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게 됩니다. 공식이 지배하는 수학의 세계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현실 세계에서 논리라는 단어가 설 곳은 그다지 넓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 거창하게는 한 사람의 꿈이라던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서부터 가깝게는 어떤 영화에 이끌리는 이유까지, 인과관계를 따질 수 없는 것 투성이죠. 제가 2003년 어느 날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고 또 좋아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 포스티노(Il postino)는 제목 그대로 우편 배달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작은 칠레의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작품이죠. 두 작품의 차이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책은 칠레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가 배경이고 영화는 이탈리아 카프리 섬으로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은 마리오 히메네스, 영화의 주인공은 마리오 루오뽈로라는 것만 언급하려 합니다.

마리오와 칠레의 대 시인 네루다의 만남은 저와 영화의 만남처럼 우연히, 조금은 우습게 일어납니다. 섬에 살면서도 어부가 되기 싫은 마리오는 아버지의 근심거리로 살아갑니다. 이때 네루다가 카프리로 망명을 오면서 전속 우편배달부가 필요하게 되고, 마리오가 이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하지만 마리오의 관심은 네루다의 명성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에 끌렸을 뿐이죠.


시작의 동기나 모습은 종종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 자체가 의미가 될 뿐이죠. 두 사람의 만남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네루다가 ‘은유’로 건조한 마리오의 삶을 바꿔놓은 거죠. 물론 마리오도 좋은 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아트리체 루소에게 마음을 빼앗긴 뒤 “선생님 사랑에 빠졌어요. 낫고 싶지는 않아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라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남겼으니까요. 변화는 한쪽의 힘으로만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후 마리오는 네루다의 지도아래 그야말로 시적인 표현을 줄줄 쏟아냅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랄 정도죠. 네루다가 떠난 이후에는 극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언젠가 네루다가 질문한 카프리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면서 아름다움과 시에 대해 가슴으로 느끼게 되죠. 그는 “선생님이 아름다움을 다 가지고 떠난 줄 알았지만, 아니었어요”라며 새삼 고향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일종의 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위에 부딪히는 작은 파도, 큰 파도 그리고 절벽 위에 부는 바람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 파블리토(네루다의 이름을 따서 지음)의 심장소리까지. 이 장면에서 비춰지는 카프리는 마리오는 물론이고 관객까지 감동시킬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넘실대며 속삭이는 바다와 바람과 유연하게 손을 잡은 절벽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음영으로 만들어버리는 햇살까지. 눈이 아닌 가슴으로 스며든다고 표현해도 될까요.


그런데 글을 쓰기 위해 카프리를 여행할 때 찍은 사진을 뒤적이면서 조금 놀랐습니다. 저도 네루다를 만나기 전에 마리오와 같았다고 할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카프리를 찾았던 거죠. 영화를 보고 마리오가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면서 터덜터덜 걷던 해변을 찾겠다는 의지를 가졌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저의 렌즈는 관광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름 여행을 즐길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구경꾼에 불과했던 겁니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구경꾼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은 찾는 자의 몫이라는 거죠. 그는 “의지가 있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죠. 그리고 그 방편으로 시를 가르칩니다. 마리오는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시로 베아트리체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네루다에 바치는 헌시를 들고 이탈리아 사회당 집회에 나서기도 합니다. 물론 마리오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시도 읽지 못하고 압사를 당합니다. 진압에 놀란 군중에 밟혀서 말이죠.

시 한 번 제대로 읽지 못하고 죽은 마리오가 조금 불쌍해 보이고, 의미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리오는 구경꾼에서 참여자가 됐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씩은 갈림길에 섭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삶이 가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오처럼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구경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죠. 물론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화는 파블로 네루다의 유명한 시 ‘시(詩)’로 끝을 맺습니다. 마리오는 시가 찾아왔을 때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어렴풋이 첫 줄을 썼다’고 말해주는 걸까요? 아니면 같이 첫 줄을 쓰자고 말하는 걸까요?

덧) 카프리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섬입니다. 방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폴리에서 배를 타는 방법이죠. 40~50분이면 카프리와 만날 수 있습니다. 섬 내 교통수단은 작은 버스입니다. 절벽 쪽 창가에 앉으시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카프리에는 이탈리아의 자랑 푸른 동굴도 있습니다. 여긴 다 아시죠?

글 = 류청 기자
사진= 류청 기자 / 영화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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