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취재팀= 요즘 대세라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진짜사나이’는 웃음, 재미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던 군생활을 다루고 있다. 상명하복과 군율만 있는 줄 알았던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고, 곳곳에 재미가 숨어 있었다. 만약 K리그에서 ‘진짜사나이’에 출연할 선수를 뽑는다면 누가 적합할까? 아마 대부분의 팬들은 1순위로 이 선수를 꼽을 것이다. 포항스틸러스의 수비수 김원일(27). 해병 1037기 병장 만기제대라는, 프로 선수로서는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는 그는 늘 해병대 출신인 데 대한 자부심으로 넘친다.

체육특기생으로 ‘축구명문’ 숭실대에 입학한 김원일은 재학 중이던 2007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는 성공을 꿈꾸는 다른 축구 선수들과 달리 ‘막군(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상무, 경찰청이 아닌 일반 현역 입대를 일컫는 은어)’을 택했다. 한창 때인 20대의 선수 생활에 2년을 병역 문제로 빠지는 건 ‘심각한 손해’라는 게 대부분 축구 선수들의 인식이다. 김원일은 그 불문율을 깨고 현역, 그것도 자부심 강하기로 소문난 해병대를 다녀왔다.

2009년 드래프트를 통해 명문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고 2011년부터 팀의 중심으로 도약했다. 올 시즌은 확고부동한 주전이다. 리그 26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2경기를 쉬었는데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으로 인한 체력 안배 차원에서, 그리고 경고누적으로 인해 각각 1경기씩을 빠졌다. 출전한 경기에선 모두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왔음에도 리그 1위를 질주하고 있는 포항의 주전으로 올라선 ‘진짜수비수’다.

김원일을 만났다. 그는 ‘해병대 군복을 입고 와서 인터뷰를 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에게 해병대는 마지 못해 간 고통의 기억이 아닌, 자부심과 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준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였다. 최근 해병대 1사단에 복무 중인 축구팬이자 포항팬인 행정관으로부터 선물 받은 신형 전투복과 야상까지 챙겨 입고 등장한 그는 해병대의 자랑이었다.


▲ 아기병사 박형식 보면 옛 생각 난다
통진중, 통진고를 나와 숭실대까지 갔지만 김원일은 “온전히 내 실력보다는 당시 함께 입학했던 축구 잘하는 친구 덕분에 진학한 것”이라고 쿨하게 인정했다. 대학 시절 김원일은 자신의 실력으로 실업무대만 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학년 때까지 축구부원으로 크게 빛을 보지 못하자 축구부를 그만두고 일반 학생으로 전환하는 동료들을 보며 그 역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김원일이 대학 재학 중 해병대에 간 것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무엇을 하든 군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포항으로 내려오는 길에 적잖은 사람들이 고속열차 안에서 ‘진짜사나이’를 보고 있었다. 김원일을 만나서도 그 얘기부터 꺼냈다. 그 역시 ‘진짜사나이’의 애청자였다. “저도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진짜 재미있어요. 방송이라서 그런지 실제로 우리가 하는 것 이상의 FM식으로 하는 거 같아요. 아기병사로 나오는 박형식씨가 진짜 갓 부대에 배치된 이병처럼 어리버리할 때는 제가 정신 못 차리던 그 시기가 생각나서 너무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맛다시, 군대리아, 전투식량, 건플레이크 등 군대식품도 최근 재조명을 받고 있다. 김원일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건플레이크는 군생활을 하면 상병을 달아야 먹을 수 있어요. 제가 일병일 때 선임이 맛 보라고 몰래 주는 거예요. 화장실에 들어가서 혼자서 물 내리면서 먹었던 기억이 나요. 6.25전쟁 기념 전투식량 먹기 대회가 있었는데 당시 유통기한이 즈음한 전투식량을 밀어내기도(처리한다는 군용어) 했고요. 훈련도 안 하는데 전투식량 열심히 먹고 그랬죠.”

김원일은 자신이 열혈병사에 해당했다고 말했다. 특히 구멍병사인 후임을 에이스로 키우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주임무는 IBS(작은 보트를 이용한 기습 특공)였다. 보트를 타는 게 그의 임무였다. 일반 보병 중에서는 제일 힘든 보직이었다. 제주와 김포로 파견도 많이 나갔다. 고향인 김포로 갈 때는 육군공병트럭을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자신의 부모님이 계시는 집과 한창 축구에 매진했던 고등학교 앞을 지나갔다. 김원일은 “동기들은 학교에서 축구하고 있는데,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어서 씁쓸했어요. 뛰어내리고 싶었고요”라고 고백했다.

