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을 보는 내내 ‘내가 이만큼 매력적인 돌아이야, 쿨하지?’라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악취미를 과시하는 이 영화를 첩보영화의 ‘변주’나 ‘계승’이라고 부르는 건 적절치 않아 보였다. 그보단 장르에 대한 ‘헌사’ 혹은 ‘팬픽’이 어울릴 것 같다.

세간의 평가만큼 재치 넘치는 영화는 아니지만, 결정적인 상황마다 낄낄대게 만드는, 매튜 본의 화끈한 연출은 여전했다. 창작자 자신의 취향을 자신만만하게 까발린다는 점에서는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들(<새벽의 황당한 저주> <뜨거운 녀석들>)과 한통속이다.

축구팬이라면 <킹스맨>을 본 뒤 풀 수 있는 퀴즈가 하나 있다. <킹스맨>에서 에그시가 사는 지역은? 답은 런던 남동부다. 에그시의 방에 런던 남동부를 연고로 하는 밀월FC 머플러가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에그시와 그 친구들은 전형적인 훌리건, 즉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캐주얼을 입고 다니는 영국 청년들이다. 머플러는 공영연립주택에 사는 에그시의 계급과 잘 어울리는 소품이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자연스레 축구를 언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 본 영화 중엔 스칼렛 요한슨이 전라로 나와 화제가 된 <언더 더 스킨>이 그랬다.(야하진 않다) 신체강탈자의 시선으로 인간을 관찰하는 느릿느릿하고 철학적인 SF영화인데,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좀처럼 제시되지 않는다. 영국 어디쯤인 것 같은데 저기가 어디인지 궁금해지던 찰나, 셀틱 유니폼 입은 사람들이 화면 안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주인공이 배회하는 장소가 글래스고라는 걸 알려주는 장면이다. 잠시 후 마주친 남자는 아이브록스 스타디움(레인저스 홈구장)을 언급했다. 심지어 스칼렛 요한슨이 납치하는 첫 지구인은 셀틱 팬으로 보인다. 셀틱 팬이라는 설정에 큰 의미는 없겠지만, 내겐 첫 희생자의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는 희미한 단서처럼 보였다.

영국 민중의 삶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온 켄 로치 감독은 <루킹 포 에릭>이나 <티켓>처럼 축구를 직접 다룰 때뿐 아니라, 축구와 상관없는 영화에도 자주 축구공을 등장시켰다. 그것이 영국 노동자 계급의 삶과 밀접하기 때문이리라. <내 이름은 조>에서 축구는 퍽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전부 기억은 안 나지만 <레이닝 스톤>을 비롯한 다른 영화들에서도 축구하는 장면은 한두 번씩 지나갔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얼리스트 켄 로치는 전형적 인물을 다뤄 왔고, 전형적인 영국 민중은 축구를 한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비전문배우를 선호하는 켄 로치 감독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인 배우를 자주 등장시킨다. 그러다보니 배우의 이력에도 축구가 등장한다.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의 주연 배우는 축구클럽 코치를 하다 우연히 발탁됐다고 한다. <스위트 식스틴>의 주인공도 축구 선수 지망생이었다.

언젠가 영드를 보다가 축구 선수 배우의 난데없는 실력에 흠칫 놀랐다. <닥터후> 뉴 5시즌이었다. 당시 닥터를 연기한 맷 스미스(국내 별명은 ‘맷닥’)는 유소년 시절 마이클 도슨과 함께 뛰었던, 꽤 촉망받는 선수였다고 한다. 짤막하게 지나가는 축구 장면이 그럴싸해 보이는 것도 ‘선출’이라서다. 이 에피소드에서 축구를 다루는 방식도 재미있다. 외계인인 닥터는 축구가 뭔지 잘 모른다. 한국에서 ‘~ 모르면 간첩’이라는 관용어구를 쓰듯, 영국에선 ‘축구 모르면 외계인’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킹스맨>에서 두 에이전트로 나오는 콜린 퍼스와 마크 스트롱은 신사가 아니라 소탈한 축구팬으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닉 혼비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피버 피치>에서 주인공 아스널 팬을 맡은 배우가 콜린 퍼스였고, 그 절친으로 마크 스트롱이 등장했다. 아마 아스널이 FA컵에서 우승하는 순간 두 배우가 껴안고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느린 화면으로 길게 잡혔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축구가 가장 인상적으로 인용된 작품은 영국이 아니라 독일 영화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독일의 전후 혼란기를 다룬 영화인데,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축구 중계 방송이 등장한다. 마리아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는 순간, 곁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베른의 기적’으로 유명한 1954년 스위스월드컵 결승전 중계가 흘러나온다.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중계다.

서독 대표팀은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월드컵 참가가 금지됐고, 1954년 대회는 제재가 풀린 뒤 첫 대회였다. 그런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건 서독 국민들에게 축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베른의 기적’은 곧 ‘라인강의 기적’을 압축해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한편으론 독일이 전후 혼란기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후 사회를 상징하는 인물 마리아가 죽는 순간, 바로 그때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마리아와 같은 비극적 인물의 시대는 가고 우승의 환희처럼 밝은 시대가 시작되리라. 독일은 그렇게 전후 혼란기와 결별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중계 음성은 곧 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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