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췌장암 투병 끝에 지난 7일 하늘의 별이 된 유상철 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은 충주의 한 묘지에 9일 묻혔다. 가족 납골묘 형태로 자리 잡은 안식처에는 1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이미 모셔져 있었다. 

팬으로 만나 이후 취재원으로 관계를 이어 온 지난 20년 동안 고인과 생전에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커리어의 중요한 순간 못다 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투혼과 기적의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의 인생을 돌아본다. 

1971년 서울시 응암동에서 출생한 유상철은 모두가 기억하는 이상적인 체격 조건과 달리 어린 시절에는 마르고 허약한 체질이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응암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 생활을 시작했지만 체격이 좀처럼 커지지 않아 고민이었다.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의 성장기에 종종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경신고 재학 시절에 나온다. 고1에서 고2로 넘어가는 시기 160cm의 작은 키로 인해 축구를 중단해야 할 위기에 놓였지만 부모님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충분한 휴식과 영양 섭취를 통해 20cm 이상 키가 자란 것. 고인은 “그때 극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축구를 그만뒀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유수의 명문대 대신 자의로 택한 건국대 입학은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됐다. 대학 축구의 명장이던 故 정종덕 감독은 고교 시절까지 공격수를 주로 보던 유상철을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시켰다. 상대의 경기 상황에 따라 수비와 공격을 오가는 전천후 선수로 성장시킨 것이다. 대학 입학 후에는 키가 더 자라 184cm가 된 그는 고정운, 이상윤, 황선홍 등 선배들이 심어 놓은 개인 운동을 철저히 하는 건국대 축구부 분위기 속에서 강골이 돼 갔다. 

대학 입학 후 두각을 나타내며 드디어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됐고 아시아 선수권 우승을 이끌었지만 시련이 있었다. 세계 청소년 선수권(현 U-20 월드컵)을 앞두고 남북 단일팀이 구성되며 최종 명단에서 배제된 것. 18인 명단을 위해 남북이 조율에 돌입했고, 평양에서 진행된 단일팀 평가전까지 참가했던 유상철은 고배를 마셔야 했다. 3년 뒤에도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1994 미국월드컵 참가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고, 미국 전지훈련까지 다녀왔지만 최종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유상철은 “마지막에 기술적인 부분에서 2% 부족한 것이 늘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며 20대 초반의 잇단 좌절을 스스로 분석했다. 피지컬, 기동력, 골 결정력, 적극성, 넓은 시야가 탁월했지만 패스, 퍼스트 터치의 정교함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맹활약, 세대교체의 선봉에 서며 A매치 124경기 출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상철은 테크닉이 아쉬운 선수’라는 꼬리표는 당시 한국 축구의 편견과 콤플렉스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신인 시절 울산현대에서 그를 지도한 차범근 감독은 일찌감치 “유럽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라고 유상철을 평가했다. 유상철의 기술이 평균 수준이라고 해도 그것을 훨씬 상회하며 커버할 수 있는 다른 능력과 신체 조건을 호평한 것이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유상철을 공수 전환의 키로 활용한 거스 히딩크 감독의 시선도 비슷했다. 

당시 한국 축구는 패스와 기술이 뛰어난 ‘게임메이커(플레이메이커의 일본식 표현)’에 집착했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라이벌 일본이 기술 좋은 선수들을 앞세워 위협해 오는 상황이 더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애틀란타 올림픽을 기점으로 등장한 플레이메이커 윤정환은 언론과 팬덤 상에서 유상철의 대척점에 있었고, 이 관계는 2002 한일월드컵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지도자들의 관점은 달랐다. 팬들이 꿈꾸는 대지를 가르는 패스, 허를 찌르는 테크닉은 현실적인 승리 이론이 아니었다. 강한 상대, 세계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고민할 때 선택지 1번은 기본적인 경합에서 버텨줄 수 있는 유상철이었다.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주전급으로 뛰는 능력을 마다할 이도 없었다. 

이런 강점은 선수 유상철의 전성기에 흥미로운 장면을 낳았다. 소속팀 울산에서는 공격수로 주로 뛰고, 대표팀에 와서는 스토퍼와 윙백을 본 것. 1998년이 가장 극적이었다. 프랑스월드컵에서 유상철은 멕시코전에는 스토퍼, 네덜란드전과 벨기에전은 왼쪽 윙백으로 출전했다. 그리고 월드컵 후 울산으로 복귀해서 20경기에서 14골을 기록하며 득점왕(본인은 당시 고재욱 감독의 신뢰 속에 공격형 미드피더로 프리롤을 봤다고 했다)에 올랐다. K리그에서 세 차례 시즌 베스트11에 올랐는데 1994년에는 수비수, 1998년에는 미드필더, 2002년에는 공격수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히딩크 감독이 한일월드컵 성공을 위해 2000년 12월 지휘봉을 잡으면서 대표팀에서 유상철의 진가가 발휘됐다. 당시 박스 안팎에서의 찬스에서 때린 중거리슛이 골대를 넘어가는 일이 잦자 팬들은 ‘홈런왕’이라는 멸칭을 붙였지만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에게서 유틸리티 플레이어(멀티 플레이어)의 가능성을 찾았다.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1기 시절 그의 페르소나였던 필립 코퀴처럼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상철을 유연한 전술 변화의 축으로 삼은 것이다. 

