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가짜 9번(False 9)’

럽의 축구 저널리스트들이 즐겨 쓰는 'False 9(이하 '가짜 9번')'라는 용어는 이른바 ‘제로 톱(0 Top)’ 전술과 통한다. 그러나 둘 간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모든 '가짜 9번'은 제로 톱과 함께 쓰이지만, 모든 '제로 톱'에 쓰이는 '가짜 9번'의 역할과 임무는 각기 다르다. 즉, '가짜 9번'은 이전의 특정 포지션을 지칭하던 어떤 용어와도 다른 것이다. 이 단어는 '9번' 선수를 빼고 그 대신에 투입되는 선수를 말하는 용어이자, 해당 제로 톱 전술의 방향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징표와도 같다.

'짜 9번'을 살피려면, 우선 9번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 '9번'은 센터 포워드를 일컫는 대명사나 마찬가지다. 그 연원은 축구계에 '등번호' 제도가 도입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모든 선수들은 유니폼 등판에 번호를 달고 다닌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물론, 유니폼 역시 처음부터 맞춰 입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 드려서 미안하다.)

록에 따르면, 축구에서 등번호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28년이다. 아스널과 셰필드 웬즈데이의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공식 경기에서 등번호를 짊어지고 뛴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당시만해도 선수들은 고유 번호를 갖고 있지 않았다. 등번호는 무조건 1번부터 11번까지였고, 선수들은 자신이 맡은 포지션에 따라 매 경기 다른 번호를 받았다. 벤치 워머들은 그 뒷 번호를 차례대로 배정받았다. 지금처럼 포지션 파괴나 전술 이동이 활발하지 않던 시기여서, 대개의 선수들은 경기 내내 자기 위치 중심으로 움직였고, 그래서 포지션에 따른 등번호 배분은 합당한 조치였다.

후, 전술의 변화와 함께 포지션과 번호가 일치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수비수의 숫자가 늘었고, 공격수의 수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선발진 11명이 1번부터 11번까지 나눠갖는 방식은 변치 않았고, 최전방 센터 포워드의 번호는 늘 9번이었다. 참고로, 국제 대회에서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등번호 제도가 도입됐다. 등번호 착용이 자유롭게 바뀐 것은 1993년이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프리미어리그 도입으로 팬들의 관심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선수들이 포지션에 상관없이 개별 번호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팬들이 선수와 등번호를 동일시하게 하고, 또 등번호 위에 이름을 넣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고정 번호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9번’은 여전히 공격수의 상징으로 불린다. (같은 이유로, ‘10번’은 이른바 ‘트레콰티스타’ 혹은 플레이메이커 등의 상징으로 통한다.) 따라서, ‘가짜 9번’이 지칭하는 것은, 9번 자리(센터 포워드)에 기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가 된다.

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가짜 9번’을 채용한 ‘제로 톱’ 전술은, 지난 몇 년간 유럽 축구 전술에서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이론이다. 미드필더에서의 싸움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각 팀들이 최전방 공격수의 숫자를 3명에서 2명, 2명에서 1명으로 줄이던 흐름이 극대화된 전술이다. 원톱에 양쪽 윙을 내세운 뒤,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을 배치하던 21세기 초반의 축구는 클로드 마케렐레 같은 선수가 맡던, 이전까지 철저히 커튼 뒤에 가려져 있던 역할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이 과정에서 중원 싸움이 격렬해졌고, 각 팀들은 최근 유행하는 4-2-3-1 전형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중원에서 경쟁력을 가진 팀들은 과감히 최전방 공격수를 없애고 허리에 방점을 찍는 극단적 포맷을 강구하게 된다.

트 위에서만 가능할 것 같던 이 ‘제로 톱’ 전술을 본격적으로 실제 경기장 위에 구현한 것은 6년전 AS로마를 이끌던 전술가,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이다. 당시 로마는, 이전까지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플레이메이커로 정상에 올랐던 토티를 맨 앞에 내세우는 4-6-0 전술로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다. 스팔레티에 의해 메이저 무대에서 실용화된 ‘제로 톱’ 전술은, 골을 넣는 데에 전력을 다하던 전형적인 스트라이커의 쓰임새를 없앤 것이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토티’로 대표되는 빼어난 공격력을 갖춘 미드필더의 존재가 절실했다. 로마가 안착시킨 이 제로톱 전술은, 그러나 로마가 퍼거슨 감독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1-7로 대패한 2006/07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전을 끝으로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법을 제시한 것은 로마를 대파한 맨유였다. 판 니스텔로이를 내보낸 뒤 투톱 전략에 고심하던 맨유의 퍼거슨 감독은 이듬해 테베스와 루니, 호날두를 번갈아 최전방에 기용하며 새로운 형태의 공격 라인업을 구축한다.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 이 시즌 내내, 맨유는 이전까지 센터 포워드 역할을 하던 판 니스텔로이, 루이 사하와 같은 스타일의 선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캐릭, 스콜스 등의 앞에서 박지성, 긱스, 호날두, 루니, 테베스 등이 빠른 패스와 직관적인 돌파로 상대 문전을 허물었다. 이른바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를 늘 한 명씩 내세우던 퍼거슨 감독의 축구는 이 시기부터 호날두, 루니, 테베스 등이 맨유식 ‘가짜 9번’의 역할을 맡아 골을 나눠 넣게 된다. 이후 영입된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가 맨유에 자리를 잡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9번의 움직임’과 ‘가짜 9번의 마인드’ 사이에서 부유하던 베르바토프는, ‘가짜 9번’의 매력에 빠진 퍼거슨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전통적 9번’에 가까운 치차리토에게마저 자리를 내줬다.

지만, ‘가짜 9번’ 역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부터다. 스스로 최고의 공격수이면서 경기 내내 미드필드 지역에서 움직이던 메시의 플레이는 이전의 포지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역할의 발견이었다. 어찌보면 전술 파괴적으로 보일 메시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그러나 그의 등 뒤에 선 사상 최고의 미드필더들을 만나 바르셀로나 전성 시대에 화룡점정이 된다. (역시 빼어난 기량을 가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바르셀로나에서 무난한 성과를 거두거도 팀을 떠나야 했던 것은, 어떤 면에서 맨유의 베르바토프와 닮은 구석이 있다.)

전술은 늘 진화하고, 축구장 위에는 늘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다. 지난 수 년 간 유럽 축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가짜 9번'의 존재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정형의 끊임없는 창조성이야말로 축구의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글 = 서형욱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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