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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사이드] 김호남의 축구 인생, 아버지의 선물
문슬기 기자 | 승인 2016.05.23 15:27


[풋볼리스트] 문슬기 기자= “매 순간을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다.”

김호남(27)은 막내아들이다. 하나있는 형처럼 의젓하지도 않았고, 든든한 맛도 없었다. 아버지 앞에선 애교 많은 ‘철부지 아들’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마냥 귀여웠다. 철부지 아들의 애교는 아버지를 ‘무장 해제’시켰다. 아버지의 웃음은 아들을 더 개구지게 만들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든든한 기둥이자 다정한 친구였다. 그러나 아들이 축구를 시작한 이후엔 함께인 시간이 적었다.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흙 묻은 손을 털고, 기름때를 묻히셨다. 평생 하던 일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향했다. 마흔 넘은 나이에 변화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꺼이 하셨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다던 아버지셨다.

이별은 예기치 못한 시점에, 전혀 바라지 않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2010년 1월 아버지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아들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 2주 뒤의 일이었다. 더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었다. 여전히 함께일 순 없었다. 축구를 위해선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아버지도 그라운드 위에 있는 아들을 더 바랐다. 자신의 많은 것을 ‘축구 선수’에게 바쳤던 아버지는 아픈 와중에도 아들의 인생을 응원했다.

2010년 9월 16일, 아버지와 아들은 이별했다. 아들이 프로 선수가 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철부지 막내아들을 걱정했다. 더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셨다. 아들은 자신의 모든 순간이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했다. 이별한 뒤에 더 크게 느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아래는 김호남과의 인터뷰 전문.

- 2010년 2월 광주대를 졸업하고 한 달 뒤 일본 사간도스에서 프로 데뷔했다. 이미 아버지의 간암 사실을 안 뒤였다. 떠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릴 적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선수가 되기 위해선 경제적으로도 뒷받침이 돼야 한다. 전북 부안에서 논농사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나를 위해 직업까지 바꾸셨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고향을 떠나 수원에 고모부가 운영하시던 공장으로 가셨다. 모르긴 몰라도 뒤늦게 시작하신 일이라 많이 힘드셨을 거다. 술을 많이 드셨고, 담배도 많이 피우셨다. 그러면서 건강도 안 좋아지셨다. 1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대학 졸업은 코앞인데 아직 프로 소속팀을 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간암 말기 판정을 들은 직후에도 나에게 바로 알리지 않으셨다. 당시 나는 홍명보 감독님이 이끄시는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훈련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혹여나 내 마음이 흔들릴까 가족 모두에게 소집 해제될 때까지 발병 사실을 알리지 말라 하셨다. 나의 축구 인생은 아버지 인생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축구하는 내 모습을 매우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아픈 아버지를 웃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K리그에선 내가 설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아버지의 간암 전이 속도는 너무 빨랐다.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께 프로 데뷔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갈 곳 없던 내가 국내에서 프로가 될 수 있는 방법은 K리그 드래프트뿐이었다. 드래프트는 12월이나 돼야 열리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그때까지 함께 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방법을 찾던 중 사간도스에서 윙어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윤정환 감독님의 팀이었다. 테스트를 받겠다고 했다. 붙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아버지를 두고 일본으로 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을 내놓으면서까지 반평생 아들의 꿈을 응원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꼭 프로가 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사간도스 입단이 확정되자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지금도 그날의 아버지 모습이 생생하다.

- 아버지가 그해 9월에 돌아가셨다. 일본에서 소식을 듣게 됐는데.

