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한준 기자=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대동하고 온 코치 카를로스 아르무아(67)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일각에서는 그의 경력이 한국 대표팀을 맡기에 모자란다는 시선이 있다. 그의 경력 자체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설명되지도 않아서다.

아르무아 코치는 부임 당시 수석코치로 알려졌다. 실상 그의 역할은 피지컬 코치다. 어쩌다 이런 혼선이 빚어졌을까? ‘풋볼리스트’는 10월 A매치 소집 전 아르무아 코치를 만나 그 자신의 입을 통해 그가 걸어온 길과 축구 철학을 들었다. 베일에 가려진 아르무아를 ‘풋볼리스트’가 소개한다.

#라싱클럽 유소년 감독이었던 부친, 아르헨티나 피지컬 코치 1세대

-인터넷에서도 당신에 대한 정보를 찾기 쉽지 않다. 한국에 오기 이전의 축구 경력에 대해 궁금하다.
많지는 않지만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있기는 하다. (웃음) 물론 모든 정보가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일단 난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아버지는 아르헨티나에서 꽤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라싱 클럽에서 유소년 감독으로 일하셨다. 라싱 클럽은 아르헨티나의 유명 선수와 감독을 많이 배출했다.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팀이다. 아버지 덕분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축구가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도 했다. 좋은 선수였다. 감독이 되기보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고자 했다. 라싱 클럽에서만 일했고, 좋은 선수를 많이 키웠다. 아버지와 함께한 선수들로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한 알피오 바실레를 비롯해 골키퍼 마리오 세하스 등이 있다. 

-선수 생활은 하지 않았나?
라싱클럽과 클럽 아틀레티코 로스 안데스, 이 두 팀에서 유소년 선수로 뛰었다. 프로 선수까지 되지는 못했다. 축구에 빠져 살았으나 프로가 될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선수로 뛸 때는 볼란테 센트랄(Volante Central,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패스하면서 아주 많이 뛰었다. 프로가 될만한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피지컬 코치를 해보자고 결정했다. 축구를 아주 좋아했고,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감독이 아닌 피지컬 코치를 택했나?
개인적으로 피지컬 훈련에 대해 관심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프로 선수로 뛴 경력이 있어야 감독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감독이 되기 위해 프로 선수로 뛰는 것이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무리뉴 감독과 같은 경우로도 감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렇게 되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피지컬 코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좋은 수준의 피지컬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에도 피지컬 코치 양성 코스가 있었나?
그때 막 피지컬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다. 나는 나시오날 에두카시온 피시카(Nacional Educacion Fisica)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여기서 공부한 것을 통해 피지컬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피지컬 교육 중에서도 축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축구팀 코치를 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축구 분야의 피지컬 교육이라는 것이 특별히 없었다. 우리 세대의 피지컬 지도자들이 구축했고, 그 이후에 축구 전문 피지컬 교육에 대해서는 2000년대에 들어서 만들었다. 피지컬 훈련이라는 것이 축구 종목에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축구전문 과정이 생겼다. 

내 아내도 피지컬 지도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랫동안 가르쳤다. 배구와 농구 선수로 뛰기도 했다. 높은 레벨에서 뛴 것은 아니지만 운동 선수였고, 그 후 체육 교사로 일했다. 아내도 축구와 인연이 깊다. 장인어른은 지금 93세이신데 축구 선수로 뛰었던 분이다. 템펠레이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했던 다니엘 시스토(Daniel Sisto)다. 나는 세 명의 자녀가 있는데 첫째 딸은 핸드볼 선수를 했다. 남편도 아르헨티나 대표 선수까지 한 핸드볼 선수다. 첫째 딸은 스페인에서 오래 살았다. 

카를로스 세비야 감독과 LDU 키토에서 함께 한 시절(왼쪽)

-피지컬 코치가 되고 나서 어떤 팀에서 일했나?
아르헨티나에서는 템펠리(Temperley), 라누스(Lanus), 로스 안데스(Los Andes), 타제레스(Talleres), 산마르틴 데 투쿠만(San Martin de Tucuman), 벨그라노 코르도바(Belgrano Cordoba), 인스티투토 코르도바(Instituto Cordoba), 아틀란타 부에노스아이레스(Atlanta Buenos Aires)에서 일했다. 그 다음에 남미의 다른 나라로 갔다. 볼리비아에서는 스트론제스트(The Strongest), 빌스테르만(Jorge Wilstermann), 오리엔테페트롤레로(Oriente Petrolero)에 있었고, 에콰도르에 가서 아우카스(Aucas), 에멜렉(Emelec), LDU 키토(LDU Quito)에서 일했다. 콜롬비아에서 데포르테스 톨리마(Deportes Tolima)에 갔다가 다시 LDU 키토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FC시옹, 카타르에서 울리 슈틸리케와 알사일리아와 알아라비에서 일하고 한국 대표팀에 오게 됐다.

