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2005년 7월 14일. 올드 트래포드(O.T) 입성
박지성의 맨유 입성은 깜짝 뉴스였다. PSV 에인트호벤에서 3년째를 맞아 유럽 무대에 완전히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에레디비제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맹활약한 박지성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5월 말 에이전트를 통해 퍼거슨 감독과 맨유의 관심을 전해 들었을 때 박지성 자신도 놀랐을 정도였다. 이후 3주 간 맨유와 퍼거슨 감독, PSV와 히딩크 감독, 그리고 박지성 삼자 간의 협상이 진행됐고 6월 21일 맨유와 PSV가 이적료(600만 파운드)에 합의한 뒤 그의 맨유행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개인 협상과 메디컬테스트를 마친 박지성은 맨유에 합류했고 7월 14일 ‘꿈의 극장’으로 불리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공식입단식을 가졌다. 최용수, 김도근, 안정환, 김태영 등이 인연을 맺지 못한 프리미어리그에서 발을 내디딘 최초의 한국인에 박지성 이름 석자가 아로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박지성은 입단 소감에서 “맨유가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고 싶다”며 포부를 나타냈다. 퍼거슨 감독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보여준 박지성과 체력과 스피드에 놀랐다”며 영입 이유를 설명했다. 당초 박지성은 맨유에서 21번을 달 것으로 알려졌었다. 대표팀과 PSV에서 달던 7번은 당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미 선점하고 있었기에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달았던 21번을 원했다. 하지만 박지성의 등번호는 13번으로 배정됐고 새로운 인연은 맨유의 13번 박지성으로 시작되는 전설로 이어졌다. 맨유 합류 후 곧바로 아시아투어에 나선 박지성은 성공적인 연착륙을 했고 2005/2006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 3라운드 데브레체니전을 통해 맨유맨으로서 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인 에버턴과의 원정 경기에 선발 출전하며 리그 신고식도 가졌다.
② 2005년 12월 20일. 역사적인 맨유 데뷔골
박지성의 맨유 적응은 순조로웠다. 호날두와 라이언 긱스라는 쟁쟁한 경쟁자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꾸준히 경기에 나서며 출전시간을 확보해갔다. 하지만 잉글랜드 무대 진출 후 데뷔골은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2005/2006시즌 전반기에 네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공격포인트도 차곡차곡 쌓아갔지만 유달리 결정적인 슛만은 골대를 맞고 나가는 등 운이 따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고대하던 데뷔골은 12월에서야 나왔다. 버밍엄시티와의 칼링컵 8강전에서 팀이 1-0으로 앞서 있던 후반 5분 통렬한 왼발 슈팅으로 첫 골을 뽑아냈다. 맨유 데뷔 후 133일, 그리고 26경기만에 기록한 골이었다. 박지성의 마수걸이 골의 도우미는 루이 사아였다. 이미 선제골을 뽑았던 사아는 후반 5분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패스를 줬고 박지성은 이것을 받아 상대 수비가 마크하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왼발 슛으로 연결, 골네트를 흔들었다. 활발한 움직임에 멋진 데뷔골까지 터트린 박지성은 이날 2골 1도움을 기록한 공격수 사아보다도 높은 평점 8점을 각종 매체로부터 받으며 최고 수훈 선수로 평가 받았다. 박지성은 2006년 2월 5일 풀럼전에서 프리미어리그 첫 골도 기록하지만 나중에 풀럼의 자책골로 수정됐다. 결국 박지성의 리그 데뷔골은 4월9일 아스날을 상대로 나왔다.
