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첫 우승, 꾸준한 기회, 뜨거운 성원...행복한 오만 1년

[풋볼리스트] 축구 선수가 되면 전 세계에서 일할 수 있다. 미드필더 김귀현(26)은 이 말을 몸소 증명한 선수 중 한 명이다. 한국 선수들과 인연이 깊지 않은 나라에서 특별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해 대구FC를 거쳐 오만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된 김귀현이 오만 스토리를 전한다. 축구가 아니었다면 평생 접하지 못했을 나라 오만 속으로 김귀현과 함께 가보자. <편집자 주>

내가 뛰고 있는 알나스르SCS는 빈번한 감독 교체 속에 전반기에 잃은 승점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오만에서는 술탄 카부컵이라 불리는 국왕컵 우승에 대한 열망이 컸다. 알나스르SCSC는 10년 동안 국왕컵을 되찾지 못했다.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드라마를 썼다. 리그컵 성격의 마쓰다 컵에서 우승하면서 더블을 이루자는 선수단의 의지, 그리고 팬들의 기대는 커졌다. 국왕컵은 오만에서 리그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회다. 개인적으로도 알이티하드와 32강전에서 오만 입성 후 첫 골맛을 봤기 때문에 의미가 큰 대회이기도 하다. 

팬들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16강전에서 살랄라 더비를 이루고 있는 지역 라이벌 도파르와 대결하면서부터다. 리그 맞대결에서 아쉽게 0-0 무승부를 거둔 터라 16강에서 만나자 잘 됐다는 생각이었다. 언론에서도 국왕컵 16강에 성사된 살랄라 더비에 큰 관심을 보였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우리팀에 대해서 꽤 비중 있게 다뤘다.

#더비전 승리로 시작된 국왕컵 드라마

16강전은 단판전이었기에 더 긴장됐다. 연고지도 같다 보니 양 팀 팬이 모두 경기장을 채웠다. 사실 경기 시작은 좋지 않았다. 내용적으로도 밀렸고, 전반 40분에 프리킥으로 먼저 실점하면서 이대로 탈락하는가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계속해서 밀리다가 전반전을 마쳤고, 라커룸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 뿐 아니라 선수들 모두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는 새로 감독이 바뀌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감독님도 별 말씀은 없으셨다. 선수들끼리 뭉쳤다. 남은 45분 죽어라 해보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 마음이 경기에 투영된 것 같았다. 후반전에는 주도권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한 골을 넣고 지키자는 생각이었는지 도파르가 라이늘 뒤로 내렸다. 우리가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후반 23분경 동점골이 나왔다.

계속 몰아붙였는데 골이 나오지 않았다. 승부차기를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점에 골이 나왔다. 후반 45분이 끝나고, 추가 시간 1분. 마마두가 헤딩으로 역전골을 터트렸다. 지금 생각해도 짜릿할 정도로 대단한 순간이었다. 아마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인 승리였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뒤로는 팬들까지 라커룸으로 들어와 같이 세리머니를 할 정도로 다들 분위기가 뜨거웠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강호 판자였다.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졌지만 원정에 가서 치른 2차전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올랐다. 도파르, 판자 같은 명문팀을 꺾고 4강에 오른 만큼 남은 대진표는 비교적 수월했다. 그 사이 마쓰다컵 우승까지 했기 때문에 우리 팀을 우승 후보로 꼽는 시선이 많았다. 

방심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시즌에 간신히 강등을 피했고, 올 시즌에도 중하위권을 오가던 사함과의 준결승전에서 우리의 경기 내용은 좋지 않았다. 원정 경기로 치른 1차전에서 힘들게 0-0으로 비기고 왔다. 

