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폴란드)=서형욱] 공동 개최라지만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꽤나 먼 나라다. 한 나라 안에서의 이동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라 두 개 나라를 한 사람이 커버하기는 버거운 게 사실. 그래서 대회 시작 뒤로 줄곧 우크라이나에서 열리는 경기만 보러 다녔다. 하지만 조별 리그가 끝난 마당에 우크라이나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낭비란 생각이 들었다. 8강 앞 2경기가 폴란드에서 벌어지는 탓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작 1시간 반 날아가는 항공기 요금이 지나치게 비싼 것(왕복 600달러)은 슬픈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TV로 경기를 볼 수야 없는 노릇.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포르투갈-체코戰과 그단스크에서 열리는 독일-그리스戰을 보기 위해 간단히 짐을 챙겨 2박 3일 일정으로 키예프 숙소를 나섰다.

키예프에서 바르샤바로

콜택시 회사에서 보내준 택시는 공교롭게도 한국산 승용차였다. 숙소 앞에서 기다리는데 D사에서만든 라노스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워낙 오래된 모델이라 차체도 꽤나 더러웠는데, 조수석에 앉아 계기판을 훔쳐보니 그간 달린 주행거리가 무려 56만km를 넘는다. 영화배우 못지 않은 외모의 젊은 택시 기사 총각은 영어로 몇 마디 인사를 건네더니 문 네 개에 달린 창을 모두 활짝 열어둔 채 고속 질주를 시작했다. 연식이 그리 오래된 차량치고는 성능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울의 심야 택시 저리가라할 정도로 거친 곡예 주행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했다. 덕분에 20분만에 공항에 도착한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다시 타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 키예프의 총알 택시였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2시간 정도 늦게였다. 우크라이나 항공(아에로스비트) 측은 별다른 사과나 해명도 없이 오후 2시발 비행기의 이륙 시간을 3시30분으로 미뤘다. 자칫하면 경기를 놓치겠다 싶어 벤치 옆 자리에 앉은 노신사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한 답이 돌아온다. “잇츠 노멀 히어.” 이런 일이 보통이라니. 하긴, 뜻밖의 사태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해하는건 가만보면 나뿐인 것 같았다. 아이구, 두야.


키예프 공항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내가 만드는게 더 맛있을것 같은' 연어 파스타. 가격은 9천원. (왼쪽) 왕복 80만원짜리 국제선에서 제공하는 간식치고는 참 단출하다. 아에로스비트 항공의 스튜어디스가 "샌드위치~"라며 건넨 기내식.

며칠 사이 키예프 나름의 소박한 분위기에 경도되어 있던 터라, 막상 당도한 바르샤바의 휘황찬란한 풍경에 말그대로 입이 떡 벌어졌다. ‘동유럽’과 ‘공동개최’라는 단어가 두 나라를 한데 묶고 있긴 하지만,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실상 다른 시대의 공간처럼 큰 격차를 느끼게 했다. 키예프가 20세기 도시였다면, 바르샤바는 21세기의 대도시 느낌이랄까. 여느 서유럽 도시 못지 않게 분주하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바르샤바는 모든 면에서 키예프를 훨씬 앞질러 있었다. 즐비한 고층 건물과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세련된 옷차림, 특히 시내 교통 수단의 규모나 설비 수준은 키예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트램을 타고 도착한 바르샤바 경기장 주변의 분위기는 한층 뜨거웠다. 공동 개최국들이 나란히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신 탓에 열기가 많이 식지 않겠느냐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수 많은 암표상들이 단속 경찰의 눈을 피해 ‘띠껫~’을 읊조리며 서성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이를 제지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기 시간이 한참 남아서인지 구매자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인파 속에서 살아남은 팀들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으로 몰려든 수 많은 축구팬들의 표정은 여전히 흥미로웠다.

