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히라츠카(일본)] 류청 기자= 사람들은 얼굴에 관심이 많다. 얼굴의 굴곡과 선 그리고 모양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얼굴이 수많은 과거가 쌓인 결과, 과거의 반영이라는 사실에는 무관심하다. 한국영이라는 선수가 브라질과의 친선전에 선발로 출전해 쉼 없이 태클로 공을 빼앗았다는 사실에는 열광하지만, 어떻게 공을 잘 탈취하는 선수로 성장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클머신. 한국영이 최근 대표팀에서 얻은 별명이다. 이것은 현재의 얼굴이다. 과거의 한국영이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지네딘 지단, 리오넬 메시와 같은 10번을 달았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지단의 활약에 매료돼 축구를 시작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드리블에 능했고, 골도 곧잘 넣었던 선수라고 이야기한다면 ‘농담 참 잘하는군’이라고 쏘아붙일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한국영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스스로 짠 계획대로 생활해왔고, 일본에서 영양보충을 충실히 하기 위해 저녁을 두 번 먹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태클머신’이라는 현재의 얼굴 뒤에 버티고 있는 한국영의 진면목이다. 우리는 일종의 오해를 해온 셈이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풋볼리스트’는 일본 히라츠카 현지에서 한국영을 만나 독자들보다 먼저 그런 경험을 했을 뿐이다.

- 2010년에 만 20세의 나이로 J리그에 진출했다. 계기는 무엇이었나?
문성고등학교 시절 감독님과 코치님이 미드필더로 성공하려면 일본에서 뛰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이야기했었다. 일본에 좋은 미드필더가 많고 체계적으로 잘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당시부터 관심이 있었다. 숭실대학교 진학을 앞두고도 제안이 왔지만, 이미 대학 진학을 약속했기 때문에 일본에 가지 못했다. 대학 1학년 때 다시 제안이 와서 결심을 굳혔다.

- J리그 진출 4년 차다.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인가?
따로 혼자 나와 살기 때문에 먹는 게 가장 큰 고민이다. 구단에서 결혼하지 않은 선수들을 위해서 고급 뷔페 식당과 계약을 했 놓았다. 그쪽에서 식사를 한다. 한 식당에 계속 가면 질리기 때문에 가끔은 다른데 가서 먹는다. (J리그가) 그런 시스템은 잘 돼있다. 리그 시스템까지는 모르겠지만, J리그는 선수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 축구화까지 관리해준다.

- 대학교 생활을 하다 외국에 진출해 프로생활을 하면 충격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충격은 크지 않았나?
모든 생활 자체가 달랐다. 훈련이 끝나면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훈련 시간이 긴 것도 아니었고, 나머지는 다 나의 시간이었다. 불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남아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하나 계획을 세웠다. 밤마다 개인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식사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든 저녁에 두 끼를 먹으려고 했다. 홍명보 감독님이 예전에 ‘어린 선수들은 일본에 가면 편의점 도시락 먹고 축구 한다’라고 얘기하셨다. 영양보충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집어넣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생활하지 않나?
일부러 못 오시게 했다. 아버지는 바쁘니 어머니 혼자 와 계셔야 하는데, 내가 훈련과 경기를 반복하고 만일 원정이라도 떠나면 혼자 계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게 싫어서 일년에 2~3번 정도 모신다. 처음에는 서운해하셨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다 알고 이해해주신다.

- 생활적인 부분 말고는 위기가 없었나?
처음에 왔을 때는 팀이 2부인 J1에 있었는데 게임을 잘 못 뛰었다. 엔트리에도 쉽게 못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왜 내가 못 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속상했다. 1년차 때는 혼도 정말 많이 났다. 감독님(소리마치 야스하르, 현 마츠모토 야마가 감독)에게 훈련 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라”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감독님이 일본에서 올림픽대표팀 지휘봉까지 잡은 분이었는데 모질기로 유명했다. 많이 지적 받고, ‘까이고’, 속상해하면서 성장한 것 같다. 그걸 그 다음 시즌에 들어서 느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어느날 훈련 중에 “너 몽유병 환자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닌데요”라고 대답하니 “왜 생각 없이 움직이느냐!”라는 말이 돌아왔다. 충격적이었다. 이제는 감사하다. 그 감독님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했다. 플레이스타일도 완전히 바뀌었다.

- 플레이스타일이 어떻게 바뀌었나?
일본에 오기 전까지 나는 많이 뛰지도 않았고, 내 앞에 오는 공만 처리하려 했다. 패스만 하면 된다는 느낌이었다. 원톱 바로 밑에서 움직이는 유형이었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도 프랑스월드컵에서 지단의 플레이에 매료됐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의 등번호도 10번을 주로 달았었다. 번호만 봐도 플레이스타일을 알 수 있지 않나? ‘드리블을 부드럽게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공이 너한테 가면 기대가 된다’는 말도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선수들을 막고 있다. 그 감독님이 바꿔놓았다.

- 변화가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왜 내 축구를 무시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경기에 나가기 위해서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후 감독님이 “나는 너의 공격적인 재능보다 수비적인 재능을 높이 사고 있었다. 우리 팀에 수비형 미드필더가 필요했기 때문에 변화를 원했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잘 따라와줘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다.