-꽤 많은 팀을 다녔다. 
피지컬 코치는 감독의 성적에 영향을 받는다. 2~3년 정도 한 팀에서 일하는 것이 보통이다. 운이 좋으면 그 이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몇몇 팀에서는 충분히 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산마르틴 데 투쿠만 같은 경우, 3년 일한 뒤에 다시 와서 일했던 적도 있다. LDU 키토에서도 두 차례 갔었다. 처음에 3년을 하고 그 뒤에 다시 와서 8년간 9시즌을 보냈다.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콜롬비아에도 한 팀에서 두 번 일했다. 난 감독들과 늘 좋은 관계를 맺었다. 감독과 다투는 일 없이 항상 잘 지냈다.

-어떤 감독들과 함께했나?
아르헨티나 레벨에서는 유명한 감독들과 함께 했다. 보카주니어스에서 뛸 때 유명한 선수였던 로베르토 로헬(Roberto Rogel)이 있고, 1962년 칠레 월드컵에 참가했던 페데리코 사치(Federico Sacchi)는 내 어린 시절 우상인데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치는 라싱 선수였기 때문에 어려서 응원하던 인물이다. 우라칸의 센터백 호르헤 지나르테(Jorge Ginarte), 알레한드레 사벨라 감독이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지휘할 때 코치였던 훌리안 카미노(Julian Camino)와도 일했다. 오스카르 말베르나트(Oscar Malbertnat)는 에스투디안테 라플라타의 주장으로 1968년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이끈 선수였는데 그 와 함께 에콰도르에서 일했다. 카를로스 세비야, 폴로 카레라 등은 대표 선수 출신으로 큰 팀에서 감독으로 일한 이들이다. 그들과 함께했다. 

-직접 지도한 선수 중에 우리가 알만한 선수가 있나?
많다. 세계 레벨이라기보다는 아르헨티나 안에서는 충분히 유명한 선수들이 있었다. 에콰도르에서는 국가 대표 선수 알렉스 아기나가가 16살 일 때부터 훈련했다. 에콰도르에서는 아주 유명한 선수다. 아르헨티나 선수로는 1990년 월드컵에 참가한 센터백 호세 세리수엘라가 스무 살 이던 시절에 나와 함께 했다. 이후에 리베르플라테와 보카주니어스 같은 큰 팀에서 뛰었다. 

LDU 키토에서 알렉스 아기나가를 육성한 아르무아 코치(가운데 줄 왼쪽에서 네 번째)

#슈틸리케와 만남은 스위스에서, 성적 부진에 대한 진실

-일찍부터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생활한 것 같다.
지도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좋은 제안이 와도 아르헨티나에 남고자 하는 이들이 있고, 적극적으로 나가는 이들이 있다. 나는 후자다. 울리가 한국으로 가자고 제안했을 때도 기꺼이 모험에 나서겠다고 했다. 나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에 와서 아주 좋다. 한국에서의 삶은 아름답다. 단지 일 뿐만 아니라 선수들과 함께 하는 것, 한국 사람들과 지내는 것 모두 만족한다. 콜롬비아나 에콰도르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여전히 SNS를 통해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고 애정을 줄 수 있는 환경이다. 전 세계 어디에 있어도 서로 연결이 된다. 아내와는 한국에서 함께 살지만 자녀와 손자들과도 SNS를 통해 소통하고 있다. 

-유럽 무대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
네스토르 클라우센(Nestor Clausen) 감독이 내게 같이 시옹으로 가자고 했다. 2006년 6월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주 유명한 감독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있는 박물관에도 그의 사진이 있다. '1986 멕시코월드컵'에서 한국과 경기에 선수로 뛰었다. 클라우센의 사진도 거기에 있더라. 지금은 활발하지만 사실 우리 시대에는 외국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클라우센과는 볼리비아에서 같이 일했고, 아르헨티나에서도 같이 했던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을 통해 나도 운 좋게 유럽 리그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슈틸리케와는 시옹에 있을 때 알게 됐다.

-클라우센 감독이 떠난 이후에도 시옹에 남은 것인가?
클라우센 감독은 회장과 문제가 있어서 팀을 떠나게 됐다. 성적이 안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다툼이 있었다. 클라우센은 떠났지만 나는 떠나지 말고 그냥 남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난 시옹에서 계속 일했다. 슈틸리케가 온 것은 2008년이었다. 