바르샤바 8강 - 체코 vs 포르투갈

체코와 포르투갈의 8강 첫 경기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역시 로시츠키의 출전 여부였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폴란드전에 결장한 그는 대회 기간 중 캠프를 벗어나 치료를 받는 등 8강전 출전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8강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는 데에 실패했다. 로시츠키와 호날두의 대결 구도를 기대했던 축구팬들에게는 섭섭한 일이었지만 어쩌겠나 그게 축구인 것을.

체코의 빌렉 감독이 비장의 카드로 내민 것은 스물 두 살의 신출내기 블라디미르 다리다(V.Darida)였다. 수비수 푸딜이 부상으로 빠져 보결로 유로2012 최종 엔트리에 합류한 그는 대회 직전에야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신예다. 그나마 선발로 출전 경험이 없어 유로2012 8강전을 통해 A매치 선발 데뷔전을 갖게 된 셈이었다. 체코로서는 굉장한 모험이자 의외의 한 수였던 셈이다.

체코가 A조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것은 뜻 밖의 성과였다. 첫 경기에서 러시아에게 크게 패하며 망신을 당했던 체코는 이후 2경기를 슬기롭게 치러내며 조 선두로 8강에 오르는 저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체코의 선전은 거기까지였다. B조 2위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체코는 전반전에 반짝 찬스를 제외하곤 이렇다할 힘도 써보지 못한 채 포르투갈에게 일방적으로 얻어 맞았다. 체흐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에 힘입어 실점은 1골에 불과했지만 뒤로 내려 앉은 수비와 촘촘하지 못한 미드필드의 움직임은 포르투갈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과감하게 내세운 다리다는 전반에만 혼자 무려 6.7km를 달리는 엄청난 활동량으로 로시츠키의 빈 자리를 메우고저 했지만 별다른 실속을 차리지 못한 채 후반 일찌감치 교체되고 말았다.

양 팀 선수들 가운데 가장 돋보인 선수는 체흐가 막아선 철의 장벽을 기어이 뚫어낸 포르투갈의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 왼쪽 날개로 선발 출전한 호날두는 이전 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격 진영 여러 곳을 종횡무진 누비며 포르투갈이 얻어낸 대다수 찬스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앞선 경기에서도 두 골에 더해 골대를 두 번이나 때리며 위용을 과시했던 그는, 이날 경기에서도 터닝슛과 프리킥으로 골대를 두 번이나 더 흔들리게 만들었다. 체코는 포백 앞에 위치한 휩시만이 호날두의 중앙 침투를 견제하며 분전했지만 결국엔 그에게 헤딩 결승골을 내주며 씁쓸하게 대회를 마감해야 했다. 전반전의 오버 페이스에서 골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체코는 후반 내내 급격히 저하된 경기력으로 고전해야 했다. 이날 체코는 전후반 통틀어 단 2개의 슈팅(유효슈팅 0개)만을 기록했다.

경기가 끝나고 스타디움 미디어 센터를 빠져나온 시각이 새벽 1시였지만, 도시 풍경은 여전히 활기찬 편이다. 늦은 저녁을 챙겨 먹기 부담스러운 분위기는 키예프나 바르샤바나 마찬가지였지만 스카이라인을 비추는 밤 깊은 도시의 불빛들은 우크라이나에서는 볼 수 없던 바르샤바의 불야성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스타벅스 매장은 두 나라 수도의 차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지표나 다름없다. 이제야 바르샤바로 넘어온 것이 괜스레 아쉬울만큼 인상적이던 폴란드의 첫날 밤은 이렇게 저물었다. 아니, 그단스크를 거쳐 곧장 우크라이나로 돌아가야하니 실제론 바르샤바의 '유일한 밤'이라 해야 적당한 표현이다. 문득, 둘 중 한 나라만 경험한 사람에게는 유로2012가 매우 다른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Did you know? 바르샤바(Warsaw)의 영미권 발음은 '워-쏘'다. 그야말로 철자 그대로 읽는 셈이라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막상 공항에서 만난 영국 청년이 그렇게 발음하는걸 처음 들었을 때에는 설마 그게 '바르샤바'일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촌스럽지만 이번에 처음 알았다. 미안하다.

저작권자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