③ 2006년 4월 17일. 이영표와 맞잡은 손
박지성이 맨유에 합류하고 이어서 PSV에서 함께 뛰었던 이영표도 토트넘으로 이적하며 프리미어리그에는 두명의 한국 선수가 활약하는 친숙한 무대로 부상했다. 이영표 역시 박지성 못지 않게 빠른 적응을 보였고 토트넘의 왼쪽 주전 풀백으로 올라섰다. 자연스럽게 국내 팬들은 두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격돌하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22일, 두 선수가 프리미어리그로 입성하고 맨유와 토트넘의 첫 맞대결이 있었다. 당시 박지성은 왼쪽 윙, 이영표는 왼쪽 풀백으로 나서 경기 중 서로를 상대해야 할 상황이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6개월 가량 지난 리그 35라운드에 운명은 얄궂은 상황을 연출했다. 박지성이 오른쪽 윙으로 출격하며 자연스럽게 이영표와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경기 시작 전 화이트하트레인에서 악수를 나누며 선전을 다짐한 두 선수는 경기 초반부터 서로 볼을 빼앗고 빼앗기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 전반 36분, 아직도 국내 팬들에겐 눈에 선한 장면이 나왔다. 이영표가 토트넘 진영에서 공을 걷어내려다 박지성의 수비에 걸렸다. 튀어나온 공을 다시 잡은 이영표는 안전한 지역으로 걷어내려 했지만 어느새 뒤쪽으로 접근한 박지성은 등지고 있던 이영표의 뒤에서 왼발을 뻗어 공을 건드리며 뺏는 데 성공했다. 이영표는 그대로 넘어졌고 노마크 상황에서 공을 잡은 웨인 루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시켰다. 맨유가 2-0으로 앞서며 승기를 잡는 중요한 골이었다. 박지성이 루니에게 달려가 득점의 기쁨을 나눌 때 이영표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궈야 했다. 결국 승부는 2-1로 끝났고, 박지성이 이영표로부터 뺏은 그 공이 승부를 갈랐다. 한국에서 중계를 지켜 본 팬들로서는 우산장수와 소금장수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과 같을 수 밖에 없는 경기였다. 누군가는 씁쓸한 박지성의 판전승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이영표를 향한 박지성의 플레이에 대한 서운함도 표현했다. 하지만 하루 뒤 한 프리랜서 기자에 의해 공개된 사진 속의 두 선수는 많은 이들의 오해와 곡해를 날려버렸다. 그 장면 후 스쳐 지나가던 두 선수가 보이지 않게 서로 손을 잡는 장면은 비록 그라운드 위에서 적으로 만났고 승부를 위해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표팀과 PSV에서 보낸 긴 시간 동안의 우애는 변치 않았음을 보여줬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회자되는 장면이자 생생히 기억된 사진이다.
④ 2008년 4월 29일. 바르셀로나의 중원을 찢어놓다
독일월드컵을 마치고 돌아온 박지성은 2007년 4월 무릎 연골 수술이라는 선수 인생의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선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PSV 시절 받은 무릎 연골 반월판 수술 부위에 다시금 재수술을 한 것. 9개월 가량을 그라운드에서 떨어진 채 보내야 했던 박지성은 12월 말 선덜랜드전에서 호날두와 교체돼 투입되며 복귀를 알렸다. 2008년 3월 1일 풀럼을 상대로 부상 후 첫 골을 터트린 박지성은 이후 빠른 회복세를 보였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로마를 상대로 맹활약을 펼쳤다. 9년 만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꿈꾸는 맨유는 4강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났다. 퍼거슨 감독은 바르셀로나 원정과 홈에서 모두 박지성을 선발 출전시켰다. 박지성은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리오넬 메시, 데쿠, 지안루카 참브로타의 전진을 막는 전술적 임무를 맡았다. 캄 누 원정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고 돌아온 맨유는 홈인 올드 트래포드에서 결승행을 위한 승리를 노렸다. 왼쪽 윙으로 나선 박지성의 특유의 활동량을 자랑하며 올드 트래포드를 달렸다. 특히 최전방 공격수로 나선 호날두와 오른쪽 윙인 나니가 적극적인 공격을 나설 때 박지성은 그라운드 전역을 누비며 바르셀로나의 공격을 끊었다. 공격 시에는 영리한 패스와 공간 침투로 메시가 수비로 내려오게끔 만들었다. 그야말로 풀백에서 윙포워드까지 전천후 역할이었다. 경기 내내 적극적인 가로채기를 시도한 박지성에 의해 패스 줄기가 끊어진 바르셀로나는 결국 폴 스콜스의 중거리슛 한방에 무너졌고, 맨유는 1-0으로 승리하며 결승행에 성공했다. 경기 후 외신들은 박지성의 보이지 않는 헌신적인 팀 플레이에 극찬을 보냈다. 박지성은 “바르셀로나의 허리를 찢은 숨은 공로자”라는 극찬을 받으며 생애 첫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과 우승을 꿈꿨다.