-여러 팀, 여러 감독과 함께 했으나 그 뒤로 쭉 슈틸리케 감독과 함께 하고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함께 사는 부부끼리도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인데 슈틸리케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아주 좋은 관계였다. 슈틸리케의 아내와 내 아내도 아주 친하다. 시옹에서 함께 일할 때는 남미에서 일할 때와는 아무래도 환경이 달랐다. 시옹에서 슈틸리케와는 훈련장뿐 아니라 밖에서도 자주 함께했다. 밥을 먹거나 가족과 여가 시간을 보낼 때 늘 함께했다. 서로 집도 가까웠다. 스위스 생활을 거의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업무적인 면을 떠나 서로 가족끼리 좋은 관계였다. 

슈틸리케의 모국어는 독일어다. 난 독일어를 할 줄 모르지만 그의 두 번째 언어가 스페인어다. 그리고 세 번째로 프랑스어를 하고 네 번째로 영어를 한다. 나도 프랑스어가 두 번째 언어다. 스위스에서는 주로 프랑스어를 썼기에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나도 영어는 조금 할 줄 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등으로 서로 소통이 아주 잘 됐다. 그래서 같이 카타르도 갔고, 한국에도 오게 됐다. 그와 함께 한국 대표팀에 오게 된 것은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카타르 2부리그 우승으로 알사일리아를 승격시킨 슈틸리케와 아르무아

-슈틸리케 감독이 맡았던 팀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성적이 다 나빴던 것은 아니다. 내가 처음 시옹에 왔을 때는 2부리그에서 막 승격했을 때다. 슈틸리케 감독이 있던 때는 아니지만 리그 3위를 차지해 UEFA컵 출전권도 따냈다. 그 이후로 성적이 꽤 요동쳤던 면이 있다. 회장이 감독 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다음에 카타르의 알아라비로 갔다. 처음에는 좋았다. (주/ 2008/2009시즌 후반기 부임 후 7위, 2009/2010시즌 3위) 

그다음에 알샤일리아로 갔다. 알사일리아는 하위권 팀이었다. (주/ 슈틸리케 부임 전 2009/2010시즌 11위 기록 후 승강 플레이오프를 통해 잔류) 강등을 당했지만 2부리그에서 우승시켰다. (주/ 2010/2011시즌 11위로 승강 플레이오프 내려간 뒤 강등, 2011/2012 시즌 2부 우승으로 승격 성공) 2013년에 알아라비로 다시 가서도 4,5위권에 있었다. 훌륭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아주 성적이 나빴다고 할 수도 없다. 더 지지를 받으며 일했다면 좋았겠지만 카타르에서는 감독 교체가 잦았다. 한국의 경우 해결할 문제도 많고 긴장감도 더 강하지만 더 차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클럽팀에서 일하는 것과 대표팀에서 일하는 것은 일정상으로도 그렇고 많은 점이 다르다. 대표팀은 한국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것인가?
대표팀을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에서 가브리엘 칼데론 감독(주/ 아르헨티나 출신, 2004년 11월~2005년 12월 재임)과 함께 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해냈는데 사우디아라비아가 칼데론 감독과 계약을 끝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과 함께 '2006 독일월드컵'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주/ 2005 서아시안게임 성적 부진으로 경질) 새로운 감독이 오게 되면서 내 계약도 같이 끝났다. 칼데론은 프랑스로 갔고 나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1980년에는 페데리코 사치 감독과 아르헨티나 올림픽 대표팀에서 함께 했다. 국가 대표팀에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감독이 있었고 피지컬 코치로 리카르도 피사로티가 일했다. (주/ 1978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우승을 이끈 주역으로 메노티와 오랫동안 함께한 파사로티는 피지컬 코치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다) 그 아래인 올림픽 대표팀에 사치 감독과 내가 피지컬 코치가 있었다. 우리는 프레 올림픽에 참가해서 본선 진출권을 얻었다. 1980년 올림픽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 당시에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나라가 보이콧을 했다. 아르헨티나도 보이콧을 하면서 우리도 올림픽 본선에 가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처음에 당신이 수석코치로 알려졌다.
역할 관점으로 보자면 수석코치는 전술적인 부분을 관장한다. 나는 피지컬 코치다. 그러나 피지컬 훈련은 전술적인 면, 기술적인 면과 상호 관계다. 피지컬 훈련을 시키는 것이 내 일이지만 전술적, 기술적인 부분을 결합해서 진행한다. 공과 함께 훈련하면서 전술적, 기술적 의미를 담은 피지컬 훈련을 한다. 슈틸리케가 그런 훈련을 원하기도 하지만, 본래 피지컬 훈련을 별도로 할 경우 전술이나 기술적인 부분과 거리가 멀어진다. 같이 하는 것이 좋다. 통합적인 훈련을 공과 함께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난 계속 피지컬 코치로 일했지만 슈틸리케와 함께하면서는 어시스턴트 코치의 역할도 같이 했다. 피지컬 훈련 시간이 별도로 존재하고, 내가 이 시간을 주도적으로 쓴다고 이것 저것을 시킨다면 선수들은 지키고, 경기 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대표팀은 3일간 훈련하고 경기를 하고, 다시 3일을 준비해 다음 경기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피지컬 훈련을 별도로 하는 것은 작동할 수 없다. 기술-전술 훈련을 통합해야 하고, 슈틸리케는 이런 점에서 열린 사고를 하는 감독이다. 현대 축구에서 피지컬 코치는 독립적이지 않다. 축구 종목에서는 특히 더 통합적이다. 

