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늙음은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에서 노시인 이적요가 외친 대사는 노인이 아닌, 한 남자이고 싶었던 이의 열망을 잘 대변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할 뿐이다. 육체가 늙어가면 정신은 약해진다. 절정의 순간은 그저 옛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한 축구 선수가 있다. 1976년생, 올해 만 36세. 한때 그에겐 세계 최고라는 칭호가 붙었었다. ‘동유럽의 호나우두’, ‘무결점의 스트라이커’. 안드리 셰브첸코라는 이름은 그렇게 전세계 축구팬들의 뇌리에 각인이 됐다. 2004년 발롱도르 수상, 챔피언스리그와 세리에A 득점왕 두 차례. 1999년 AC밀란 유니폼을 입은 뒤 7년 간은 분명 그의 시대였다.

하지만 2006년 여름 첼시로의 이적을 택한 것이 축구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 당시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최고 이적료 기록인 4,400만 유로에 로쏘네리 유니폼을 벗고 푸른색 유니폼을 입었지만 2년 간 그가 남긴 기록은 48경기 9골이 전부였다. 밀란에서 7년 간 무려 212골을 넣었던 그 득점기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참담한 부진이었다. 고향과 같은 밀란으로 임대를 떠나며 부활을 꿈꿨지만 그조차도 실패로 끝났다. 2009년 여름, 셰브첸코는 자신의 축구 경력이 시작된 디나모 키예프로 떠났고 그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축구 인생의 원점에 선 그때부터 셰브첸코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였다. 폴란드와의 공동개최가 결정된 조국에서의 유럽선수권을 준비하는 것. 디나모 키예프에서 차분히 옛 기량을 되찾아 간 셰브첸코는 2010/2011시즌 32경기에서 16골을 기록했고 팀을 슈퍼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우크라이나 대표팀의 올레그 블로힌 감독은 그에게 주장 완장을 맡겼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 온 중원의 사령관 아나톨리 티모슈크가 있었지만 블로힌 감독은 최고참 선수에게 더 큰 책임감을 부여했다.

그리고 드디어 개최된 유로 2012.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향한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의 8강 진출은 물론 1승조차도 부정적으로 봤다. 그들은 공동개최국의 자격으로 처음 유럽선수권에 초대된 약체에 불과했다. 지난 세 번의 대회 예선에서 모두 초라한 성적으로 탈락했던 우크라이나에게 유럽선수권은 악연의 무대였다. FIFA랭킹에서도 52위로 대회 참가국 중 폴란드 다음으로 낮았다.

대회 개막을 앞두고는 서유럽 미디어들이 우크라이나 내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최빈국을 향한 경멸의 눈초리였다. 그런 시선이 우크라이나 국민들로 하여금 오기를 끓게 만들었다. 그라운드 위의 셰브첸코, 그리고 벤치의 블로힌 감독. 30여년 격차를 두고 발롱도를를 차지한 우크라이나의 두 전설적인 축구인에게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해야 하는 의무가 지어진 것이다.

운명의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월드컵과 유럽선수권의 단골손님 스웨덴이었다. 셰브첸코 앞에는 그가 전성기를 맞았던 AC밀란에서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섰다. 경기 전 주장으로서 서로 악수를 나눈 밀란의 전현 영웅들은 그라운드에서 서로의 능력을 뽐냈다. 먼저 빛난 것은 즐라탄이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서 전방과 2선을 오가며 활발한 플레이를 펼친 즐라탄은 강력한 헤딩 슛으로 골포스트를 맞추더니 후반 7분 감각적인 아웃사이드 슛으로 선제골을 만들었다.

즐라탄과 반대로 전반의 셰브첸코는 힘과 높이를 동시에 지닌 스웨덴의 수비수들을 상대로 버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는 무결점의 스트라이커도, 화려한 드리블과 문전에서의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하얀 호나우두도 아니었다. 전설도 늙는다는 현실을 체감하게 했다. 하지만 클래스는 살아 있었다. 페널티 박스 안에서 상대 선수를 흔드는 짧은 순간의 번뜩이는 움직임과 마무리만큼은 힘차게 박동했다.

즐라탄에게 선제골을 내준 지 3분 만에 야르모렌코의 왼발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하는 장면은 셰브첸코에게 스트라이커의 야성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빠르게 날아가는 크로스를 쫓아, 상대 수비수 멜베리와의 경쟁에서 이기며 몸을 던져 연결한 헤딩 슛은 스웨덴의 골망을 흔들었다. 6분 뒤에는 경험의 힘을 보여줬다. 코너킥 상황에서 코노플리얀카가 니어포스트에 맞춰 올려준 공을 빠른 움직임으로 파고 들어가 헤딩으로 연결했다. 셰브첸코의 머리를 떠난 공은 골포스트와 스웨덴 수비수 사이의 아주 작은 틈으로 날아가 골망에 꽂혔다. 그때 셰브첸코를 놓친 선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즐라탄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모든 국민이 염원했던 첫 골을 황선홍이 열었던 것처럼 셰브첸코는 자신의 109번째 A매치에서 조국을 위한 47번째, 48번째 골을 터트리며 대표팀 커리어의 마지막 축제를 열었다. 후반 36분, 교체되어 나가는 그를 향해 키예프 올림픽 스타디움의 5만여 홈 팬, 그리고 경기장 밖에 있는 더 많은 국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좀처럼 앉지 못하고 한 골 차의 리드에 안절부절 못하던 셰브첸코는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며 우크라이나의 사상 첫 유럽선수권 승리가 결정되자 아이처럼 기뻐하며 뛰어나갔다. 감독 블로힌에 안기며 환호하는 그 순간은 지난 3년 간 그가 학수고대했던 순간이었다. 중계 카메라는 축구인생의 드라마 그 마지막 회를 멋지게 시작한 영웅을 계속 따라다녔다. 그는 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을 향해 양손을 치켜들며 화답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셰브첸코는 복받치는 감정을 표현했다. “지금 수많은 감정에 휩싸여 있다. 우리의 조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유럽선수권 첫 경기를 치렀고 승리했다.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우리를 지켜 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 정말 좋은 경기를 했다. 코너킥에서의 역전골은 철저하게 준비된 장면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평가전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합심해서 오늘을 준비했고 멋진 경기를 해냈다. 오늘 밤은 국민들과 즐기고 싶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겠다. 매 경기를 내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뛰고 있다."

환상적인 밤, 셰브첸코와 우크라이나가 그리던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됐다.

바르샤바(폴란드)=서호정 기자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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