⑤ 2008년 5월 22일. 모스크바의 눈물
맨유가 2007/2008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오르는 데 있어 토너먼트에서 박지성이 보여준 팀 공헌도는 단연 최고였다. PSV시절 안타깝게 결승 진출에 실패했던 박지성으로선 맨유에서 그 한을 풀고, 아시아 선수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하는 꿈을 꿨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현지 언론도 박지성의 결승전 선발 출전을 유력하게 점쳤다. 하지만 모스크바 루츠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첼시와의 단판승부에서 박지성은 출전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벤치에도 앉지 못해 관중석에서도 동료들의 플레이를 지켜봐야 했다. 퍼거슨 감독은 첼시전 맞춤 전술을 위해 박지성이 아닌 오언 하그리브스를 택했다. 맨유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9년 만에 유럽 정상에 올랐다. 박지성은 츄리닝을 입은 채 동료들이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나중에 절친한 동료인 에브라, 판 데르 사르 등에 끌려 그라운드 위에서 우승컵을 들 수 있었지만 마음 편히 웃을 수 없는 밤이었다.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는 후일 “맨유 입단 후 유일하게 퍼거슨 감독에게 섭섭했던 순간이었다. 나와 지성이는 가슴이 찢어졌다. 하지만 경기 후 우승 파티에서 힘든 선택이었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며 회고한 바 있다. 실제로 퍼거슨 감독은 “감독 인생 중 가장 힘든 결정이었다”고 인터뷰에서 고백한 바 있다. 그날의 아픔은 박지성을 성장시키기도 했다. 전술과 내용에서 뛰어난 조연이 아닌, 골이라는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는 주연으로 변신하기 위해 노력한 것. 결국 박지성은 2008/2009시즌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팀의 2년 연속 결승행을 완성시켰고 로마에서 열린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 당당히 선발로 출전했다. 그러나 그때는 결과가 그를 울렸다. 맨유는 리오넬 메시를 앞세운 바르셀로나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0-2로 패했고, 박지성은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⑥ 2010년 2월 16일. '센트럴 파크' 피를로를 지워버리다
최근 유로2012 대회 기간 중 맨유의 수비수 리오 퍼디난드는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끈 안드레아 피를로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면서 박지성에 대한 촌평을 꺼냈다. 퍼디난드는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유로2012 8강전이 끝난 뒤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피를로는 축구 마스커다. 그는 차별화된 축구를 한다. 하지만 박지성은 산 시로에서 맨마킹의 진수를 보여줬다. 피를로는 그날 꿈에서도 박지성을 봤을 것이다”고 추억을 되살렸다. 퍼디난드가 언급한 경기는 2009/2010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이다. 산 시로에서 AC밀란을 상대한 원정팀 맨유는 그날 특별한 전략을 꺼내들었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을 측면이 아닌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시켰다. 밀란 전술의 핵인 피를로를 봉쇄하기 위해 맞춤 전술, 일명 ‘센트럴 파크’였다. 뛰어난 패스와 공격 가담 능력을 갖췄지만 미드필드 후방 깊숙이 배치되는 바람에 압박이 쉽지 않은 피를로를 막기 위해 활동량과 수비력이 뛰어난 박지성을 중앙에 배치한 것. 박지성은 모기처럼 피를로를 괴롭혔고, 평소 80%를 상회하는 피를로의 패스 성공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전력의 핵을 묶은 맨유는 원정에서 3-2 역전승을 거두며 8강 진출의 교두보를 놨고 경기 후 “피를로를 잡기 위해 라커룸까지 따라 갈 기세였다”는 맨마킹에 대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2차전에서도 피를로를 봉쇄한 박지성은 팀의 4-0 대승으로 이어지는 세번째 골까지 기록하며 공수에 걸친 전천후 활약을 증명했다.
