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2015 시즌 K리그 챌린지를 대표하는 중거리슛 달인 겸 플레이메이커는 조원희(서울이랜드FC)다. 잘못 쓴게 아니다. 지금 조원희는 동료들을 지휘하고 스스로 공격을 마무리한다. 다른 선수의 수족이 아니라 두뇌로서 움직인다.

타국 선수에 자국 선수를 빗대기 좋아하는 한국에서 가투소라는 별명이 붙는 선수는 머리보다 몸으로, 기술보다 힘으로, 침착함보다 과감함으로 축구한다는 이미지를 갖는다. 마당쇠, 돌쇠, 살림꾼 등의 별명도 패키지로 주어진다. 모두 조원희의 이미지다. 조원희는 한때 국가대표팀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그 전엔 측면 수비수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달라졌다. 보통 노련미가 쌓이면 플레이가 단순해진다고 하지만 조원희는 오히려 32세인 올해 들어서야 어려운 발재간을 부리고, 화려한 궤적의 중거리슛을 골문 구석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조원희의 변화는 그저 K리그 챌린지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조원희를 찾아 어린 시절의 포지션에 대한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최근의 이야기까지 한달음에 쏟아냈다. 가투소가 아닌 조원희 자신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서 없이 진행된 조원희의 이야기를 정리해 전한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이렇게 생긴 얼굴 잘 찍어봤자 뭐해요.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게만 찍어 주세요”라고 했다. 자기 외모에 냉정하듯 자기 실력에도 냉정한 태도가 시종일관 유지됐지만, 조원희는 하나의 선만큼은 지키고 싶어 했다. 최소한 ‘공을 찰 줄 아는 선수’라고 불리고 싶다는 것이 그가 설정한 선이었다. 그것이 조원희의 인정 투쟁이다.

-어렸을 땐 공격수만 했다, 청소년대표팀에서도
프로 데뷔 전까지 늘 공격수였다. 올림픽대표팀만 빼고 웬만한 청소년대표를 다 거쳤는데 모두 공격수였다. 2002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U-19)에서 우승했을 때도, 2003년 세계청소년대회(U-20)도 마찬가지였다. 수비형 미드필더나 측면 수비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내 옆에 어린 시절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증인이 없으니까 내 입으로 “조원희는 원래 공격수였다”고 말해야하지 않나. 프로에서의 내 모습만 본 팬들께선 웃으실 거다.

청소년 대회에서 일본에 지고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 입대하라고 하시길래 갑자기 군대에 갔다. 그때(2003) 상무의 이강조 감독님께서 3-5-2를 쓰니까 오른쪽 백을 보라고 하시더라. 경기를 뛰는게 중요하니까 자신 있는 척 하며 승낙했다. 처음 수비를 봤다. 나는 어렸을 때 공을 잡아야 비로소 수비수를 제치는 스타일이었는데, 성인 선수가 된 뒤 살아남으려다보니 미친 듯이 뛰고 태클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보기엔 축구를 못하는 애가 됐다. 내가 그래도 기본기가 있으니까 수원삼성에서도 뛰고 대표팀에도 가지 않았을까? 다들 조원희는 공을 차는 애가 아니고 상대 공격수를 부수는 애라고 생각하시지만.

-프로에서 수비형 미드필더가 됐다
상무를 제대한 뒤 바로(2005) 수원으로 갔다. 운 좋게 첫 해부터 많이 출전했고, 더 운 좋게 국가대표도 했다. 2008년 K리그에서 우승했고, 그때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유럽 진출이라는 꿈을 이루게 됐다.

수비형 미드필더는 수원에서 처음 봤다. 2007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이관우, 김남일 형이 다쳐서 차범근 감독님께 ‘한번 봐 볼 생각 없냐’는 말씀을 듣고 시작했다. 축구 시작하기 전에 쇼트트랙 선수로 8년 정도 활동한 것이 지구력에 도움이 된 것 같다.
차 감독님과 나중에(2011~2012) 광저우헝다에서 만난 이장수 감독님은 내게 지시하는 바가 비슷하셨다. 우선 수비 임무를 확실히 하라고 하셨다.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공 가는 길목 막고 차단하고, 내가 공을 잡으면 빨리 동료에게 전달해주라는 거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뭐 그런 것들이었다. 공을 잡으면 바로바로 뿌리는 게 나에겐 전부였다. 그래도 축구팬들에게 내 이름 석 자를 알릴 수 있었던 건 ‘많이 뛰는 선수’ 시기였다. 그래서 행복했다.

