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노토리어스BIG의 를 패러디한 앤트맨 만화 커버

<앤트맨>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할 말은 없다. <아이언맨 3>부터 <앤트맨>까지 이어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2기 영화들은 종종 예술 작품이라기보다 뛰어난 상업적 프로젝트의 결과물처럼 보였다. 나는 블록버스터를 격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뜻에서 이 표현을 쓴 것이다.

MCU의 영화들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스템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아이언맨 3>를 예로 들자면, 이 영화는 (1) MCU 1기와의 결별 (2) <어벤저스>가 세계관에 남긴 영향 반영 (3) 1기 아이언맨과의 결별과 새로운 아이언맨의 제시 (4) 그리고 세상 모든 속편들의 과제인 ‘1, 2편과 차별화된 쾌감을 줄 것’ 등등 난제로 가득찬 영화였다. 마블 스튜디오는 놀라운 기획력과 완성도로 모든 달성 목표를 깔끔하게 해결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종종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한 프로젝트 기안 문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예술도, 한 명의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세공품도 아니지만 즐거웠다.

마블 스튜디오는 수십 편의 영화가 서로 흥행을 돕는, 상업영화계 최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각 솔로 영화들은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동시에 개성을 지녀야 한다. 어려운 노릇이다. <토르> 시리즈처럼 실패에 가까운 경우도 있지만,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어벤저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등은 각각 다른 성격의 영화로서 고른 완성도에 도달했다.

때론 마블 스튜디오가 각 영화마다 차별화된 쾌감을 제공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거의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는 일종의 첩보 스릴러였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추억의 팝송을 결합시킨다는 놀라운 발상의 산물이다. <어벤저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완성도에 불만을 품은 팬들이 많지만, 나는 이처럼 복잡한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줘야 하는 영화치곤 꽤 깔끔한 공중제비 끝에 착지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영화에서 액션이 고른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마블 스튜디오는 샘 레이미나 폴 그린그래스처럼 액션의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겠다는 야심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 시리즈에서 보여준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감독의 취향이 반영되지도 않는다. 그저 깔끔한 콘티와 다양한 연출을 통해 매번 볼만한 액션 장면을 선사할 뿐이다. MCU는 감독의 역량에 휘둘리지 않고 늘 실패하지 않는 오락을 제공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며 제작자의 간섭은 악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 왔다. 그러나 상업영화의 경우 감독이 초호기처럼 제멋대로 폭주하는 걸 제어하는 장치도 필요하다는 증언 역시 흔하다. <킬 빌>을 두 편으로 나눠 개봉하자는 웨인스타인의 결정이 이 영화를 훼손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얼마 전 <판타스틱 4>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는 길이라는 친구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영화가 너무 엉망진창이라 하소연은 해야겠는데, 주위에 이해할 만한 친구가 나뿐이라서 내게 걸었던 모양이다. 축구장 기자석에서 경기를 보던 중이었지만 차마 전화를 끊지 못하고 그의 분노를 달래 줬다. 감독의 곤조를 통제하지 못한 결과는 1400억 원짜리 <클레멘타인>이었다고 한다. 냉철한 스튜디오가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특히 이후 프로젝트의 흥행까지 고려해야 하는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라면 더더욱.

요컨대 한 명의 초인이 아니라 잘 구축된 시스템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요즘 축구도 비슷하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은 세계 최고의 선수도 최고의 감독(요아힘 뢰브는 가끔 전술적 패착을 저질렀지만 어떻게든 패배하지 않고 전진했다)도 가지지 못했지만 기어코 우승한 팀이다. 14년 전부터 차근차근 유소년을 키운 육성 정책을 비롯해 대표팀 지원, 감독을 보좌하는 전술 지원 등 축구협회 전체의 역량이 일궈낸 승리였다.

<앤트맨>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에드가 라이트의 구상대로 영화를 제작하다가 막판에 라이트를 잘라버린 마블 스튜디오의 결정이 이 영화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고 느낀다. 여전히 엔딩 크레딧에는 라이트의 이름이 여러 번 보인다. 폴 러드는 인터뷰에서 “스토리는 전적으로 에드거 라이트와 존 코니시의 공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라이트가 중도 하차(사실은 잘렸다고 알려져 있다)한 이유는 “창작적 견해 차이”였다는데, 이 영화를 MCU 안에 자연스럽게 편입시키려면 라이트의 고집을 꺾어야 했던 모양이다. 라이트의 원안을 약간 MCU스럽게, 조금 미국스럽게 고친(폴 러드가 직접 참여) 결과는 참으로 깔끔하다. 아마 라이트가 메가폰을 잡았다면 독특한 매력은 있을지언정 완성도는 지금보다 떨어졌으리라 짐작해 본다.

결과적으로 <앤트맨>은 영국식 코미디의 기린아 라이트와 미국식 코미디의 최강자 주드 애파토우(의 작품에 여러 번 출연한 폴 러드)의 세계가 결합하며 탄생했다. 폴 러드를 캐스팅한 건 라이트였다는데, 미국 코미디 배우 중 비교적 차분한 스타일이 영국식 유머와 접점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런 조합에선 아주 참신하진 않더라도 귀엽고 성공적인 코미디가 도출될 수밖에 없다. 라이트와 애파토우의 세계 모두 찌질하지만 귀여운 남자 주인공을 내세우곤 했다. 스콧 랭이 마블 원작(지구 616)에서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다. 이번에도 스튜디오는 성공적이었다.

기타 잡생각들.

- 캐시 랭이 등장할 때 스태처(캐시의 히어로 이름)나 영 어벤저스를 인용하는 농담이 하나쯤 나올 줄 알았다. 나오지 않은 것인가 내가 못 알아들은 것인가...

- 난 도미닉 쿠퍼보다 존 슬래터리가 연기하는 하워드 스타크가 훨씬 마음에 든다. 도미닉 쿠퍼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어설프게 따라하는 수준이라면, 존 슬래터리는 <아이언맨 2>에서 토니가 넘어야 할 태생적 숙제인 아버지 하워드의 이미지를 멋지게 구현해 냈다. 톰 브라운 느낌의 패션 역시 존 슬래터리의 압승. 그가 프롤로그 영상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 속편에는 스콧이 방세 낼 돈조차 없어 장난감 집에서 생활하는 장면이 꼭 나왔으면 좋겠다. 속편이 나온다면 말이지.

- 여러분 랭트맨 만화 사 보세요. 이제까지 공식 출간된 마블 만화 중 제일 귀엽고... 많이들 사 보셔야 뒷이야기까지 쭉쭉 번역돼 나옵니다.

- 마블 스튜디오가 최근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디즈니 산하로 이동했다고 한다. 마블 CEO 아이삭 펄머터가 프로듀서 케빈 파이기를 사사건건 방해해 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이번 조치를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견제가 영화의 완성도를 더 높여 왔을지도 모를 일. 앞으로 어찌 될지는 지켜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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