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K리그에 올해의 부활상, 혹은 올해의 재기상이 있다면 2012년의 수상자는 이미 김형범으로 확정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3년 간 자신을 괴롭힌 무릎부상에서 탈출한 김형범은 임대 신분으로 뛰고 있는 대전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예전의 날카로움을 되찾고 있다. 벨기에 출신 외국인 공격수 케빈과 위력적인 콤비 플레이로 대전의 강등권 탈출을 이끌고 있는 그를 풋볼리스트가 만났다.

Q. 대전으로 임대 와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축구인생의 전환점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었는데?
김형범: 작년 8월에 무릎에 또 물이 차고 통증이 생겼다. 같이 훈련을 할 수 없어서 전북에서 나와 따로 재활을 해야 했다. 병원에 가서 또 수술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기로에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재활을 하고 겨우 복귀를 했는데 3-4개월 만에 또 다시 부상을 겪으면서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에 대해 고뇌하고 있을 무렵에 유상철 감독님의 연락을 받았다. “천천히 몸을 만들어서 대전이라는 팀에 도움이 될 생각은 없느냐”고 물으셨다. 여러 고민 끝에 수술을 안하고 재활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에이전트를 통해 전북 구단에 임대를 통해 다시 일어설 기회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전북 팬들을 비롯해 내가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분들께 예전의 경기력을 보여주기 위한 터닝포인트가 필요할 것 같다. 그 요청을 전북 구단, 최강희 감독님, 이흥실 감독님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도와주셔서 이렇게 대전에 올 수 있었다.

Q. 솔직히 말해서 대전은 선수가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나 환경이 K리그 최하위다. 전북과 비교하면 큰 격차인데 각오하고 있었나?
김형범: 대전의 여러 환경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전북에서 세 시즌을 허무하게 보내니까 욕심이 없어졌다. 대전에 오면서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여러 선수들을 통해서 대전의 상황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유상철 감독님도 그 부분은 감수를 해달라고 얘기하셨다. 불편함이란 그런 거라 생각한다. 호텔에서 자도 불편할 때가 있지만 다리 밑에서 자도 편안할 때가 있다.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 대전도 내년에 클럽하우스가 완공되면 좋아질 것이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운동에 대한 순수할 열정을 가진 좋은 후배 선수들이 훈련장에서 밝게 뛰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축구에 대한 즐거움을 되찾았다.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할까? 몸은 축구 선수로서 중년을 지나가고 있지만 마음가짐이나 생각은 프로에 처음 왔을 때의 상태다.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팀에 공헌하려고 한다. 전북에 있을 때는 전체적인 경기 스케줄을 보고 나갔고 내 몸 상태를 조절했던 적이 많았다. 쉬어야겠다는 타이밍을 스스로 가졌다. 하지만 대전에서는 매경기가 결승전이다. 모든 걸 쏟아 부어야 승리할 수 있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대전 홈 관중들도 점점 늘고 있고 선수들도 자신감이 올라와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몸은 힘들지만, 보람이 크다. 3년 만에 축구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행복감이 든다.

Q. 개막을 앞두고 부상을 입었다. 그때가 김형범의 부활 드라마의 가장 큰 고비가 아니었나싶다.
김형범: 멕시코에서 1차 전지훈련을 잘 치르고 돌아와 제주도로 2차 전지훈련을 갔다. 그런데 3일 만에 연습경기 중 상대 선수에 의해 발목이 눌려서 부상을 입었다. 시즌이 시작되기 3주 전에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 당시에 코칭스태프와 구단에서 우려가 컸을 거다. 유상철 감독님은 “시즌 전 액땜이라 생각하자”고 했지만 경기 못 나가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자초지종을 모르고 “김형범은 또 부상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개막하고 3경기 동안 출전을 못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대전에서도 또 같은 상황인가 하는 생각에 복귀를 서둘렀다. 당연히 몸 상태가 안 좋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감독님이 출전 시간을 조절해줬다. 경기력이 안 나와도 조금씩 경기를 뛰면서 체력과 경기 감각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복귀 초기에는 경기력이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나오지 않았다. 10분에서 15분 정도 소화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20분, 30분 점점 늘려갔고 네, 다섯 번째 경기부터 슬슬 감이 왔고. 그 시기에 대전이 1승(상주 원정)을 어렵게 했다. 그 뒤 다시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수원전에 몸 상태가 80% 정도로 올라왔다. 그 경기에 풀타임을 뛰긴 했지만 사실 그럴 상태는 아니었다. 경기가 끝나고 양 다리에 쥐가 왔을 정도다. 정말 간절히 이기고 싶어서 그래도 참고 뛰었다. 지금도 매 경기 풀타임을 뛸 몸은 아니다.