가끔은 반항심이 생겼다. 멘붕이 오기도 했다. 절 아는 사람들은 ‘조원희가 조원희의 축구를 안 하고 다른 걸 하네?’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어렸을 때 하던 플레이를 조금씩 섞으려 시도해 봤는데 어느새 내가 수비를 덜 하고 있더라. 결국 다시 활동량 위주의 플레이로 돌아갔다. 가장 안타까워하신 건 아버지 어머니셨다. 맨날 골만 넣던 애가 먹고 살겠다고 ‘무식하다’ ‘공 못 찬다’는 소리 듣는 것 보고 속상하셨나보다. 최근엔 내 경기를 보며 청소년 시절 기억을 떠올리시는 것 같다. 좋아하신다.

-EPL에서 공격수로 뛸 수도 있었다
지난 이야기니까 말씀드릴 수 있지만, 사실 위건에서 난 섀도 스트라이커를 봤다. (2009년 2월 위건 이적 후 7월) 프리 시즌에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감독님이 ‘원희 너는 공격 성향이 좋으니까 섀도 스트라이커를 보라’고 하셨다. 전반기에 조금씩 출전 기회를 얻었고 후반기부턴 더 많은 출전시간을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그때 왜 섀도 스트라이커로 자리를 못 잡았냐면, 난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남아공월드컵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 차범근 감독님이 위건에 찾아오셔서 원희를 임대로 데려가겠다고 직접 요청하셨다. 나도 그땐 수원으로 가고 싶었다. 챔피언십(2부)으로 가는게 왜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간다. 위건이 제안하는 팀 다 거절하고 무조건 수원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2010년 1월에 수원으로 임대됐다. 그놈의 향수병이 뭔지. 그런데 오자마자 차범근 감독님이 떠나시고, 조금씩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라.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후회하는게 그때 한국으로 들어온 거다. 마르티네스 감독님이 “남아라, 경기에 내보내서 월드컵도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해주셨다. 거기서도 월드컵 직전에는 대표급 선수를 배려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월드컵 출전을 위해 오히려 위건에 남았어야 했다. 당시 유럽파는 다 데려가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니까 경기력이 안 좋으면 나를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결국 조원희는 2010 남아공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올해 조원희는 기교가 많아졌다
지금은 모든 걸 잘 믹스해서 감독님이 원하는 스타일, 우리 팀에 맞는 축구를 위해 노력 중이다. 수비도 하면서 공격적인 플레이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앞으로 축구를 하면 얼마나 더 하겠나. 하고 싶은 건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하는 노룩패스나 볼키핑 같은 거? 그거 일부러 하는 거 아니다. 그냥 내가 가진 잠재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시즌 시작할 때 마틴 레니 감독과 댄 해리스 코치가 “너희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겠다”고 했다. 정말 나도 모르게 새로운 기술이 나온다. 공을 전진하면서 받는 것도 훈련에서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되는 거다. 빌드업, 위치선정 등을 배우면서 공간 활용 능력이 좀 더 생겼다. 아직도 배우냐고? 물론. 정말 많이 배우고 있다. 축구란 신기할 정도로 호기심이 드는 스포츠다. 이 나이 먹도록 몰랐던 걸 짧은 시간 동안 배웠다. 여기 있는 동안 나도 발전하고 후배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지금은 그런 시간이다.

-작년까지 K리그 193경기 4골, 올해 17경기 4골
골을 넣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마틴이 “원희, 너도 골을 넣어야 한다”라고 선수들이 다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너는 왜 골을 안 넣어? 너도 중거리슛을 때려라.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길 원한다”라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듣고 다음 경기에서 바로 골을 넣은 것이 시작이었다.