군생활은 모범적이었다. 말년 병장이 돼서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아침 구보에서 늘 최일선에 섰다. 최근 그가 프로에서 맹활약을 시작하며 해병대 내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김원일 역시 당시의 추억이 특별하다. 그는 “해병대에서 촬영을 한다면 꼭 저도 출연하고 싶어요. 김흥국 선배님이 저랑 같은 소대 출신이에요. 전설로 남아있으세요. 후배들을 지나치게 사랑으로 대하셔서 주계병(해병대에서 취사병을 일컫는 말)으로 강제 전출 갔다는 얘기도 들었고요”라며 해병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신이 나는 표정이었다.

포항 선수들 중에 이 선수만은 군기 한번 바짝 들게 해병대에 보내버리고 싶다 하는 선수가 있을까? 김원일은 심각한 고민 없이 금세 답했다. “고무열요. 경기 중에 정신줄을 놓을 때가 많아서 한번쯤 갔다 오면 골 결정력이 아주 상승할 거 같거든요.”


▲ 나는 군대스리가의 즐라탄이었다
김원일이 해병대의 전설로 남은 것은 그의 숨은 특기 덕분이었다. 군대에서는 축구도 특기다. 잘생긴 군인은 인정받지 못해도 축구 잘하는 군인은 환영받는 곳이다. 축구로 군생활이 쉽게 풀리는 이들이 많았는데 김원일도 그런 경우였다.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에 배치된 김원일은 병사의 신분으로 스틸야드를 찾았다. 포항스틸러스와 해병대의 협조 체제로 홈 경기가 열리면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007년 포항의 K-리그 우승과 2008년 FA컵 우승을 지켜보며 제대 후 선수생활에 대한 꿈을 이어나갔다.

군복무를 하면서 틈틈이 축구도 했다. 해병대 대표 선수로 나섰다. 2008년에는 군내 축구 대항전인 군대스리가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축구 때문에 군생활이 완전 편했던 건 사실이에요.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첫 주말에 새 보급형 축구화를 제게 주더라고요. 이미 자대배치 전에 중대에 축구 선수 출신이 온다는 소문이 돌아서 다들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중대장님이 오셔서 ‘실력 한번 보자. 군대 축구는 틀릴걸?’이라면 일종의 입단 테스트 같은 걸 하셨어요.”

김원일은 경기에 투입되자마자 자신을 못미덥게 보는 주변의 눈치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수비수였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치고 들어가서 패스와 돌파로 골까지 마무리했다. 그를 한번 투입한 뒤 중대장은 “역시 선출(선수출신)이 틀리다”며 감탄사를 보냈다. 그가 빛날 기회는 곧바로 주어졌다. 이병 시절 사단 체육대회가 있는데 김원일의 활약으로 자신의 연대가 우승을 했다. 그 덕분에 이병에게는 파격적인 14박 15일 휴가가 나오기도 했다.

김원일은 군생활 중이던 2008년 축구로 한 차례 매스컴을 탄 적이 있다. 삼군 축구대회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전반에만 해트트릭을 달성하고 교체돼 나왔다. 결국 대회 MVP에 득점왕까지 차지해 그의 스토리가 화제가 됐다. 해병대 대표로 해군 작전사령부와 붙었는데 UDT 출신들에게 지고 온 일도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해병대는 ‘또 지면 죽는다’며 정신력을 다졌다. 마침 삼군 대회에 나갔는데 해군 작전사령부와의 리벤지매치가 성사됐다. 김원일의 활약으로 해병대는 3-0 완승을 거뒀다. 초반에 이미 다득점이 되자 너무 크게 이기면 진급 심사 시 눈치가 보인다고 김원일을 전반이 끝나자 빼는 일도 있었다. 그의 활약을 격려하기 위해 포상휴가가 쏟아졌다. 주변에서는 축구로 포상휴가를 독점하는 그를 ‘축구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군대스리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다. 김원일은 프로와는 수준 차가 나지만 군대스리가에서 배운 정신력이 지금의 선수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군대축구의 핵심은 몸싸움이에요. 밀리지 않는 것, 공이 중간에 끼이면 어떻게든 자기 공으로 만드는 능력요. 그걸 못해서 쫄거나 밀리면 기합이 빠졌다고 욕을 듣습니다. 반대로 거기서 이기면 역시 기합이 있다고 칭찬 받고요. 해병대는 안되면 될 때까지의 정신이잖아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이 막군을 다녀왔음에도 제가 계속 선수생활을 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고 있어요.”


