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베테랑 윙어’ 염기훈의 스트라이커 적응기
[풋볼리스트] 한준 기자= 2017시즌 수원삼성의 기본 전형은 3-5-2다. ‘왼발의 지배자’로 불리는 염기훈(34)은 주 포지션인 왼쪽 날개에서 조나탄과 투톱으로 전진배치되었다. 체력 부담은 커졌고, 장기인 시원한 크로스 패스로 경기에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장면도 줄었다. 지난 두 시즌 연속 K리그클래식 도움왕을 차지한 염기훈이 전술적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질타가 나오기도 했다. 염기훈은 자신이 노력해서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다.
“포메이션은 코칭 스태프가 정하는 것이다. 4-1-4-1을 하든 3-5-2를 하든 팀이 원하는 것에 맞춰야 한다. 올해는 시즌 초부터 감독님이 3-5-2로 나간다고 말씀하셨다. 힘들지만 내가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연히 사이드에서 뛰는 것이 편하지만, 팀에 맞는 포메이션이니 내 욕심을 부리기보다, 내가 맞춰가야 한다.”
#부상이 준 생각할 시간, 포워드 적응한 염기훈
염기훈은 28일 저녁 대구FC와 ‘KEB하나은행 K리그클래식 2017’ 17라운드 원정 경기에 2도움을 올리며 단숨에 도움 1위로 올라섰다. 대구전 역시 조나탄과 투톱을 이뤘는데, 스트라이커 위치에서 마침표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본래 가진 ‘도움 본능’을 살릴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줬다. 염기훈은 이 경기에서 1골 2도움의 원맨쇼를 펼치며 3-0 완승을 이끌었다. 대구전은 염기훈의 새 포지션에 대한 적응 의지가 빛난 경기다.
FC서울과 슈퍼매치에서 무릎 부상을 입은 뒤 최근 광주FC, 강원FC와 두 경기를 벤치에서 출발한 염기훈은 오랜만에 선발로 나선 대구전에 한결 가벼운 움직임을 보이며 최고의 경기력을 보였다. ‘풋볼리스트’와 인터뷰를 한 염기훈은 대구전을 통해 “포인트도 올리고 승리할 수 있어서 자신감이 생겼다”며 웃었다.
염기훈은 서울전 전반전에 무릎 타박상을 입은 뒤 교체 선수로 나서며 쉰 것이 전화위복이 됐다고 했다. “체력적으로도 도움이 됐고, 벤치에서 경기를 바라보니까, 경기를 어떻게 해야되는지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부상당한 것은 아쉽지만, 한 템포 쉬고 가는 타이밍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인 점도 있다.”
염기훈은 윙어와 스트라이커의 움직임과 템포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대구와 경기에서 9번 공격수 자리를 한결 매끄럽게 소화했다. “사이드만 많이 보다가 포워드를 서보니까 움직임에 한계가 있더라.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움직일지, 답답한 부분이 많았다. 벤치에서 조나탄, (유)주안이나 상대팀 선수들을 보면서 포워드에서 저렇게 해줘야하는 구나라고 느낀 것이 도움이 됐다.
2017시즌 개막 이후 수원은 AFC챔피언스리그와 FA컵 경기를 병행하며 빠듯한 일정을 소화했다. 최근에는 주중 경기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유를 갖기 어려웠다. 매 경기 출전해온 주장 염기훈은 개인적인 플레이 뿐 아니라 팀 전체를 아울러여 하는 입장이기데 더더욱 바쁜 시간이었다. 한참 바쁜 시기에 부상으로 인해 찾아온 여유는 염기훈에게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의 시간이 됐다.
“사이드와 포워드의 움직임 차이로 인해 딜레마가 조금 있었다. 포워드 자리에서는 사이드에서 하던대로 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나보다 힘 좋은 선수도 있고, 키 큰 선수도 많아서 이겨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쉬면서 다른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이드 같은 경우는 내게 볼이 오면, 어떤 타이밍에 크로스를 올릴지, 어떻게 볼을 잡아 두고 올려야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포워드 자리에선 사이드에서 했던 것처럼 하니까 안되더라.”
“포워드 자리에선 (주변을) 조금 더 살펴야 한다는 걸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포워드는 사이드에 설 때보다 한 두 번 더 살펴야 한다. 사이드에선 내가 등을 지면 한쪽은 사이드 라인이기 때문에 공이 아웃될 수 있다. 앞만 보면 된다. 포워드는 좌우 앞뒤를 다 확인해야 한다.”
#대구전 2도움, 스트라이커 움직임을 통해 나온 결실
대구전 전반 10분 염기훈의 첫 도움 장면은 측면에서 올린 크로스 패스였지만, 그가 부지런히 공간을 찾아 움직이며 나온 결과다. 대구의 공격이 차단된 이후 역습이 전개될 때 전방 중앙에 있던 염기훈은 좌측면에서 김민우가 길게 뽑아준 전환 패스를 따라 오른쪽 전방 빈 공간으로 이동한 뒤 조나탄의 문전 침투 동선에 맞춰 크로스 패스를 찔러 넣었다.