⑦ 2010년 3월 21일. 리버풀전 역전 헤딩골
박지성이 맨유에서 보낸 7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가장 빛난 때를 꼽으라면 많인 이들이 이 순간을 택할 것이다. 아스날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치열한 선두 경쟁을 펼치던 맨유는 리그 31라운드에서 라이벌 리버풀을 만났다. 최전방에 선 웨인 루니 아래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한 박지성은 2선에서의 공격 지원에 나섰다. 경기 시작 5분 만에 토레스에게 선제골을 내준 맨유는 6분 뒤 루니가 동점골을 터트리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놨다. 이후 치열한 양팀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승부는 후반 14분 났다.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온 플레처의 크로스를 박지성이 골문 앞에서 호쾌한 다이빙 헤딩 슈팅으로 연결, 리버풀 골망을 흔든 것. 골을 터트린 박지성은 맨유의 엠블럼이 있는 자신의 가슴팍을 치며 환호했고 올드 트래포드의 만원 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당시 박지성은 아스날, AC밀란, 리버풀 같은 강팀을 상대로만 골을 터트리며 강팀에 강한 자이언트 킬러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후반 41분 관중들의 기립 박수 속에 스콜스와 교체돼 나간 박지성은 맨유가 역전승을 거두며 다시 선두 자리를 되찾는 데 최고의 공헌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⑧ 2010년 11월 6일. 울버햄튼전 원맨쇼
호날두, 루니, 테베스, 긱스, 판 니스텔로이, 베르바토프 등 화려한 공격진을 보유했던 지난 7년 간 맨유에서 박지성이 주연이 된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2010/2011시즌 프리미어리그 11라운드 울버햄튼전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박지성에 의한, 박지성을 위한, 박지성의 경기였다. 시즌 초반 패배는 없지만 무승부가 누적되며 첼시와의 선두 경쟁이 버거웠던 맨유는 홈에서 울버햄튼을 맞아 쉽지 않은 경기를 펼쳤다. 주전 다수도 부상과 컨디션 관리로 인해 빠지며 사실상 박지성이 치차리토, 오베르탕 베베 등 경험이 부족한 동료들을 이끌며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했던 상황.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선 박지성은 중앙과 왼쪽 측면을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전반 추가시간 돌입을 앞두고 박지성은 선제골을 터트렸다. 페널티 지역 왼쪽 에서 플레처가 밀어준 침투 패스를 골문 정면에서 받아 침착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네트를 가르며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맨유는 후반 21분 이뱅스-블레이크에게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다. 앞선 10라운드까지 5승 5무를 기록했던 맨유는 후반 45분이 지나서도 1-1 상황이 계속되며 또 다시 무승부 악몽에 무너질 위기에 몰렸다. 그때 박지성이 다시 해결사로 등장했다. 후반 종료 직전 박지성은 페널티지역 왼쪽 측면을 드리블로 파고 든 뒤 기습적인 왼발 슈팅을 날렸고 공은 그대로 울버햄튼 골문 안으로 날아갔다. 박지성의 역전골이 터지고 경기는 종료됐고 맨유는 홈에서 귀중한 승점 3점을 챙기며 선두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경기는 맨유가 2010/2011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 후 결정적인 순간들 중 하나로 꼽혔다. 또한 박지성이 긱스, 스콜스 등과 함께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맨유의 대표 베테랑 중 한명임이 공인된 경기기도 하다.
⑨ 2010년 12월 14일. 아스날 킬러라 불린 사나이
박지성은 아스날에 특히 강하다. 맨유에서 보낸 7년 간 총 27골을 기록했고 그 중 20%에 육박하는 5골이 아스날을 상대로 나왔다. 그가 맨유에서 기록한 프리미어리그 첫 골 상대도 아스날이었고 2008/2009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도 아스날을 상대로 맨유 이적 후 챔피언스리그 첫 골을 터트리는 기쁨을 맛봤다. 박지성의 대(對)아스날 골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2010/2011시즌 프리미어리그 17라운드의 골이었다. 루니, 나니와 함께 공격 삼각편대로 나선 박지성은 전반 41분 나니가 측면에서 페널티 박스로 침투하며 띄워준 공을 날아올라 감각적인 헤딩 슈팅으로 연결했다. 아스날의 골키퍼 슈쳉스니가 몸을 날렸지만 막기에 역부족이었을 정도로 교과서적인 헤딩 골이었다. 맨유는 후반에 루니가 페널티킥을 실축하며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도 있었지만 박지성을 비롯한 선수들은 사력을 다해 한골 차의 리드를 지켰고 1-0 승리로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박지성은 2011/2012시즌에도 자신의 시즌 첫 골을 아스날을 상대로 터트렸다. 박지성이 골을 터트린 아스날전에서는 반드시 승리하는 기분 좋은 징크스도 이어졌다.