Q. 수원전에 왜 그렇게 간절히 이기고 싶었나?
김형범: 솔직히 그 당시 내 머리 속에는 희열이나 승리의 기쁨은 크게 없었다. 오로지 유상철 감독님 생각뿐이었다. 당시 경질설이 있었다. 그 경기가 잘못되면 감독님과 남은 시즌을 갈 수 없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내 몸 상태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고, 나를 잘 아는 감독님과 해야 나도 살 수 있단 걸 알았다. 수원전을 승리해야만 감독님을 구할 수 있었다. 마침 그때 수원이 선두를 달리고 있어 더 주목 받은 승리였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니까 그 전까지 받았던 스트레스와 마음 속으로 감독님이 경질될까 싶어 마음 졸렸던 게 한 순간 터져 나왔다. 경기가 끝나고 내 입에서 “살았다”라는 얘기가 먼저 튀어나왔다.

프로 선수는 자신을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팬들을 위해서 승리도 해야 하고, 멋진 공격 축구도 해야 한다. 그런데 수원전 때는 그런 마음가짐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감독님 하나로 머리 속이 채워졌다. 수원전 앞두고 선수단 회식을 가졌다. 웃고 즐기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수원전이 감독님과 하는 마지막 경기일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회식 때 이상한 느낌이 왔다. 혹시 이게 감독님과 우리의 마지막 자리가 아닐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선수들과 웃는 감독님의 속마음을 알기에 그 자리가 슬펐다.

가장 힘든 시기에 제일 어려운 상대를 만나서 10명으로 싸우는 고전을 했다. 모든 악재가 겹친 경기였지만 우리는 후반 종료 직전에 골을 넣으며 승리를 만들었고 드라마의 마지막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그날의 투혼과 집중력은 내 생애 잊지 못할 것이다.

Q. 아직도 풀타임 출전이 힘들다면 어떤 식으로 몸 상태를 조절하나?
부상으로 인해 쉰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몸 상태가 80%에서 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게 쉽지가 않다. 가장 좋을 때가 한참 때의 90% 수준인 거 같다. 양쪽 무릎에 두번씩, 총 네번 수술을 했다. 몸 상태를 빨리 끌어올리기 위해서 조금 무리하게 가동하면 바로 무릎에 이상이 온다. 천천히 편안하게 하려고 하니까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너무 힘들다. 유상철 감독님은 전반이 끝나고 후반이 시작되면 10분 단위로 내 몸 상태를 체크한다. 벤치에서 더 뛸 수 있겠냐는 신호로 계속 묻는다. 시합 전에도 선발일지, 교체일지 어떤 형식으로 출전할 것인가를 얘기한다. 휴식을 위한 텀이 짧은 주중-주말 연속 경기는 확실히 조절한다. 예를 들어 주말에 뛰었으면 주중에는 교체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아예 쉰다. 그런 배려들이 있기 때문에 몸 상태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유상철 감독님도 현역 시절 무릎으로 고생해서 그런지 나를 잘 이해해준다.

Q. 김형범이 부활했음을 만천하에 알린 장면은 성남 원정에서의 골인 것 같다. 어떻게 차면 그런 궤적이 나오나?
김형범: 나와 같이 훈련을 해 본 선수들은 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고, 그런 구질의 공을 훈련 중에도 종종 찬다. 처음 대전에 있는 선수들은 그걸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나만의 요령이 있다. 특별한 무기인 셈이다. 그 위치에서 반대 포스트로 그렇게 감겨서 훅 떨어지는 건 일반적인 킥 방법은 아니다. 무회전은 아닌데 그런 성격처럼 공이 궤적을 그린다. 인프론트 킥으로 아웃프론트처럼 휘게 만드는 거다. 희한한 논리인데 그냥 아웃프론트로는 그런 속도와 힘이 안 나온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근육의 성질, 어렸을 때부터 그걸 차기 위해 수천번을 찬 노력이 더해져 여러 가지 구질의 슈팅이 나온다. 훈련장에서도 이런 방식, 저런 방식을 생각해 보고 많이 찬다. 중거리슛을 좋아하는데 때릴 기회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성남전에 그런 골이 나와서 상대 수비수들이 정말 중거리슛을 허용 안 하려고 밀착 마크한다.


