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드디어 수원의 대들보가 된 '아픈 손가락' 민상기, 김건희

2021-05-31     서호정 기자

[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박건하 감독 부임으로 시작된 수원삼성의 반전은 드라마틱하다. 지난 시즌 도중 지휘봉을 잡은 박건하 감독은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했고,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희망의 단서를 남겼다. 하지만 2021시즌을 앞두고 그 희망이 아주 높은 기대감까지 연결되진 않았다. 박건하 감독과 주장 김민우가 시즌 전 우승을 목표로 한다고 할 때 ‘목표는 높을수록 좋다’는 식으로 해석됐다.

전반기를 마치고 수원은 정말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경기 수는 차이가 있지만 승점 33점으로 선두 울산에 3점 뒤진 2위다. 19경기를 마친 시점(9승, 33점)에 지난 시즌 27경기에서 거둔 승리와 승점(8승, 31점)을 모두 넘어섰다. 팀 득점 1위(29점), 득실 차 공동 2위(11점)로 여러 지표도 최상위권이다. 

울산과 전북의 양강 구도를 대구와 함께 깨면서 다자 구도로 만든 수원은 6년 만에 우승 도전의 기회도 잡았다. 2008년 팀의 4번째 리그 우승 달성 후 왕좌에 가장 근접했던 때는 2015년이다. 당시 전북에 승점 6점 차로 뒤져 준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2년 연속 파이널 B로 향했던 수원의 부진은 '명가의 몰락'으로 표현됐다. 기업의 관심과 지원은 줄었고, 선수단은 그라운드 위에서 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갔다. 팬들의 울분만 높아진 시기다. 

하지만 지난해 9월 박건하 감독이 부임하며 팀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현재 세계 축구의 전술적 핵심인 트랜지션(전환) 게임을 전술의 축으로 삼은 박건하 감독은 수원이 공들인 유스 출신의 어린 선수들을 과감히 기용했다. 올해 K리그 최고의 히트상품인 매탄소년단(MTS)의 출발이다. 기동력과 스피드 면에서 리그 최상위 팀으로 변신한 수원은 전북, 울산, 포항을 상대로 3골을 기록하는 대승을 가져왔다. 전반기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슈퍼매치에서의 3-0 완승은 대미를 장식했다.

흥미로운 것은 수원이 지난 겨울 이적시장에서 가장 조용했던 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제리치, 니콜라오, 최정원 외에는 3명의 신인 선수 합류가 끝이었다. 지난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세운 확실한 전술적 기틀은 있었지만, 선수층이 얇은 것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시즌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팀의 위치가 크게 바뀐 것은 기존 선수들의 재발견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박건하 감독은 올 시즌 수원이 달라진 것을 짚으며 두 선수의 이름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민상기와 김건희다. 그들은 김태환, 강현묵, 정상빈으로 대표되는 프로 3년차 이내의 유스 출신 선수들과 달리 프로에 와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20대 중후반의 수원 유스 1세대다. 

문제는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수원 유스인 매탄고 출신 프로 1호 민상기는 대형 수비수로 기대를 모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상승 곡선을 타지 못했다. 김건희도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고 대학 시절 특급 유망주로 꼽혔지만 프로에 와서 자신의 장점을 좀처럼 발휘하지 못했다. 두 선수 모두 프로 입성 후 시즌 평균 출전이 20경기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들쑥날쑥했다. 

올해는 다르다. 민상기는 수원의 3백 중심으로 거듭나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됐다. 장호익, 헨리, 박대원, 최정원 등 다른 수비 옵션이 존재하지만 중심을 잡고 리딩, 공중볼을 책임지는 민상기의 부재 상황은 박건하 감독에게 가장 큰 고민이 될 정도다. 

김건희는 2019년 상주에서 후반기 대활약을 펼친 이후 올 시즌 프로 입성 후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제리치, 정상빈과 번갈아 가며 공격 조합을 구성하는 그는 16경기에서 6골 1도움을 기록 중이다. 제주, 광주를 상대로는 환상적인 트래핑에 이은 마무리로 자신의 재능을 보여줬고, 슈퍼매치에서는 피지컬로 서울 수비를 초토화시키며 김민우의 골을 도왔다.

두 선수의 껍질을 깨게 만드는 것은 박건하 감독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수원 레전드에 매탄고 감독 경험도 있는 그는 선수 영입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두 선수가 팀의 중심이 되어야만 올 시즌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우선 민상기에게는 부주장을 맡기며 책임감을 부여했다. 매탄고 출신 1호로서 무수한 후배들을 이끄는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다. 박건하 감독은 그런 책임감이 민상기의 정신력을 한층 강화시켰다고 설명했다.

