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처음엔 제주에 가면 해산물을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다르다. 제주 음식의 기본은 돼지, 특히 돼지 뼈 국물로 낸 육수라는 걸 안다. 이 지론이 생긴 계기는 내 결혼이었다. 처가 근처 마을회관에서 하루 동안 잔치를 했다. 돼지를 잡아 고기를 굽고 국을 끓였다. 그때 몸국을 처음 먹었다. 사실 이 음식 이름 중 첫 음절의 모음은 ㅗ가 아니라 'ㆍ'라서 육지 사람이 듣기엔 ‘멈국’에 가깝게 들린다.

돼지 뼈로 오래 우린 육수에 모자반과 잘게 썬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몸국은 숟가락으로 떠먹기 좋은 음식이다. 육지의 육개장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고스란히 대체하고 있어 잔칫집이나 상갓집에서 주로 먹는다. 식당에서도 많이 팔지만 맛있게 하는 집은 찾기 힘들다고 했다. 내 결혼 때 먹은 몸국보다 맛있는 걸 먹긴 어려 울거란 말도 들었다. 운이 좋았다.

잔치를 찾은 객은 고기 몇 점, 순대, 두부로 이뤄진 기본 세트를 받게 되는데 하나같이 육지에서 먹던 것과는 조금씩 맛이 다르다. 두부는 바닷물을 간수로 써서(물론 요즘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투박하지만 맛이 진하고, 순대 역시 선지와 찹쌀 말고는 별다른 속재료가 들어가지 않는데 간장에 찍어 먹으면 기가 막히다. 반 정도밖에 못 알아듣는 제주어를 이해하는 척하며 술잔을 들이키던 나는 구석에 있는 방으로 잠깐 숨어들어갔다. 메밀 전병을 부치고 무나물을 무치는 아주머니들은 헨리 포드의 공장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에 따라 순식간에 빙떡을 쌓아낸다. 그날 빙떡을 열개 정도 먹었다. 볶은 무가 코까지 차올랐다. 질식사할 뻔했다.


이날 먹은 몸국의 세계는 훗날 제주식 순대국밥에서 다시 경험하게 된다. 제주식 순대를 파는 집이 요즘엔 흔치 않은데, 우리 처가는 근처에 유명한 순대집(동문시장 안의 광명식당)이 있는데도 굳이 한라산을 빙 돌아 표선면에 있는 단골집까지 가서 순대를 받아 온다. 이 집의 순대국밥은 겉모습부터 다른데 한 마디로 ‘순대가 든 몸국’이다. 돼지뼈 국물에 모자반과 잘게 썬 고기가 들어있는 것까지 몸국과 똑같다. 여기에 찹쌀 순대가 추가됐을 뿐이다. 찹쌀이 국물에 반쯤 풀려 점도를 높이기 때문에 몸국보다 국물의 점도가 높고 그만큼 맛이 진하다. 잔치국수와 칼국수의 차이랄까. 메뉴판을 보니 역시나 몸국도 파는 집이었다. 순대국수라는 듣도보도 못한 음식도 있었는데, 다음엔 저걸 먹어야하지 싶었다.

제주도에서는 선짓국조차 돼지 육수를 쓰는 집들이 있다. 선지는 육지와 마찬가지로 소 피를 굳힌 것이지만, 그 기반을 이루는 국물만큼은 소가 아니라 돼지 사골이다. 두 짐승의 육수가 묘한 조화를 낸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기어코 국물까지 다 마셔야 하는 맛이다. 순대국밥과 해장국은 집마다 맛이 다 다르고, 스타일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내 장인은 자신이 단골로 찾는 순대집과 해장국집에 대한 자부심을 종종 내비친다. 다른 집 순대국밥은 먹을 필요가 없다며.


육지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돼지 뼈 국물은 고기국수에 들어 있다. 제주시의 국수문화거리는 내 처가와 가깝다. 관광객들이 자매국수 앞에 길게 줄을 서 부채질을 하는 동안, 나는 그 옆에 있는 아내의 단골집으로 들어간다. 허름하고 ‘포스’ 있어 보이는 식당은 육지 사람을 받고, 밋밋한 인테리어의 식당은 현지인을 받는다는 것이 재미있다. 돈코츠라멘에 익숙한 요즘 육지 사람들에겐 고기국수도 낯설지 않다. 한국의 국수 요리가 대부분 그렇듯 고기국수의 역사도 짧다. 길어야 100년일 것이다. 제주도 돼지는 육지 돼지와 달리 국물에서 잡내가 나지 않아 국수를 말 수 있었다는, 귀여운 자랑이 식당 벽에 걸려 있다.

요즘 우리는 삼겹살이 민족 고유의 외식거리인줄 알고 살지만 그 역사는 기껏해야 수십 년이라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보통 소를 선호했다. 소보다 돼지를 선호하는 전통은 오로지 제주에만 있었던 것 같다. 요리사 박찬일의 책에 따르면 부산의 돼지국밥도 제주도 돼지를 공수해 오며 탄생한 요리다. 온갖 국물에 돼지를 고집하는 제주의 요리 문화는 육지보다 훨씬 느리게 변해 왔고, 그래서 더 옛것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는 제주에 다녀올 때마다 해산물보다 돼지 사골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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