Q. 케빈과의 콤비네이션이 굉장히 좋다. 베컴과 판 니스텔로이를 보는 것 같다고 하는데?
김형범: 솔직히 얘기하면 초반에는 케빈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언어로 통하지가 않으니까 경기장 위의 긴박한 상황에서 얘기하기 어렵다. 그렇게 경기가 지나갔고 초반엔 서로 좋은 장면을 만들지 못했다. 나는 케빈이 골을 넣게 도와줘야 하는 선수지만 내가 생각하는, 원하는 방향대로 케빈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패스를 살릴 수 없다. 어느 날 경기가 끝나자마자 케빈과 따로 면담을 요청했다. 그 경기를 찍은 비디오를 틀어 놓고 케빈에게 “내가 크로스를 올리는 시점에 이렇게 움직여달라”고 했다. 그 전엔 한번도 나누지 않은 세밀한 대화였다. 케빈도 프로 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기분이 상할 수 있겠지만 당시 무득점이라 본인도 수긍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수원전 첫 골이었다. 내 크로스를 케빈이 헤딩으로 연결했는데 좋은 움직임과 크로스가 만나면 공격수 한명이 상대 수비수 네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 타이밍과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요구했고 케빈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에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좋은 장면이 많이 나온다. 케빈은 팀을 위해 희생하려는 플레이가 많은 좋은 선수다. 한편으로는 그 친구도 성격이 강해서 지면 화낸다. 하지만 훈련 때는 서로 잘 어울린다. 계속 케빈에게 득점 기회를 주고 싶다.

Q. 대전까지 전북 유니폼 갖고 와 응원해주는 열성 팬들이 많다.
김형범: 고마울 뿐이다. 전북에서 6년을 있었는데 그 중 제대로 뛴 시즌은 세 시즌 뿐이다. 기다려주신 팬들, 늘 한결같이 응원해주시는 팬들 생각하면 그 분들 때문에라도 포기할 수 없다. “녹색 유니폼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떻게든 운동장에서라도 보고 싶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고 더 힘을 냈다. 지금 부활 아닌 부활이라고 하는데 그걸 긴 시간 기다려주신 전북 팬들 앞에서 하지 못해 죄송하다. 유니폼이 녹색이든, 자주색이든 김형범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잘됐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해주시니까 항상 고맙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진 모르겠지만 그 분들께는 꼭 갚아야 할 빚과 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Q. 올 시즌이 끝나고 다시 전북으로 돌아갈 것인지, 대전에 남을 것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김형범: 요즘 대전 팬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대전에 계속 남을 수 없느냐’이다. 대전에 온 건 내 선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전북에서 완전 이적은 안되고 임대로만 가는 걸로 승인해줬다. 1년 임대를 마쳐도 아직 전북과 계약이 더 남아 있다. 대전에서 완전이적을 요청할 수도 있을 거고, 전북이 그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 내 미래는 이제 내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구단 간의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를 지을 거고 나는 그 결정에 따라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할 뿐이다. 대전에게도, 전북에게도 너무 고맙다. 둘 다 소중한 존재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한 가지만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다. 전북과 대전이 아닌 어떤 팀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두 팀 안에서 미래를 그리고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다.

Q. 좋은 활약을 보이니까 대표팀 얘기도 나온다. 최강희 감독이 누구보다 잘 아는 선수니까 얘기가 있을 수 있는데?
김형범: 대표팀은 2008년에 잠깐 들어가서 맛을 봤다. 그 맛을 보면 대표팀에 욕심이 안 나는 선수가 없을 거다. 태극마크는 축구 선수에겐 명예스러운 일이다. 최강희 감독님은 나에 대해 너무 잘 아신다. 많은 분들이 잘 아니까 김형범을 불러주지 않을까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다른 말로 단점도 너무 잘 아신다는 얘기다. 나를 좋은 제자로 생각하는 것과는 별도로 내 단점이 보완되지 않으면 감독님이 부를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표팀은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자리가 아니다. 내 경기력, 그리고 전북 시절부터 감독님이 얘기해주신 단점이 개선되지 않으면 절대 안 불러주실 거다. 최강희 감독님께 고마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건 전북의 최강희 감독님에 대한 감사다. 대표팀의 최강희 감독님은 좋은 대표팀을 만들기 위해 냉정히 판단하실 거다. 지금 대표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안하고 있다. 몸 상태가 지금 100%가 아니다. 내 위치가 중요하다. 대전이 중위권으로 갈 수 있게 만드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


Q. 최강희 감독이 얘기한 단점이 뭔지 공개할 수 있나?
김형범: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언제까지 상대 선수와 부딪히고 부상 당할 거냐고 지적하신다. 내 경기를 보면서 감독님이 부상 걱정에 움찔한 적이 많다. 자주 언급해 준 선수가 라이언 긱스다. 90분을 뛰면서 한번을 넘어지지 않고, 수비수랑 부딪히지 않고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주는 선수다. 그러니까 그 나이에 1년에 40경기 이상을 해도 부상 없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다. 스타일 자체가 경합을 안하고, 부상 당할 장면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다. 긱스처럼 축구하라고 얘기하신다.