후반 35분 쐐기골이 된 두 번째 도움 장면 역시 역습 과정에서 김민우가 좌측면에서 넘겨준 볼을 받았다. 볼의 결을 살려 문전 우측으로 침투하던 유주안에게 패스했다. 빠르게 공과 선수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앙 공격수 역할을 통해 올린 도움이었다. 정기 상황이나 측면 지역에서 단번에 넘긴 칼 같은 크로스 패스가 아니라 9번 공격수에게 많이 나오는 패턴 플레이였다.
“미리 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 두 번째 어시스트 장면에서 도움이 됐다. 내가 사이드를 보고 있었다면 수비수만 보고 컨트롤 해놨을 것이다. 이번엔 볼이 오기 전에 미리 주안이 위치를 봤고, 볼이 내게 올 때 한번 더 뒤를 살폈다. 그 타이밍이 도움이 됐다. 한 번 살필 걸 두 번 살폈기에 할 수 있었던 패스다.”
염기훈은 부상 기간 다른 공격수들의 움직임에서 힌트를 얻었다. 얻은 힌트를 경기력으로 옮기기 위한 과정은 영상 분석 보다는 훈련장에 있었다. 프로 경력 대부분을 측면에서만 보낸 자신의 버릇을 고치는 데 집중했다.
“포워드는 볼을 거머쥘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포워드는 워낙 고립되는 상황이 많고, 볼을 잡았을 때 앞뒤로 압박이 오는 상황이 많다. 사이드에서 했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이드에서는 한 명만 등지면 되지만 포워드는 두 명을 등져야 한다. 더 간결하게 터치에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경기를 더 보기 보다는 내 버릇을 고치자는 것을 제일 먼저 했다.”
염기훈은 대구전에 2개 도움을 추가해 올시즌 5호 도움에 도달했다. 지난 두 시즌과 비교하면 페이스가 늦지만, 도움 기록 공동 선두다. 역대 기록으로 따지면 93호 도움이다. 염기훈은 이미 K리그 역대 최다 도움 기록 보유자다. 도움을 추가할 때마다 K리그의 역사가 새로 쓰여진다. 염기훈의 올해 목표는 100호 도움 달성이다.
“올해 꼭 해보고 싶다. 시즌 시작하기 전에 100개 도움을 목표로 삼았다. 초반에는 어시스트를 많이 하는 자리가 아니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다. 적응해가고 있다. 쉽게, 쉽게 플레이하면 어제처럼 포인트가 나올 것이다. 더 간결하고 빠르게 패스해야 한다.”
#염기훈 리더십, 조원희 살리고 유주안에 조언
새 포지션에 적응하면서 주장으로서의 역할도 잊지 않았다. 수원은 대구전에 주전 수비수 구자룡이 경고 누적으로 빠지면서 걱정이 적지 않았다. 강원FC와 홈경기에 교체로 들어가 뼈아픈 자책골을 기록한 조원희가 선발 출전해 무실점 승리에 힘을 보탰다. 염기훈은 조원희가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뒤에서 힘을 실어주었다.
“경기 끝나고 나서 원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힘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와도 막을 수 없다. 열심히 안 한 게 아니라 열심히 하려다가 그런 것이니 신경쓰지 마라.’ 원희가 그래도 내려놓기가 어렵다고, 잠도 못잤다고 하더라. 대구전에 이기고 원희가 선수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원희가 고마워할 것은 아니다. 원희가 열심히 해줬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 원희는 설렁설렁 뛰는 선수가 아니다. 열심히 하는 선수라는 것을 팬들도 알 것이다. 어제 이겨서 원희도 한 시름 놓은 것 같다.”
수원은 여러모로 상승세다. 염기훈의 부상 기간이던 강원과 경기에 선발 출전 기회를 얻었던 ‘신인공격수’ 유주안은 강원전에 1골 1도움을 올린 것에 이어 대구전에도 염기훈의 패스를 받아 2경기 연속골을 넣었다. 염기훈은 “골 결정력이 좋다. 연습할 때도 골을 많이 넣었다. 빠져나가는 움직임도 상당히 좋다”고 칭찬하면서도 “지금 워낙 어리기 때문에 힘이 부치는 면이 있다. 장점을 살리면서 힘에서 밀리는 것을 어떻게 이겨낼지 터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염기훈이 어울리지 않던 ‘9번 공격수’라는 옷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수원은 슈퍼매치 패배의 충격을 딛고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승점 27점으로 리그 4위에 올라 있다. 18라운드 상대는 2위 울산이다. 승점 차이가 2점에 불과해 승리할 경우 상황에 따라 2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 수원은 최근 원정 경기 기세가 좋고, 염기훈 역시 울산전 승리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
“우리 선수들이 원정에서 심리적으로 편한 부분이 있다. 울산전에도 그런 면에 작용할 수 있다. 올해 우리가 울산을 이기지 못했다. 홈에서 졌으니 원정에서 복수하고 싶다. 준비 기간이 짧지만 선수들끼리 잘 단합하고, 미팅을 통해 잘 준비해서 승리하겠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