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영국, 네덜란드에 가명을 쓰고 일반 병사처럼 유학을 가 기하학, 조선술 등을 배웠던 표트르 대제는 늪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철저한 계획도시로 만들었다.

1700년대의 흔적은 예르미타시 박물관, 일명 겨울궁전에 잘 남아있다. 지금은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초대형 미술관이 됐다. 렘브란트, 마티스,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이 수없이 걸려 있다. 2002년에 개봉한 영화 ‘러시아 방주’을 보면 정신적 시간여행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90분 동안 단 하나의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영화는 방과 방 사이로 이동하며 21세기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19세기 겨울궁전을 오간다. 미술관을 찍던 카메라가 방문을 통과해 홀로 들어서면 궁정 연회가 벌어지는 무도회장이 펼쳐진다.

여름궁전 앞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잔잔한 바다를 건너면 여름궁전에 도착한다. 차를 타고 빙빙 돌아 가는 것보다 바다를 질러가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 여름궁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페테르고프에 있다. 핀란드 만이 보이는 바닷가에 자리잡은 여름궁전은 아름다운 분수로 특히 유명하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수로를 따라 곧바로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진귀한 광경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몇몇 골목이 ‘물 위의 파리’처럼 보이는 것처럼, 여름궁전은 ‘물 위의 베르사유’다.

바로 그 곳, 여름궁전 정문 건너편에 있는 호텔에 ‘2018 러시아월드컵’ 참가 중인 한국 선수들이 묵는다. 별채 하나를 통째로 쓴다. 훈련장이 있는 로모노소프와 가깝고, 관광지 앞이지만 대체로 한적한 교외에 가깝기 때문에 축구에 집중하기 좋다. 호텔 바깥에 태극기가 걸려 있고 경호, 의무 인력이 상주한다는 점 외에 한 나라의 대표팀이 묵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외관은 없다.

숙소 바로 뒤에는 올긴 호수가 있고, 평화로운 호수 가운데 있는 두 섬에는 잘 꾸며진 정원이 있다. 다리를 통해 첫 번째 섬을 지나야 두 번째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두 번째 섬의 올긴 별장의 물가에서 내다보면 대표팀 숙소와 함께 높고 거대한 성당이 보인다.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이다. 시내에 있는 동명의 성당이 더 유명하지만, 페테르고프에 있는 성당 역시 못지않게 아름답다. 성당은 복원 중이라 대부분 비닐로 덮여 있지만 종소리는 여전히 아름답게 울린다. 복잡한 기계장치가 된 종탑은 큰 종과 작은 종 여러 개가 일정한 패턴으로 번갈아 울리며 음악을 연주하게 되어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대표팀 선수들에게도 가 닿은 음악소리다.

한국 선수와 코칭 스태프는 호수 주변을 곧잘 산책했다. 특히 선수보다 코치들이 때론 혼자, 때론 두어 명씩 짝을 지어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눈가에 흰 털이 있어 꼭 흰자가 있는 것처럼 웃기게 생긴 갈매기들, 어미를 따라 물가로 올라오는 새끼 오리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대화하는 동네 사람들이 대표팀의 산책길 풍경이었다.

페테르고프는 여행 삼아 다시 오고 싶게 만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네였다. 내 숙소 1층에 있는 평범한 동네 식당에서 어느 날 EDM과 트랩 등 파티용 음악이 들렸다. 스케이트 학원 수강생들과 학부모(!)가 함께 하는 파티였다. 동네 식당 문을 닫아놓고 DJ가 음악을 트는 것이 페테르고프식 파티다. 페테르고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이어지는 엄연한 관광지였지만 평화로운 읍내 같은 모습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대표팀 숙소에서 성당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작은 시장도 나왔다.

대표팀 선수들은 한국 시간 26일 비행기를 통해 카잔으로 떠난다. 카잔에서 27일 독일과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한국이 승리하고, 다른 경기에서 멕시코가 스웨덴을 잡아준다는 매우 희박한 확률이 실현돼야 한국은 16강에 갈 수 있다. 16강 진출이 좌절된다면 한국 선수들이 페테르고프에서 보낼 시간은 거의 끝난 셈이다.

사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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