월드컵 본선 직전까지만 해도 많은 언론과 팬덤에서는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윤정환이 아닌 유상철을 기용하는 것을 놓고 히딩크 감독을 비판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대회에 들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발휘한 유상철의 맹활약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히딩크 감독의 의도를 깨닫는 분위기였다.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1차전을 보면 공격형 미드필더 유상철은 끊임없는 전진 압박(19년 전이니 지금은 익숙한 전방 압박의 개념조차 희미할 때다)으로 폴란드 수비진의 혼란을 일으켰다. 결국 후반 8분 상대의 빌드업을 끊어낸 뒤 밀고 들어가 강력한 슈팅으로 당시 명성을 떨치던 골키퍼 예지 두덱을 뚫고 쐐기골을 터트렸다.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의 가치가 가장 빛난 경기는 16강 이탈리아전이다.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끌려가자 히딩크 감독은 3장의 교체 카드를 모두 공격에 썼다.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가 김태영, 홍명보, 김남일을 대신해 차례로 투입됐는데 유상철을 그때마다 포지션을 바꿔가며 왼쪽 스토퍼, 센터백(중간에 잠시 포백으로 전환), 스위퍼로 3단 변신을 했다. 유상철이 없었다면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깨기 위해 모험적인 공격수를 둔 히딩크 감독의 선택도 어려웠을 것이다. 

유상철 하면 잊을 수 없는 키워드는 투혼이다. 그라운드 밖에서는 배려심 깊고, 다정다감했지만 그라운드 안에서는 강한 책임감으로 무장한 투사였다. 그런 기질은 한국 축구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유상철이 등장해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장면을 만들었다. 멕시코, 네덜란드를 상대로 대패하며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뒤 치른 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에서 멋진 동점골로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세운 장면이 대표적이다.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도 유명하다. 전반 36분 헤딩 경합 과정에서 보르게티와 부딪혀 코뼈가 골절된 가운데서도 교체를 거부하며 출전을 강행했다. 결국 후반 추가시간 직전 부러진 코뼈에도 머리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유상철은 “전반이 끝나고 히딩크 감독님이 교체를 지시했다. 박항서 당시 코치님과 함께 감독님에게 가서 계속 출전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프랑스전 대패로 위기를 맞았는데 뭐라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프랑스에게 0-5 완패를 당한 뒤라 히딩크호에 대한 신뢰가 급하락 하던 때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의 활약도 인상적이었다. 소속팀이던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을 퇴단하고 유럽 진출을 노렸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에이전트의 유럽 축구 협상 채널, 능력이 부족했던 터라 결국 무적 신분이 됐다. 9월에야 친정팀 울산과 단기 계약을 맺고 국내로 복귀한 그는 “매 경기 득점하겠다”고 각오하고 남은 8경기에서 9골을 터트리는 폭발력으로 팀의 8연승을 이끌었다. 울산은 성남과의 우승 경쟁에서 2점 차로 밀리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2002년 당시 유상철의 엄청난 기량을 증명한 일화다.

그런 책임감과 투혼은 지도자가 돼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경력이 된 인천 사령탑으로서 보여준 기적의 드라마는 유상철이라는 투사의 이미지를 다시 각인시켰다. 췌장암이 발견된 뒤에도 감독직을 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발휘했고, 인천 구단은 주치의 진단과 소견을 이중삼중으로 확인한 끝에 치료와 사령탑 수행을 동시에 이어나가기로 했다. 유상철 감독의 병환이 알려지고 5경기에서 인천은 2승 2무 1패를 기록, 극적인 잔류 드라마를 또 한번 썼다. 

당시 경남과의 최종전을 앞두고 원정팀 감독 대기실에서 유상철 감독을 따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밖에서 팀 잔류를 내 건강과 맞바꾸느냐고 하지만, 그냥 치료를 위해 팀을 떠났다면 오히려 병세가 심해졌을 것 같다.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 있는 게 내 입장에서 가장 좋은 치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췌장암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얘기까지 돌았지만 유상철 감독은 강력한 생의 의지로 이겨 나가며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으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던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한 스포츠브랜드에서 모델로 함께 하고 싶다고 해 연결하는 과정에서였다. 혼자 운전도 하고, 골프도 즐기고 있다던 그는 복귀를 약속했지만, 병마는 결국 그를 하늘 위 그라운드로 데려갔다. 고인이 묻힌 묘비에는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 귀천(歸天)의 유명한 구절이 새겨졌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 하리라.’ 

축구인 유상철로 인해 웃고 울었던 시간이야말로 정녕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시간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불굴의 투혼과 환한 웃음으로 한국 축구 절망의 순간에 늘 희망을 가져다줬던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겠다고 약속한다.

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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