“작년까지도 민상기는 3~4경기를 뛰면 1경기를 쉬어야 하는 패턴이었다. 선수 생활 내내 잦은 근육 부상으로 그런 패턴에 몸이 익숙해졌다. 올해는 그걸 이겨내려고 한다. 18라운드 광주전 때 사실 전반에 부상이 왔다. 예전 같았으면 상기가 거기서 손을 들고 나왔을 거다. 그런데 참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 결국 후반 38분에 두번째로 근육이 올라와서 교체됐다. 나오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더라. 본인이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하다가 안 된 거니까 죄송할 일이 아니었다.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었다. 상기의 그런 모습 때문에 팀 전체가 마지막까지 이겨내려는 힘이 강해졌고, 결국 광주전에서 역전승을 했다. 라커룸에 들어가서 선수들에게 90도로 인사했다. 감독으로서 내가 더 잘해야 되겠다, 늘 정신 차려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상기가 그런 마음을 일깨워줬다.”

광주전 근육 부상에도 슈퍼매치 출전 의지를 드러낸 민상기는 수비에서 자기 몫을 한 것은 물론 팀의 세번째 골까지 터트리며 공수 양면에서 대활약을 했다. 박건하 감독은 마스크를 벗고 활짝 웃으며 누구보다 기뻐했다. “올 시즌 내가 가장 과하게 좋아했던 순간이다. 그만큼 상기의 득점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라는 게 박건하 감독의 얘기였다. 

반대로 김건희는 호되게 혼을 냈다. 올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건희는 수원에서 계속 도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이적 의사를 보였다. 박건하 감독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단순히 선수 욕심이 아니었다. 프로 데뷔 후 상무에서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인 적 없는 김건희가 도피에 가까운 이적을 해서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성공도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욕을 했다. 건희한테 ‘너 이 XX야. 이 팀이, 그리고 감독인 내가 우습게 보여?’라고 크게 혼을 냈다. 슈퍼매치가 끝나고 기자회견에서 건희가 순화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때는 내가 욕을 하고 혼을 내면서 몰아붙였다. 내 생각은 그렇다. 건희는 수원에서 제대로 도전한 적이 없다. 부상도 많았고, 과거 지도자들이 외국인 공격수에 비해서 믿음을 주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본인이 이겨내겠다고 혼신의 힘을 다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냐, 그런 마인드로는 어디서도 안 된다. 수원에서 무조건 성공해라. 여기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절대 안 보내준다’고 말했다.”

올 시즌도 김건희는 제리치와 치열한 경쟁을 했다. 까마득한 후배 정상빈도 혜성처럼 등장했다. 과거였다면 그런 조건과 환경 탓을 하며 스스로 포기할 수 있었지만 2021년은 다르다. 선발과 교체, 어떤 형태의 출전과 어느 시점에서의 투입과 상관 없이 자기 역량을 펼치고 나온다. 그런 김건희의 달라진 자세로 인해 박건하 감독은 김건희, 제리치, 정상빈 3명의 공격수를 다양한 조합으로 구성해 상대 맞춤 전략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됐다.

문전 감각, 공격 전환 시 피지컬을 활용한 연계 등 공격수로서 한 단계 더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는 김건희는 이기제에 이어 향후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로 언급될 정도다. 박건하 감독은 “이기제, 정상빈의 발탁도 기쁘지만 만일 김건희가 대표팀에 간다면 가장 기쁠 거 같다. 피해의식도 많고, 실제로 부정적인 상황도 많았다. 하지만 열만 받고, 남 탓만 해서는 그라운드 위에서 달라지는 게 없다. 자기 스스로 변해야 상황이 바뀐다는 걸 건희가 깨달았고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라고 말했다.  

팀의 확실한 대들보가 된 민상기와 김건희의 활약을 팀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박건하 감독은 “팀에 불만이 사라졌다. 처음 왔을 때는 이래서 불만, 저래서 불만인 분위기였다. 코칭스태프와 선수 사이의 신뢰도 적었다. 그런데 지금은 팀의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함께 경기를 뛰고 싶다는 열망을 비주전 선수들이 보이고 있어 희망적이다”라고 말했다. 

동시에 지도자로서 스스로의 성장도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선수들은 다 가진 게 있다. 그걸 운동장에서 하게끔 돕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라는 걸 다시 느낀다”라는 그의 말은 2021년 민상기, 김건희의 성장이 수원 전체의 성장이 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