요즘엔 공격을 좀 하다보니…, 수비형을 보기가 싫다. (기자 어쩔 수 없는 폭소) 진짜 공격형을 보고 싶은데 신일수(수비형 미드필더 후배)가 부상에서 안 돌아와서 어쩔 수가 없다. 아무튼 또 공격으로 올라가면 재미있는 축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맡은 일이 행복하다. 원래 내가 가진 능력이 10이라면 지금 15를 끌어내고 있다. 은퇴할 때가 다 되어서야 나도 모르고 사람들도 몰랐던 능력이 나오는 중이다.

-그렇게 수비형 미드필더가 싫었다면, 조투소라는 별명은?
마틴에게 항상 감사드린다. 내 별명이 조투소라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가투소처럼 공을 못 차는 선수가 아니다. 네가 더 다재다능하고 패스를 잘 한다. 가투소 말고 다른 스타일의 선수였으면 한다.” 자신감을 심어주려 하신 말씀 같긴 하지만 좋은 이야기였다.

사실 난 가투소라는 별명도 행복하다. 그 별명이라도 있어야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하지. 황지수(포항) 형이 공을 얼마나 잘 차는지 아나? 그 형 별명도 황투소다. 나는 그 형에 비하면 억울할 것이 없다.

가투소 대신 누굴 닮고 싶었냐면…, 고종수 형은 완전 좋아하는 선수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 포지션에 맞게 공격수들을 좋아했다. 외국 골 모음 영상에 나오는 선수들. 개리 리네커를 되게 좋아했고, 마라도나가 골 넣는 것도 많이 봤다.

요즘엔 포그바가 가장 좋다. 그 선수 하는 영상만 보고 있다. 똑같이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너무 자유로운 축구를 하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인다. 하고 싶은 플레이를 마음대로 하지 않나. 혹은 야야 투레의 한창 좋을 때 모습? 그런 모습이 늘 머릿속에 맴돈다.

-훈련 때 제일 시끄러운, 분위기메이커 조원희
내가 제일 긍정적으로 해야 선수들이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난 무표정하기만 해도 화난 것처럼 보인다더라. 그래서 먼저 다가가려고 하는 거다. 후배들에겐 꾸짖음도 칭찬도 아닌,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편이다. 본인의 현실을 받아들이게끔 해 준다. 그것만 스스로 통과한다면 내 모든 걸 바쳐 도와줄 수 있다.

스스로 선배 포지션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경남(2014) 때부터였다. 난 그런 부담감을 갖기 싫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 영광이와 내가 최고참이었다. 난 자신을 잘 안다. 실력으로 후배들을 리드할 만한 선수는 못 된다고 생각한다. 김재성, 김영광, 조원희 중 조원희는 축구장에서 리더가 될 만한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어느 날 답을 찾았다. 축구를 더 잘해야겠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요즘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 내가 축구를 못하면 정말 큰일 나겠는데? 그런 생각이 든 뒤로 더 노력했다.

-경기 중 상대 선수의 어깨를 주무르는 넉살
경기 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노병준(대구FC) 형님이 먼저 “야, 어깨가 너무 아프다. 아야아야”라고 하시더라. 형님이 아프시다는데 주물러드려야지 별 수 있나. 다른 뜻은 없었다.

경기 중 분위기를 내가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언제나 크다. 우리 팀 선수들은 젊기 때문에 잘 들뜬다. 영광이는 골키퍼고 재성이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스타일이라 결국 내가 말을 많이 해야 한다. 평소에도 너무 빨리빨리 할 필요 없다는 말을 많이 해 줬다. 이젠 후배들이 내 말을 이해한 것 같다. 오버페이스가 걸릴 것 같을 때 그러지 말라고 하면 딱딱 알아듣는다. 난 원래 동료를 지휘하는 능력이 없는 선수다. 그래도 이 팀에선 내가 고참이고 중심에서 공을 배급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나이들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어렸을 땐 매순간 100%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템포 늦춰도 될 때 그러지 못했다. 너무 무식하게 운동만 했다. 잘하지는 못하면서 열심히만 했다. 그나마 열심히 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만, 좀 더 영리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너무 많이 해서 늘 탈이었다. 그래서 나처럼 하는 후배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늘 이야기해준다. 후배가 불안해하며 무조건 뭐라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면 나는 ‘형 믿고 한 번 따라 봐라’라고 한다. 그러면 조절할 능력이 생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걸 동생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거다.

사진= 풋볼리스트,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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