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류청 기자= 일제강점기, 나라가 어려워 해외에 임시정부가 섰을 때도 우리 축구는 이어졌습니다.

 

거짓말 같이 들리시죠? 한반도, 간도, 중국 본토, 연해주 그리고 일본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28년, 전 일본 중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에서 평양 숭실중학이 우승했습니다. 1935년과 1936년 일왕배 결승전에 연달아 식민지 조선 팀이 올랐습니다. 1935년에는 고 김용식 선생이 이끈 전경성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했고, 1936년에는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준우승 했습니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축구하면 조선이다”

 

우리 선조는 그저 공을 찬 게 아닙니다. 축구는 민족정체성을 드러내고, 우리가 지닌 우월함을 증명할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조선 민족이 일본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독립운동을 할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달린 겁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엘리트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를 기억하실 겁니다. 영화 ‘암살’에서 속사포(조진웅 분)가 나온 학교로 설정되며 다시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축구는 정규과목 중 하나였습니다.

서시를 쓴 윤동주 시인이 축구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간도 용정(龍井)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축구를 매우 좋아해 친구들 유니폼을 집으로 가져와 재봉틀로 번호를 박아주기도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친조카 안원생 선생도 축구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안원생 선생은 주로 중국에서 활약하며 ‘축구 명장’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 등이 중국 원정경기를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뛴 고 손기정 옹을 기억하실 겁니다. 당시 일본 축구국가대표팀에는 조선 출신 고 김용식 선생도 뛰었습니다. 고 김용식 선생은 일본이 공식대회에서 첫 승(대 스웨덴 3-2 승리)을 할 때 가장 주축 선수였습니다. 일본의 노 기자 가가와 히로시 선생(91)은 “김용식은 축구의 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016년 8월, 일본축구협회는 고 김용식 선생을 일본축구협회 명예에 전당에 모시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기도 했습니다.

고종 밀서를 들고 헤이그로 간 밀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상설은 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민중은 집회결사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일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걸 금했습니다. 예외가 바로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당시 독립군 양성소 역할을 톡톡히 했던 간도 지역에서는 축구 경기가 열릴 때마다 독립군들이 소식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관중들은 이때만큼은 반일, 항일 성격이 짙은 응원가를 불렀습니다. 광복가, 응원가, 학도가 그리고 한산가 등을 즐겨 불렀다고 합니다.

 

“한산도에서 왜적을 격파하던 충무공의 칼이 오늘날 다시 번쩍번쩍 번개같이 번쩍” (한산가 중)

우리 민족에게 축구는 그저 공놀이가 아닙니다. 축구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사 발자국과 질곡을 만나게 됩니다. 김광석이 부른 노래 ‘광야에서’를 기억 하십니까?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 더 나아가 중국 본토와 연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까지 우리 선조가 공을 몰고 달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잊고 아니 모르고 살아 갑니다. 그 기억을 간직한 이와 기록이 사라져 갑니다. 그 눈물겹고도 찬란한 기억을 지금이라도 모아보려 합니다.

 

스토리는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창고(스토리지)에서 나옵니다. 우리 축구 역사 저장고를 채우는 일에 동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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