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http://service.bz-berlin.de/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킥오프를 한 시간 앞두고 올림피아슈타디온을 빙 둘러 걸으며 나는 “이 경기장 정말 멋있네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같이 걷던 기자 선배도 동의했다. 흔히 축구 경기장은 기능에 충실한 외관을 지닌다. 철골, 콘크리트, 무게 분산을 위한 와이어 등이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올림피아슈타디온은 내 통념에서 벗어난 경기장이었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가장자리를 무수한 석재(느낌을 낸)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경기장 전체가 오래 묵은 석조 건축물의 느낌을 풍겼다. 종합경기장 옆에 딸린 수영장과 경기장 입구의 석조 입상도 메인 스타디움과 통일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경기장 안의 구조 역시 몇 가지는 남달랐다. 보통 종합경기장에서 축구를 하면 피치 바깥의 트랙 등 빈 공간이 골칫거리인 반면 올림피아슈타디온은 양쪽 골대 뒤에 바르셀로나와 유벤투스의 엠블럼을 크게 깔아서 누가 봐도 결승전이라는 느낌을 줬다.

경기 다음날은 딱 걷기 좋을 정도로 맑았다. 템펠호프 공원이 가볼만 하다는 지인의 추천에 따라 포츠담 플라자에서 남동쪽으로 향했다.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과 베를린장벽을 지나쳐 커리부어스트(그냥 쏘세지였다)까지 먹었는데도 아직 한 시간이나 더 걸어야 했다. 그래도 하늘은 올려다볼 때마다 환상적이었고,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땀이 났다. 곧 공원에 도착하면 활주로에서 자전거를 실컷 탈 수 있을 터였다. 템펠호프 공원은 원래 공항이었다. 히틀러가 베를린을 게르만 민족의 위대한 수도로 개조하려 할 때, 템펠호프는 세계 항공의 중심이 될 예정이었다. 나치가 패망한 뒤엔 서독의 주요 공항이자 대공수 작전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해졌다. 소련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육로를 봉쇄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연합국의 수송기가 식량과 석탄을 반년 넘게 공수한 거대한 작전이었다. 당시 희생된 조종사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템펠호프 한켠에 조성되어 있다.


사진출처 http://www.urbanghostsmedia.com/

그런데 구글 지도가 안내한 위치에 도달한 순간, 나를 맞은 건 광활한 활주로가 아니라 뜻밖에 거대한 건물이었다. 템펠호프 공항 청사는 단 하나의 곡선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경직되고 뻣뻣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오로지 하나의 직선으로 꼭대기까지 뻗은 명쾌한 구조, 세로로 답답하게 난 창문, 통일된 소재, 무엇보다 요즘 석재 건물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거대한 규모 앞에서 나는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까지 봐 온 공항 터미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건물을 마주하는 순간 느꼈다. 이게 나치구나. 나치가 추구한 극단적인 사상은 곧 경직되고 과시적인 건축 양식으로 이어졌다. 당시 제3제국의 수도엔 템펠호프 공항 비슷하게 쭉쭉 뻗은 건물의 행렬이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모멘트'에 템펠호프 공항이 언급된다. <택시는 템펠호프 공항 근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났다. 나는 템펠호프 공항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여행안내책자마다 아르데코 미학을 볼 수 있는 건물이라 극찬해놓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템펠호프 공항은 분단 전부터 베를린에 존재한 매우 뛰어난 건축물임에 틀림없었다.>

사진으로 본 템펠호프의 내부는 아르데코라는 말과 어느 정도 어울리는 면이 있다. 그러나 외관은 아니었다. 템펠호프의 대책 없는 직선은 내게 마야의 피라미드를 연상시켰다. 히틀러는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라는 세계의 수도로 마개조(?)하려는 계획을 밝히며 “오직 고대 바빌론과 이집트, 로마에만 비교할 수 있는” 도시를 꿈꿨다고 한다. 즉 기원전의 감수성으로 근대 도시를 디자인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템펠호프의 벽면은 기능적인 건물이라기보다 일종의 제단에 가까워 보였다. 복고적이라기보다 퇴행적인 느낌. 거기엔 뒤틀린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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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청사는 어디서 본 듯한 느낌도 풍겼다. 느낌의 근원을 따라가 보니 전날 인상 깊게 봤던 올림피아슈타디온이 떠올랐다. 두 건물의 느낌은 소재부터 건축 양식까지 여러모로 비슷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처음 지어진 것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였고, 히틀러가 직접 설계에 개입한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라고(히틀러는 더 많이 디자인하고 싶어 했지만 영 젬병이라 부하들이 슬쩍 무시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 개축을 거쳤지만 초기 설계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고보면 내가 챔스 결승에 어울리는 경기장이라고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올림피아슈타디온은 현대의 건축물이라기보다 고대 원형경기장에 가까운 장소를 지향하며 설계됐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승리를 스포츠에서의 승리로 은유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소. 나치는 실패했지만, 수십년 후 메시, 네이마르, 수아레스가 현대 축구의 세 왕으로 대관식을 치르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나치는 현대 사회에선 볼 수 없는 극단적인 통일미 같은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되살려 놓았다. <작전명 발키리>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는 “그 시절의 광경이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치 독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스타일화되고 디자인된 정권이었다. 당시 군수장관이자 건축가였던 알버트 슈피어가 지은 제국 건물들과 휴고 보스가 지은 제복들을 보라. 정말 끝내주게 아름답다”라고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영화엔 템펠호프 공항청사 비슷한 건물들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베를린 출장을 마치며, 경기 다음으로 내 기억에 남은 건 두 건물의 인상이었다. 세련된 예술가들이 모여든다는 베를린에서 나치의 잔재만 두 개 보고 돌아온 셈이었다. 어디 가서 도시를 제대로 즐겼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히틀러와 그 일당의 뒤틀린 정신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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