FC시온 시절, 클라우센 감독이 떠났지만 콘스탄틴 회장은 아르무아를 잔류시켰다.

#아르무아의 훈련 철학 "공과 함께 통합 훈련"

-피지컬 코치로만 수십 년을 일했다. 과거와 지금의 피지컬 훈련은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다.
아주 많이 바뀌었다. 그때와 지금 모두 유지하는 것은 있다. 피지컬 훈련을 공과 함께 하는 것이다. 모든 훈련을 다 공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공과 하는 훈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론적인 면에서 바뀐 점은 매년 있다.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나 역시 아직도 공부하고 있다. 축구는 세계화가 많이 됐고 많은 곳에서 훈련법이 나오고 있다. 공부하고 있다. 공을 소유하고, 패스하는 플레이 중심으로 한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고 동료 간에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과 함께 하는 훈련을 중심으로 한다. 예전에는 레알마드리드를 좋아했다. 아르헨티나 선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르셀로나를 좋아한다. 메시 때문이 아니라 경기 스타일 때문이다. 과르디올라 방식의 축구를 좋아한다.

-피지컬 코치가 몸을 만들어주는 것과는 다른 것인가?
피지컬 코치는 선수를 지원하는 일이다. 특히 개별 선수의 특성에 맞게, 선수 특성에 따라 다르다. 선수마다 피지컬과 기술적 특징이 다르다. 호날두를 예로 들면 그와 똑같은 몸을 가진 선수는 없다. 그건 피지컬 훈련의 결과가 아니다. 메시도 그렇다. 제2의 메시는 없다. 차비, 이니에스타 같은 경우도 피지컬 조건이 다르지만 천재적인 선수다. 어떤 같은 훈련법으로 개별 선수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테니스 선수 나달이나 페더러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과 똑같은 훈련을 한다고 그와 같은 경기력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다. 개별 선수마다 자신의 특성을 살려서 플레이하는 것이다. 좋은 분위기의 훈련을 통해 개별 선수들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각자 방식으로 플레이하는 것이지 피지컬 훈련으로 같은 조건의 몸을 만드는 건 아니다. 물론 짐(gym)에서 운동하는 것도 몸을 강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 현대 축구는 더 많이 역동적이고 빠르고 강해졌다.

-지금 한국 대표팀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경기 다음 날 선수를 회복시키는 게 제일 중요하다. 선수의 컨디션 유지 하는 것. 90분을 뛴 선수, 60분을 뛴 선수, 30분, 4분을 뛴 선수 등 각기 다른 선수에 맞춰서 준비해야 한다. 그다음은 날씨다. 원정 경기를 가는 곳의 온도와 습도 등을 체크해야 한다.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피로를 줄이고, 체력이 고갈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과정에 날씨를 봐야 한다. 시차 문제도 있다. 피지컬 코치는 코디네이터다. 피지컬과 관련한 모든 측면에서 준비해야 한다. 