일본에 가자마자 발목을 다쳤다. 한참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한 건 8월 말부터였다. 정상적으로 운동했고, 출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형으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은 건 9월 14일 화요일이었다. 형이 한국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했다. 욕심이 났다. 그 주엔 경기에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형에게 이번엔 경기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망설이던 형은 그럼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몇 시간 뒤 다시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휴대폰에 형의 이름이 뜨는데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보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형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덩달아 울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앞이 캄캄했다. 형과는 별말을 하지 못한 채 통화를 끝냈다. 당시 FC도쿄에서 뛰던 (김)영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펑펑 울었다. 토해내듯이 눈물을 쏟았다.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왔다. 장례식장으로 가기 전까지 멍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막상 장례를 치르는 동안엔 눈물 흘릴 틈도 없었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 애도하셨다. 입관하기 직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다. 눈을 뜨고 계셨다. 그곳 관계자가 아마 아버님이 둘째 아드님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눈을 뜨고 계셨던 거 같다고 하셨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눈을 감겨드렸다. 그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 그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끝내 사간도스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선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일본에서 더 도전할 생각은 안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음을 잡지 못했다. 최대한 집중하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어머니도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를 잃고 나서 가족들에게 더 많이 신경을 쓰게 됐다. 일단 일본을 떠나기로 했다. 사간도스에 온 지 6개월 정도 된 때였다. 사간도스 소속으론 4경기밖에 치르지 못했다.

돌아와선 2011년 K리그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광주가 창단하는 해였다. 감사하게도 드래프트 1순위로 광주 유니폼을 입게 됐다. 시기가 잘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자리를 잡는 게 어려웠다. 입단 초기엔 (김)은선이 형, (이)승기 형, (김)동섭이에게 밀려 주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2011년과 2012년에 나선 경기가 총 세 번에 그쳤다. 공격 포인트는 아예 없었다.

그러다 광주가 챌린지로 강등된 2013년에 비로소 설 자리를 찾았다. 2013시즌엔 28경기에서 7골 6도움을, 2014시즌엔 37경기에서 8골 5도움을 기록했다. 팀이 승격하는 기쁨도 맛봤다. 광주에서 2015시즌(29경기 출전 8골 1도움)까지 뛴 뒤 지난 1월에 제주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광주는 내게 특별했다.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있던 내게 K리그라는 기회를 줬고, 무명에 가까웠던 나를 조금이나마 드러나게 해준 팀이다. 광주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제주라는 K리그 두 번째 팀까지 얻었다. 소중할 수밖에 없는 팀이다.

- 야심차게 제주로 이적했지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11라운드 기준 8경기에 출장해 1골을 넣었다. 선발은 두 번뿐이었다. 경쟁자인 이근호와 안현범 등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앞으로도 당분간 기회를 얻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솔직히 어렵다. 조성환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시는데 계속 살리지 못한다. 더욱 성장해야 할 때인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요즘 살아생전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이 참 많이 생각난다. 운동하면서 딱 한 번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합숙소를 뛰쳐나와 집으로 왔는데, 아버지께선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 그런 일에 지나치게 동요 돼선 안 된다. 우리 아들은 연연할 시간에 해결해야 할 방법을 찾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선수 김호남’, ‘인간 김호남’이 되는 큰 힘이다. 힘이 들 때나 스스로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린다. 덕분에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실의에 빠지거나 자책하는 게 아니다. 더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모두가 다 잘 하는 프로 세계에서 기회를 얻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조급해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게 맞다.

-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본인도 아버지가 된다.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은가.

나이가 차면서 내가 아버지가 되는 날을 미리 그려보게 된다. 과연 나는 ‘나의 아버지’처럼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많은 걸 내주셨다. 아직 아버지가 되지 못한 나는 여전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의 인생을 응원할 수 있을까 싶다.

다만 자식이 흔들릴 때 지침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나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분명 아버지도 많이 두려우셨을 거다. 그럼에도 기꺼이 조언해 주셨고, 항상 노력하셨다. 덕분에 나는 하고 싶던 축구를 할 수 있었고, 행복을 배웠다. 최상은 아닐지 몰라도 최선은 가르쳐 주셨다. 나도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

-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언젠간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 아버지와 이별한 뒤 어떻게 살았는지 당당하게, 또 재미있게 들려드리고 싶다. 지금 내가 겪는 매 순간은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것을 내주셨기에 가능한 오늘이다.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그러 셨 듯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약속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감정을 느낄 때면 더욱 보고 싶다.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사진= 김호남 제공, 한국프로축구연맹

# '풋볼리스트'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축구선수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인터뷰로 엮었습니다. 아버지로, 아들로, 남편으로 그리고 축구선수의 아내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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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슬기 기자  moonsg@firstdivis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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