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분의 시간이 무위로 흘러갔다. 전광판의 스코어는 0-0. 또 이렇게 승리는 물 건너 가는가 했다. 추가 시간 3분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 인천의 마지막 역습이 시작됐고 김남일의 패스를 받은 이규로가 오른쪽 측면 페널티박스 사각 부근에서 크로스를 올렸다. 문전에서 솟구쳐 오른 것은 설기현이었다. 설기현이 머리로 방향을 틀며 때린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상주 골문으로 날아갔다. 골키퍼 이상기가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손을 뻗었지만 공은 그 손을 맞고 골망을 흔들었다. 인천이 그토록 원했던 한 골이 경기 종료 직전 터졌다. 그리고 경기 종료. 지난 3월 24일 대전과의 홈 경기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가 맛 본 3개월여만의 K리그 승리였다.

허정무 감독이 물러나고 김봉길 감독대행 체제로 바뀌었지만 인천의 고난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다 잡았던 전북과의 홈 경기를 아쉽게 놓친 뒤에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됐다. 경기 내용은 좋았지만 승리와 승점 3점만큼은 쉽사리 손아귀에 쥘 수 없었다. 지난 FA컵 16강전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실업팀 고양 국민은행에게 승부차기로 패하며 또 한번 고개 숙여야 했다. 그리고 K리그 17라운드, 인천축구전용구장에서 열린 홈 경기에서 상주 상무를 만났다. 최하위 인천으로선 13위 상주를 반드시 잡아야 강등권 탈출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경기 전 만난 김봉길 감독대행은 선수들이 지난 스승의 날에 선물해 준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서울 원정 이후 모처럼 꺼내 입었다. 그는 “감독이 승리가 간절하다는 걸 직접 말하지 않아도 선수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었다”고 말했다. 비기고, 패하고, 또 비기고, 패하고. 감독 대행 부임 후 9경기(2010년 감독대행 기간 포함 14경기)째 승리가 없었지만 선수들이 불안해할 까봐 내색조차 못했던 김봉길 감독대행이었지만 마음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주도권을 잡고 상주를 몰아붙였지만 한교원의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가는 등 골 운이 따르지 않았던 인천은 90분 정규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웃을 수 있었다. 김남일, 이규로, 설기현으로 이어지는 올 시즌 인천이 야심 차게 영입한 이적생들의 합작품이 결국 중요한 순간 터져 나왔다. 승리가 확정된 뒤 김봉길 감독대행은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가 설기현과 안겼다. 설기현은 김봉길 감독대행을 서포터 앞으로 함께 데려가 승리의 만세삼창을 외쳤다.

사실 설기현의 골과 인천의 승리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설기현이 후반 막바지에 상대 수비수와 부딪히며 발목을 다쳤기 때문. 교체카드 한장이 남았던 상황에서 김봉길 감독대행은 공격수 유준수의 투입을 준비했다. 하지만 설기현이 사인을 보냈다. 계속 뛰겠다는 신호였다. 설기현은 “후반 들어 우리 윙과 풀백들이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며 좋은 크로스를 올려서 찬스가 올 거라고 생각해 그런 뜻을 나타냈다. 결국 감독님이 빼지 않고 기용해주셨고 잘 된 거 같다”고 말했다.

김남일과 함께 최고참으로 팀을 이끌고 있는 설기현은 승리에 대한 간절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유럽에서만 9년을 뛰었던 그에게 K리그에서의 1승이 그토록 힘들었던 것. 그런 상황은 스트라이커 설기현이 아닌 축구 선수 설기현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예전엔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책임감이란 단어에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인천 와서는 달라졌다. 결과가 계속 안 좋으니까 고참인 내가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봤다. 남일이 형과 함께 팀이 잘 될 수 있으면 뭐든 해봤다. 그런데도 안 되던 승리가 이렇게 오는 것 같다.”

“개인적으론 오늘 승리에서 가장 축하 받아야 할 분은 김봉길 감독님인 것 같다. 쉽지 않을 상황일텐데 선수단을 굉장히 편하게 해주셨다. 항상 참으시고 다음 경기에 잘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옆에서 볼 땐 정말 화가 날 거 같은데 다음 경기 생각하면서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과연 인천은 이번 승리를 대반전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설기현은 다음에 있을 성남과의 홈 경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분위기를 살려서 연승으로 가느냐, 아니면 다시 떨어지고 마느냐가 거기에 걸렸다는 것. 현재로서는 반전을 약속할 수 없지만 성남전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면 그때는 인천이 상대가 두려워 하는, 쉽지 않은 팀이 될 거라는 게 설기현의 생각이었다.

3개월만의 승리, 모처럼 환호하는 서포터즈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기쁨을 만끽한 설기현. 그는 “감동적인 승리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경기를 지켜 본 모든 이들은 이렇게 말할 거 같다. “설기현 당신이 감동이었다”고 말이다.

인천=서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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