- 경기방식에 변화를 주면서 롤모델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지단을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쪽보다는 몸을 던지고 굉장히 많이 뛰는 선수들에게 매료된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나 자미 케디라 같은 살림꾼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질문: 국내에서 자신과 비슷한 역할을 소화하는 선수들을 꼽는다면?)(박)종우형이랑 조금 비슷한 것 같다. 딱 뭐라 말할 수는 없는데,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황지수 선수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만큼 많이 뛰지는 않는데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차단해야 할 때 한다. 그걸 경험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정말 몸으로 고생하는데, (황)지수 형은 머리를 잘 쓰시는 것 같다. (웃음)

- 스타일을 완전히 바뀐 뒤 ‘완성된 선수’가 됐다고 느꼈을 때는 언제였나?
정확하게 느낀 것은 올림픽대표팀에 처음 소집됐을 때였다. 대표팀에 들어가니 공 잘 차고 축구 잘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와 같은 스타일은 드물었다. 희소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더 발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수비형 미드필더로 순항하다가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부상으로 다시 한 번 좌절을 겪었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1달 반에서 2달 전 쯤에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발에 금이 간 게 나왔다. 당시 의사가 테이핑과 치료로 충분히 참고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그 말을 믿고 운동을 계속했는데 점점 상태가 심해졌다.

- 대회 시작 전에 결국 탈락하면서 큰 논란도 있었다.
영국은 잔디가 미끄러워 ‘쇠뽕(금속 스터드)’축구화를 신었는데, 그게 발에 훨씬 안 좋다고 하더라. 올림픽이 목표였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했는데 어느 날 결국 (발이) 부러졌다. 꿈이 날아가니 정말 절망적이었다.

- 개인적인 심정은 이해하지만, 팀을 위해서는 빨리 교체를 요청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요행을 바란 건 아니었다. 의사의 진단도 그랬고, 나도 끝날 때까지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약을 먹으면서 치료하면 버틸 수 있을 지 알았다. 일이 그렇게 된 후에 사람들의 비난은 달게 받았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듣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수술 후 예상보다 복귀가 빨랐다.
수술 후에 3~4개월 정도를 예상했는데 딱 2개월 만에 복귀했다. 회복속도가 빨라 의사도 놀랐다. “좋은 몸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빨리 돌아오고 싶어 재활을 열심히 했다. 마음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빨리 낫고 싶다는 마음으로 노력하니 정말 회복이 빨리 됐다.

- 대표팀에도 예상보다 빨리 발탁됐다.(최강희 감독은 2013년 6월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최종예선전’ 3연전을 앞두고 한국영을 호출했다)
최강희 감독님이 그렇게 빨리 대표팀에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홍명보 감독님이 취임한 후에도 별다른 기대를 안 했다. 준비만 잘해놓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 소집 소식을 들었다.

- 최근 대표팀에서 계속해서 경기를 나서면서 ‘태클머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야말로 뜨거운 관심을 받는 선수가 됐는데?
이상하게 대표팀에 들어갈 때마다 부담감이 컸다. 위축되고 긴장됐다. 내가 봐도 ‘왜 이정도 밖에 못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혼란스러웠다. 크로아티아와 아이티전을 치르면서 조금씩 마음을 놓게 됐다. 난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선수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못하면 소속팀에서 돌아가 다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경기에 나섰다. '보여줄 것만 보여주자'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브라질전에는 더 긴장을 풀었다. 브라질이 우리보다 잘하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우리는 도전하는 입장이었다. 마음 편하게 경기했다. (질문: 브라질이 정말 잘하나?) 진짜 잘한다! 표정도 여유롭다. 어느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더라. 개인기량이 뛰어나서 1대1로는 도저히 못 막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 브라질을 상대로 태클실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브라질전에서 수비적인 면에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 그러나 공을 뺏은 이후에 전개나 그런 부분은 아쉬웠다. 수비적인 부분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질문: 태클을 하는 노하우가 있는 것인가?) 계산하는 부분은 없다. 터치가 길거나 드리블이 길면 놓치지 않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홍명보 감독님은 런닝디펜스를 추구하시기 때문에 완벽한 게 아니면 들어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 하지만 그날 경기에는 이상하게 그런 상황이 많이 나왔다.

- J리그에서도 태클로 주목을 받고 있었나?
여기에서는 ‘어떻게 파울 없이 공을 그렇게 잘 빼앗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태클보다도 상대 선수의 공을 파울 없이 빼앗는 부분은 인정받고 있었다. 뭐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 우리가 상대의 공을 빨리 빼앗아야 공격찬스가 많이 나오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

- 그런데 한국에서는 ‘태클’하면 거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사실 한국영의 방식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을 다치게 하려고 태클을 한적은 없다. 공을 탈취하기 위해서 태클을 하는 거다. 거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여기에서도 거친 선수로 분류되지 않는다.

-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 올 시즌이 끝나면 자유계약 신분이 된다. 이적과 잔류 중에 어떤 선택을 할 예정인가?
유럽진출이 꿈이고 목표이긴 하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목표는 월드컵 본선 출전이다. 급격한 변화를 주면 월드컵에 못 나갈 위험성도 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큰 변화를 주지는 않을 생각이다.

- 유럽 리그 중에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곳은 어디인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좋아한다. 그런데 최근 독일 분데스리가에도 매력을 느끼고 있다. 지금 감독님이 워낙 독일축구를 좋아한다. 도르트문트라는 팀을 주제로 미팅을 할 정도다. 자꾸 보니까 조금씩 매료되는 것 같다. 정말 유럽에 진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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