⑩ 2011년 4월 12일. 부상도 아랑곳 않은 투혼의 골
2010/2011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맨유는 첼시를 만났다. 또 한번의 유럽 정복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1차전 스탬포드 브릿지 원정에서 1-0으로 승리하고 돌아온 맨유는 홈인 올드 트래포드에서 2차전을 치렀다. 왼쪽 윙으로 선발 출전한 박지성은 한박자 빠른 패스로 공격을 조율했다. 위기도 있었다. 전반 20분경 왼쪽 눈두덩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 지혈을 마친 박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라운드 전역을 누비며 특유의 강철 체력으로 첼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맨유는 전반 43분 치차리토가 선제골을 터트리며 첼시의 기세를 눌렀다. 첼시가 4강에 가기 위해서는 두골이 필요했던 상황. 후반 들어 토레스 대신 투입된 드로그바가 첼시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후반 32분, 맞은 기회에서 골을 연결하며 동점을 만든 것. 하지만 그 희망은 채 1분도 가지 못하고 박지성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박지성은 동점골을 허용한 뒤 이어진 반격에서 긱스의 패스를 가슴 트래핑으로 떨군 뒤 왼발 슈팅으로 마무리하며 첼시의 골망을 흔들었다. 이날 골은 박지성의 2010/2011시즌 7호골로 맨유 합류 후 단일 시즌 개인 최다골 기록이기도 했다. 첼시와의 2007/2008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던 박지성으로선 당시의 한을 푸는 의미의 골이기도 했다. 기세를 몰아 4강에서 샬케04에 1, 2차전 모두 완승을 거두며 결승에 오른 맨유는 바르셀로나를 만났다. 박지성은 2전 3기의 각오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섰지만 그 당시 바르셀로나와 맨유의 경기력 차이는 확연했고 1-3으로 완패하며 또 다시 빅이어를 직접 드는 데 실패했다.
⑪ 2012년 2월 23일. 맨유에서도 캡틴 박이 되다
박지성은 대한민국만의 캡틴 박이 아니었다. 맨유라는 세계 최고의 클럽에서도 주장 완장을 차며 자신의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썼다. 박지성은 2011/2012시즌 유로파리그 32강전에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 출전했다. 아약스를 상대로 한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홈 경기였다. 긱스, 에브라, 퍼디난드 등 경험 많은 베테랑이 빠지자 박지성에게 경기 중 주장 자리가 넘어갔다. 과거 경기 중 긱스와 교체돼 들어가며 주장 완장을 찬 경우는 있었지만 당시는 다른 선수에게 전해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혼선으로 생긴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아예 감독으로부터 지명이 돼 경기 시작부터 완장을 찬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박지성 본인은 “나이 때문에 찬 것 같다”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지만 퍼거슨 감독의 생각은 단호했다. 당초 이날 경기의 주장은 필 존스가 거론됐다. 당시 만20세에 불과했지만 맨유 코칭스태프는 차기 잉글랜드 대표팀의 기둥으로 꼽히는 존스에게 특별한 경험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경기 전 박지성에게 완장을 채웠다. 그만큼 맨유에서 200경기 이상을 뛴 박지성의 경험을 믿고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박지성은 유럽 최고의 클럽에서 아시아 선수는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 왔다. 입단 당시 그에게 붙었던 유니폼 판매원의 편견은 완벽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 그가 맨유의 주장 완장까지 차게 되면서 불가능으로 보였던 일들은 하나씩 현실로 변했다. 박지성의 맨유 커리어에서 빛나는 종결과도 같았다.
글=서호정 기자
사진=(@GettyImages/멀티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