지난해 치른 호주 아시안컵, 그리고 중국 동아시안컵을 치렀다. 대표팀에는 시즌 도중에 오는 선수가 있고, 시즌을 마치고 오는 선수가 있다. 서로 컨디션이 다른데 준비할 시간은 많지 않다. 그래서 원하는 훈련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선수마다 각자 몸 상태가 달라서 대표팀 훈련은 아주 세심하게 해야 한다. 좋은 타이밍과 직감도 필요하다. 선수들을 억지로 훈련시켜서도 안된다. 대표팀 경기가 목요일에 열린다면 소집 전에 누구는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에 경기하고 온다. K리그 같은 경우 일요일에 끝났다. 휴식 시간이 적다. 그러면 훈련 시간도 적어질 수밖에 없다. 선수들이 지치기 때문이다. 결국 대표팀에서 피지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9월 A매치 경기에 특히 피지컬적으로 문제가 많이 지적됐다.
몇몇 선수들은 시즌을 시작하던 시기라 리듬을 찾는 중이었다. 시즌 도중인 선수들과 피지컬 균형과 경기 리듬이 다르다. 선수 사이에 리듬에 대한 차이가 있다. 시즌 내내 경기를 뛴 선수라면 피지컬이 좋다.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리듬을 잃는다. 피지컬 훈련을 해도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좋은 훈련이 될 수 없다. 경기를 계속 나가는 데 피지컬 훈련을 하지 않아도 좋은 컨디션이 될 수 없다. 좋은 경기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선 꾸준히 경기해야 하는데, 주말 주중 경기를 계속 뛰면 너무 지치게 된다. 지금 축구가 너무 상업적으로 되면서 경기가 많아진 측면이 있다. 그래서 선수들이 녹초가 된다.

-지휘해 본 한국 선수들의 특징은 어떤가?
아주 규율이 좋다. 훈련 집중력이 좋다. 함께 해본 한국 선수들 모두 규율이 좋고 훈련에 매우 열중하더라. 신체적으로는 개별 이름을 말할 수 없지만 대체로 균형이 좋다. 팀마다 다양한 체형의 선수가 있다. 각자 가진 최대한의 신체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최고의 경기 리듬을 끌어내는 것이다. EPL을 보면 압박이 강하고 경기 리듬이 빠르다. 그런데 K리그를 보면 느리다. 이것은 피지컬 조건이나 기술적 조건의 차이 때문은 아니다. 독일, 스페인 등 다른 리그도 각자 스타일이 다르다. 한국의 감독이나 피지컬 코치의 기술적, 체력적 준비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축구를 둘러싼 환경의 차이, 나라마다 다른 사회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기술적 실수에 대해 여러 차례 지적했다. 이것도 체력 등 피지컬 적인 문제에서 기인할 수도 있나?
기술적 실수는 신체가 아닌 기술의 문제다. 공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자신감을 갖고 정밀해진다. 골 상황에서의 정밀함도 그렇다. 축구 경기에서는 누구나 실수한다. 자신감을 갖고 공을 대한다면 그만큼 실수하지 않는다. 공과 함께 하는 훈련을 더 늘려야 그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패스 한번을 하더라도 더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Q. 개인적으로 따로 기술적인 훈련을 더 해서 보강해야 하나?) 개인 훈련보다는 단체 훈련을 통해, 동료와 함께 포지션에 따른 훈련을 해야 한다. 축구는 혼자 할 수 없다. 많은 숫자를 갖고 훈련해야 한다. 선수들이 계속 움직이면서 패스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표팀에 원톱에 대한 고민도 계속되고 있다. 훈련을 통해 발전시킬 방법은 없나?
스페인 대표팀처럼 (한국도) 공격수가 부족하다. K리그의 모든 팀이 외국 선수를 최전방에 쓰고 있다. 그 뒤의 선수는 많다. 여러 나라가 가진 문제다. 스페인도 그래서 디에고 코스타를 데려왔다. 마무리 슈팅에 대한 훈련도 피지컬, 전술, 기술, 통합 훈련으로 할 수 있다. 테니스 선수 쿠베르텡을 예로 들면, 공을 칠 때 공을 본다. 축구에서도 공을 보고 차지 골문을 확인하고 차지 않는다. 보지 않고도 골문 위치를 알 수 있어야 한다. 대표팀에서도 때때로 공격수들의 마무리 훈련을 따로 한다. 훈련을 마치고 10-15분 정도 공격수들이 슈팅 훈련을 하기도 했다. 팀 훈련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공격수들만의 훈련이 필요한 때도 있다.

-한국에서의 삶은 어떤가? 한국에서 목표는?
아주 좋다. 내 아내도 아주 좋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다 좋다. 음식이 조금 맵긴 하지만 아주 맛있다. 매운 것도 잘 먹긴 하지만 아주 매운 음식들은 못 먹는다. 언어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사람들이 다 친절하다. 간단한 영어로 소통한다. 한국 친구도 있고 아르헨티나 친구도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오래 일했던 친구도 있다. 한국에서 목표는 대표팀과 결과를 내는 것이다. 모든 한국 팬들이 즐거울 수 있도록 러시아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회적인 부분이다. 축구 밖의 사람들, 한국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알고, 잘 지내고 싶다. 

사진=풋볼리스트, 카를로스 아르무아,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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