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한준 기자= “우리에게 이런 밤을 안겨줘서 감사합니다.”

레스터시티의 한 팬이 세비야와 ‘2016/2017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16강 2차전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만들어온 플래카드에 적힌 내용이다.

'2015/2016 잉글리시프리어리그(EPL)'에서 동화 같은 우승을 이룬 레스터시티는 올 시즌 리그 강등권에 머무르며 위기를 겪고 있다. ‘영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을 전격 경질해 비판 여론도 높아진 상황이다.

위기 극복의 열쇠는 또 다른 동화다. 잉글랜드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UCL 무대에서 8강 진출을 이뤘다. 창단 이후 UCL에 처음 참가한 레스터시티는 기대 이상의 성과로 호평 받고 있다. 토트넘홋스퍼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아스널이 16강에서 탈락한 가운데 이룬 결과다.

레스터시티의 UCL판 동화는 결과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내용상으로도 비범하다. 세비야는 최근 3년 간 유로파리그를 우승한 팀이다. 올 시즌 스페인 라리가에서 아틀레티코마드리드를 제치고 레알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 등과 경합하며 3강 체제를 구축한 강호다.

레스터시티가 16강에서 세비야를 만나게 됐을 때, 다수의 전문가들이 세비야의 우세를 점쳤다. 실제로 1차전에서 세비야가 2-1로 이겼다. 레스터시티는 2차전에서 2-0으로 승리해 골 득실 차 우위로 역전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역전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두 경기 연속 페널티킥 선방이다. 골키퍼 카스퍼 슈마이켈은 1차전에서 호아킨 코레아, 2차전에서 스티븐 은존지의 페널티킥을 막았다. 이 두 차례 선방이 아니었다면 8강 티켓은 세비야의 차지였다. 슈마이켈은 16강 2연전 연속 페널티킥 선방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기록은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홈 전승이다. 레스터시티는 조별리그 G조에서 포르투(1-0), 코펜하겐(1-0), 클럽브뤼헤(2-1) 등 홈에서 치른 3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포루투에 0-5로 졌으나 이미 조 1위를 확정한 상황에서 치른 경기였다.

레스터시티는 세비야와 16가 2차전 홈경기까지 승리해 UCL 무대 홈 전승 기록을 이어갔다. 이 중 세 경기가 무실점 승리였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올 시즌 UCL 홈 경기에서 전승을 기록하고 있는 팀은 FC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뮌헨 등 전통의 강호뿐이다. 아틀레티코마드리드가 16일 새벽 16강 2차전 일정에 홈 전승에 도전한다.

#레스터시티의 8강 루트, 홈 4연승-마레즈 킬러본능

안방에서 확실하게 승리를 거둔 것이 레스터시티의 8강 비결이었다. 최근 EPL은 유럽대항전에서 부진했다. 팀들은 지난 네 시즌 동안 두 차례 밖에 4강 진출팀을 배출하지 못했다. 2011/2012시즌 첼시가 우승한 뒤 결승 진출팀은 없었다. 맨체스터시티가 AS모나코를 제치고 8강에 합류하면 레스터시티와 맨시티가 4강에 도전한다.

레스터시티가 살린 잉글랜드의 자존심은 또 있다.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되고 크레이그 셰익스피어 감독이 지휘봉을 이어 받았다. 셰익스피어 감독은 보비 롭슨과 해리 레드냅 이후 UCL 토너먼트를 경험한 세 번째 잉글랜드 국적 감독이 됐다. 

레스터시티의 UCL 8강 진출 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선수는 알제리 공격수 리야드 마레즈다. 2015/2016시즌 EPL 우승 당시 리그 17득점을 몰아쳐 선수들이 뽑은 EPL 올해의 선수로 뽑힌 마레즈는 올 시즌 리그에서 4득점에 그치고 있으나 UCL에서는 팀 득점의 대부분을 만들었다.

세비야와 2차전 경기에서도 수비수 웨스 모건의 선제골을 프리킥 크로스로 어시스트한 마레즈는 8강에 오르기까지 레스터시티가 기록한 10골 중 6골(4골 2도움)에 관여했다. 클럽부뤼헤와 원정 경기였던 UCL G조 1차전에서 프리킥과 페널티킥으로 멀티골을 기록한 마레즈는 포르투와 2차전에서 슬리마니의 결승골을 도왔고, 코판하겐과 2차전에서는 직접 결승골을 넣었다.

마레즈가 침묵한 4차전 코펜하겐 원정은 무득점 무승부였다. 마레즈는 브뤼헤와 4차전 경기에서도 페널티킥으로 2-1 승리의 결승골을 넣었다. 16강이 확정되고 6차전은 뛰지 않았다. 마레즈는 세비야와 16강 1차전에 침묵했으나 2차전에 결정적인 포인트를 올렸다. 레스터시티는 마레즈가 공격 포인트를 올린 4경기에서 모두 승리했다. 

마레즈의 킥은 자메이카 축구사에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줬다. 세비야와 2차전에 선제골을 넣은 수비수 웨스 모건은 자메이카 국적 선수로는 처음으로 UCL 무대에서 골맛을 봤다. 레스터시니는 UCL 무대에서도 동화 같은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있다. 8강에서 어떤 상대를 만나든,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유럽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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