▲ 스틸야드의 관중석에서 그라운드로
축구에 대한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입대한 해병대 생활이었다. 군대스리가의 스타가 됐지만 축구에 대한 김원일의 갈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새벽에 초소 근무를 들어가면 하늘에 별이 쏟아질 만큼 떠 있어요. 그런데 내 군생활은 627일이 남았으니 하늘을 보면서 미치겠더라고요. 군대 있을 때 제 동기들이 잘 해서 숭실대가 우승을 했어요. 결승전이 중계가 됐는데 선임들이 ‘너네 학교 아니냐’고 말하면 정말 축구 하고 싶었어요. 스틸야드로 경기를 보러 갔는데 대학 후배들이 프로 선수가 돼 원정 경기를 오면 걔네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했고요.”

‘제대 후 다시 축구를 할 수 있을까’라며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줬다. 김원일의 어머니는 핸드볼 국가대표 1세대 스타인 장천신 씨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여자핸드볼의 대들보였다. 그에게 축구를 권한 것도 어머니였다. 김원일은 김포 이회택축구교실 4회 출신이다. 제대를 앞두고 선수생활을 고민할 때 김원일의 어머니는 숭실대 축구부로 찾아갔다. 당시 숭실대 감독은 현재 부산아이파크를 이끌고 있는 윤성효 감독이었다.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 학교에 찾아갔고 윤성효 감독을 만나 사정을 했다. 윤성효 감독도 “원일이가 해병대에서도 축구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헌신 속에 김원일은 다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학교 다닐 때 윤성효 감독님이 무서웠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는 감독님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본 적이 없어요. 따로 면담한 적도 없었고요. 관심 밖의 선수였죠. 어머니가 운동 선수 출신이라 그런지 감독님이랑 통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감독님이 받아주기로 하셔서 제대 후 다시 숭실대 축구부에 들어가게 됐어요. 제가 군대갈 때 동기 12명 중 저 포함 6명이 그만뒀거든요. 곽광선(수원), 박주호(마인츠), 임경현(전남)이 동기에요. 그만둔 친구들 중 돌아온 건 저 뿐이었어요.”

김원일은 소중한 말년휴가를 포기하고 숭실대 축구부에서 개인훈련을 하며 몸을 만들었다. “휴가 때 인사 차 윤성효 감독님을 찾아갔는데 9박 10일간 쉰다는 얘기를 들으시더니 집에 가지 말고 여기서 운동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전역하고도 김포 집이 아닌 숭실대 전지훈련지로 갔어요. 포항에서 버스 타고 바로 김해로 갔죠. 그 다음날 바로 연습경기를 뛰었고, 1주일 뒤에는 제주도로 가서 국가대표팀과도 경기를 했어요. 기성용, 이청용 다 나온 경기였죠. 결과요? 0-6이요.(웃음)”

축구부로 복귀한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졸업 후 실업팀에라도 가자, 프로는 못 가도 일단 축구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라며 당시 각오를 회상했다.

대학에서 2년을 더 보내고 그는 졸업반인 2009년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보통은 어디서 뽑아갈 거라고 하는데 전 어떤 팀도 얘기가 없었어요. 친구들은 드래프트 현장에 가는데 저는 인터넷으로 봤어요. 번외라도 될까 싶어서 기대를 했는데 6순위에 제 이름이 나오더라고요. 그것도 포항이었죠. 한번 더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하는 생각에 처음엔 감사했는데 생각해 보니 포항이 당시 멤버가 워낙 쟁쟁해서 바로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냥 가서 열심히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갔죠. 그래도 군대에서 축구부로 복귀하고, 프로까지 가게 되고, 그 동안 목표한 게 하나씩 이뤄졌으니까 새 목표를 잡으면 포항에서도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 귀신 잡는 해병, 킬러 잡는 수비수로 스틸야드에 살고 싶다
김원일은 포항 입단 후 황재원, 김형일, 김광석, 조란 같은 국가대표급 선수나 외국인 선수와 경쟁해왔다. 신인 시절엔 경쟁이라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차이가 컸다. 김원일은 “그냥 형일이 형, 재원이 형과 함께 훈련하고 밥 먹는 게 신기했어요. 신인 때 제가 팀의 여섯 번째 센터백 옵션이었는데 부상자가 발생하고 기회를 살리다 보니 어느새 세 번째 옵션이 돼 있더라고요. 조금만 더 부족한 걸 메우고 노력하며 투입될 거 같아서 휴가나 외박을 받아도 놀러 안가고 클럽하우스 지키며 준비를 했어요. 나중에 감독님과 코치님이 더 큰 기회를 주시더라고요.”