#사함과의 4강전, 모든 것이 꼬였다

사함은 살랄라에서 4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경기 시간도 너무 일러 더웠다. 일정도 우리에겐 빠듯했다. 사함은 골을 넣을 수 있었던 네 개 정도의 기회를 허비했다. 속된 말로 ‘펐다.’ 질 수 있었던 경기를 비기고 왔다는 점에서, 홈에서 2차전이 남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행운이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준결승 2차전을 앞두고 흐름이 좋지 않았다. 2차전을 4일 앞으로 리그 일정에는 도파르와의 더비 경기가 있었다. 다들 더비보다 국왕컵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한 시즌을 치르는 과정에는 흐름이 중요하다. 도파르에게 1-2로 지면서 전체적으로 꼬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도파르전에는 갑작스런 전술 변화로 선수단도 크게 혼란을 느꼈다. 나를 비롯해 미드필드진에 수비형 선수만 네 명을 배치하면서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 선수들도 경기를 마치고는 라커룸에서 완전히 퍼졌다. 구단주까지 라커룸에 들어와 전술적 의견 차이로 언성을 높일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아 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 국왕컵 2차전이 열렸다. 사실 우리 팀은 경기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는 팬들이 오지 않는데 이 경기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굉장히 많은 팬들이 와 주셨다. 경기장에 입장하는 데 팬들만 봐도 힘이 났다. 즐겁게 뛰었고, 경기 시작부터 상대를 밀어 붙였다.

경기는 주도했는데 효율이 떨어졌다. 볼 소유로 보면 우리가 압도적이었지만, 정작 결정적인 기회는 만들지 못했다. 문제는 경기 시작 15분 만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고 있는 압둘라가 발목 부상으로 빠져 나간 데서 시작했다. 우리 팀 공격에 중요한 선수가 빠지다 보니 마무리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전반전을 잘 버틴 사함은 후반전에 작정하고 역습 작전을 폈다. 후반에도 우리가 볼을 오래 쥐고 있었지만 상대 밀집 수비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많은 기회는 주지 않고 있었는데 후반 42분에쯤 내준 프리킥이 화근이 됐다. 알칼디가 찬 프리킥이 그대로 골이 되면서 0-1로 졌다. 애초에 한 골 싸움으로 봤다. 그 골이 들어가면서 우리 선수들은 힘을 잃었다.

#우승컵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우승에 대한 생각이 컸던 만큼 실망감도 컸다. 경기를 마친 뒤 라커룸은 고요했다. 구단주는 선수들을 격려하려 왔다. 다들 고생했다. 수고했다고 말하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이국의 말이었지만 진심이 전해졌다. 그 역시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다음 날 감독님은 경질됐다. 

아쉬워할 사이 없이 무스카트에서 열릴 리그 원정 경기를 위해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24일에 홈 경기로 리그 최종전을 치렀다. 인연이라는 게 신기하다. 리그 최종전 상대가 국왕컵 준결승에서 우리를 떨어트린 사함이었다. 꼭 복수에 성공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각오가 있었다.

우승권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결과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이기고 끝내자는 마음은 선수들 모두 같았다. 결국 3-2로 이겼고, 기분 좋게 올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컵대회를 병행하면서, 마쓰다컵은 우승, 국왕컵은 4강까지 갔기 때문에 3~4일에 한번 꼴로 경기를 치렀다. 불안한 마음으로 도착했지만 9개월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국왕컵을 놓친 것은 아쉬웠지만, 한 시즌을 큰 부상 없이 마쳤고, 매번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행복했다. 내겐 정말 즐거웠던 1년으로 기억될 것이다. 프로 첫 우승이라는 영광도 있었지만, 행복이 꼭 성적 순인 것은 아니다. 축구 선수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보낸 1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오만에 나를 사랑해주시는 많은 팬들이 생긴 것도 감동이었다. 오만 팬들이 직접 만든 태극기를 들고 응원해준 것도 우승 메달 못지 않게 영광스러운 훈장이다. 거리에서 많은 분들이 마주치면 알아봐 주셨고, 환영해 주셨다. 이겨 달라고 응원해 주셨다. 정말 큰 사랑을 받았다. 오만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우연치 않게 닿게 된 오만은 내게 기회와 약속의 땅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오만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일을 겪은 것처럼, 미래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내 축구 인생이 어떻게 그려질지, 나 자신도 기대되고 설렌다. 오만은 오만하지 않았고, 나도 오만해 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보통 선수인 내 이야기를 이렇게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한 일이다. 보내주신 큰 사랑에 감사드린다.

슈크란(Shukran, 감사합니다)!

 

 
구술=김귀현
정리=한준 기자
사진=김귀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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