Q. 언젠가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김형범: 많은 분들이 살이 빠졌다고 말씀하신다. 얼굴이 휑해 보인다나. 그 뒤로 수염을 길러봤다. 오주포 코치님이 “김형범, 면도 안 할 거냐”고 자주 지적하시는데 이젠 내 컨셉이랄까? 시련 당한 사람, 뭔가 재기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 보면 덥수룩하고 그런 이미지 있잖나? 그래서 특별히 관리를 안하고 그냥 놔두는 거다. 다른 걸 생각할 게 많으니까. 집에서도 면도 좀 하라고 하는데…(웃음)

Q. 대전이 트로피에 목 마르다. 리그는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FA컵이라면 가능할 수 있는데? FA컵 우승하고 면도하면 어떤가?
김형범: 그렇다면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을 딸 수 있다는 건데… 대전 팬들이 즐거워할 거 같다. 이번에 트위터를 통해 이벤트도 몇 번 했고. 팬들이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팬들과의 소통하다 보면 여러 유형이 있다. 축구를 지적하는 팬, 마냥 응원해주는 팬. 그 팬들에게 수염이 아닌 뭔들 못 바칠까? FA컵 우승은 리그에서 쳐진 팀들이 많이 노리는 대회이긴 한데,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 같다. 전북에서 단기전 경험이 많다. 최강희 감독님이 특히 단기전에 강한데 나도 그 요령을 많이 배웠다. 당장 눈 앞에 있는 경기만 생각해서 신경 못 썼는데 우승 한번 노려보겠다.


Q. 마치 도인이 된 거 같다. 세상에 달관한 사람처럼 얘기한다.
김형범: 이젠 많은 짐을 내려놨으니까… 아플 때 그라운드에 서서 축구화를 신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항상 상상했다. 지금 잘한다고 하지만 과거만큼 잘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그래도 팬들이 기다리는데 은퇴하기 전에 제대로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이라도 보여드려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2011년 초에 후배인 (최)철순이와 식사를 하다가 우연찮게 심영성 선수를 만났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첫 만남이었는데 영성이가 그런 얘기를 했다. “형은 저한테 정말 큰 희망이었어요. 지금 제가 사고로 무릎이 안 좋은데 형은 그렇게 수술을 많이 하고도 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어요”라고. 그 얘길 듣고 영성이 무릎을 봤는데 정말 난도질을 해놨더라. 내가 뭔데 그 친구에게 희망씩이나 되겠나. 그 뒤에 영성이도 그라운드로 복귀했는데 정말 내 일처럼 기뻤다. 영성이를 보면서 날 채찍질했다. 혹시나 했던 나약한 생각들을 접고 다시 뛸 수 있었다.

Q.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선수가 된 거 같다.
김형범: (신)영록이도 기적적으로 그라운드에 돌아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올스타전이 끝난 뒤에는 부산 정민형 선수의 소식도 들었다. 일면식도 없지만 그 선수가 프로에 오기까지 어떤 시련을 겪으면서 왔을지 알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하늘에 가서는 편히 쉬었으면 한다. 부상이 반복돼 재활로 인한 고통이 컸다고 하던데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알겠더라. 부상 당할 때마다 선수는 죽을 것 같은 고통 앞에 선다. 자다가도 다치는 꿈을 꾼다. 경기를 잘하다가 실려 나오는 꿈, 수술대에 눕는 꿈을 꾸면 자다가도 식은 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난다. 병실에 누워서 걷지도 못하는 내 다리를 보면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그 친구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다른 큰 목표는 없다. 매 경기 결승전처럼, 마지막 경기처럼 준비하고 있다. 또 한가지 달라진 점은 프로 선수로서 첫번째로 가져야 하는 의식, 멋지게 이겨야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다. 내가 골을 많이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팀과 팬들을 생각하는 경기를 하자. 그게 프로 선수로서의 첫 번째 의식이다. 경기를 1-0, 2-0으로 이겨도 팬들이 재미 없어하고 손가락질 하는, 소위 말하는 침대축구 같은 경기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팬들을 위한 경기를 하면 당연히 그들이 박수 쳐준다. 지더라도 박수 받는 축구, 그런 축구를 하는 선수 김형범이 되는 게 내 목표다.

인터뷰=서호정
사진=대전시티즌, 서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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