구단 관계자는 김원일을 클럽하우스의 대장이라고 부른다. 주전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지금도 클럽하우스에서 산다. 장기 휴가가 아니면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송라클럽하우스를 떠나지 않고 남아 휴식을 취하거나 개인 훈련을 한다. 황선홍 감독은 그런 김원일의 솔선수범을 높이 평가하고 그가 보여준 헌신과 책임감에 맞는 기회를 줬다. 김원일은 2011년부터 서서히 주어진 기회를 살렸고 2012년 외국인 선수 조란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김광석과 함께 주전 센터백으로 자리 잡았다.

제공권과 준족, 강력한 맨마킹 실력을 가진 김원일은 K리그 공격수들이 가장 귀찮아 하는 수비수다. “외국인 선수들과 경기 중에 경합을 하면 서로 욕도 해요. 제가 그 친구들 잡아야 하거든요. 광석이 형이 뒤에 있기 때문에 빠른 선수들을 미리 제가 막는 역할을 해요. 돌파력이 좋은 선수들을 하프라인 앞에서 1차로 저지해야 합니다. 그걸 실패하면 저는 의미가 없는 선수에요. 서울의 데얀, 전북의 이동국 두 선수가 제일 막기 힘들어요.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어요. 공 오는 데 늘 발이 가 있고, 수비가 막아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공에 시선이 뺏겼을 때 이미 사라져서 골을 넣고 있어요. 그 공격수들을 완벽하게 막는 그날까지 계속 노력해야죠.”

김원일은 SNS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일기장에 쓴다. “SNS는 양날의 검 같아요. 제 생각을 썼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수동적으로 답변 정도 하는 정도에요. 속마음을 굳이 그 자리에 할 필요가 없는 거 같아요. 가끔 뭔가 내 심정을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써서 뭐 하나 싶거든요. 그래서 일기를 써요. 축구, 그리고 인생에 대한 걸 정리해요. 굳이 잘 나가는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도 우울하고요.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힘든 상황을 견뎌왔다는 자부심이 있다는 겁니다. 대신 그 자부심이 허세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고요. 누구나 군대 가는 건데 그게 자랑은 아니잖아요. 한달 전에는 스마트폰을 피쳐폰으로 바꾸려고 했어요. 저 자신을 컨트롤해야 계속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거든요.”

김원일의 소원은 국가대표가 아니다. 지금 자신이 속한 포항스틸러스에서 말뚝을 박는 것이다. “저는 포항에서 계속 하고 싶어요. 짬이 더 찼으면 좋겠어요. 광석이 형한테 물어봐요. 신인 때 형은 누구랑 같이 있었어요라고 하면 ‘(홍)명보 형이랑 같이 있었다’고 해요. 신기하잖아요. 나중에 누가 저한테 그렇게 물어볼 때 (김)기동이 형이랑 같이 공 찼다고 하면 후배들이 신기해 할 거 아니에요. 국내의 다른 팀은 제 실력을 그리 원하지도 않겠지만 가고 싶지도 않고요. 공부하기 위한 차원에서 해외로 나간다면 몰라도 포항에 오래 남을 겁니다.”

“축구선수로서 꿈이 엄청 높은 건 아니에요. 국가대표를 꼭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포항 스틸러스라는 팀에서 인정받고 싶어요. 계속 경기 나오고. 소리 없이 꾸준한 선수. 레전드라고 하잖아요. (황)진성이 형은 무조건 될 거고, 광석이 형도 좀 더 하면 될 거라고 보거든요. 저도 20년 뒤, 30년 뒤 포항의 전설들이 언급될 때 거기 들어갈 수 있다면 더 바람이 없겠어요. 포항은 운명 같은 팀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계속 축구할 수 있게 해 준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계속 운동하고 싶어요. 지금도 어머니와 아버지, 일가 친척까지 제가 홈 경기를 하면 김포에서 새벽에 차 몰고 포항까지 와서 경기장 주변에서 싸 온 김밥 드시고 경기 보고 올라가세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삶을 보내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요.”

사진=포항스틸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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