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바닷속에 계실 것 같다. 그걸 좋아하실 것이다.”

어머니가 바 다에서 실종되자 그의 아들이 했던 말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런 망나니’라는 욕을 들어도 무방한 상황이다. 어머니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 앉아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데, 아들이 태연하게 답한 듯 보인다.

상황을 살펴보면, 아들인 알렉세이 몰차노프를 욕할 이는 없다. 아들도, 스페인 이비사섬 근처 바닷속에서 실종된 엄마 나탈리아 몰차노바도 모두 프리다이버다. 몸에 아무런 장비도 걸치지 않고(물론 10km의 추는 메달고) 물 속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는 게 프리다이빙이다. 유명한 프랑스 영화 ‘그랑 블루’에서 주인공 자크의 직업이 바로 프리다이버다. 자크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물안경을 벋고 바다로 들어간 것처럼, 현실의 세계챔피언 몰차노바도 바다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아들은 엄마를 따라 바다에 들어갔을 게 분명하다. 처음에는 축축한 수트가 싫었을 지도 모르고, 엄마의 무모한 도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엄마를 이해했을 것이다. 엄마보다는 바다에 더 이끌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도 프라디이버로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 산소통도 메지 않고 100m 아래로 내려가는 프리다이버, 엄마의 권유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프리다이빙은 그저 스포츠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몰차노바)

“바다에 내려갔을 때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지 못 하겠다” (자크, 영화 ‘그랑블루’ 중)

아들 알렉세이가 엄마의 죽음 앞에서, 슬픔 가운데서도 “바다에 있는 걸 좋아하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 있을까? 몰차노바의 현실과 영화의 픽션이 시간 차가 있는데도 일치하는 이유와 같다. 바다에 들어가서 두려움을 떨친 이들은 안다. 바다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니 매력을 넘어 치명적인지.

검색을 통해 몰차노바의 삶을 더듬다가, 한 동안 그가 족적을 남긴 어느 지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몰차노바는 이집트 다합에 있는 블루홀을 문자 그대로 한숨에 정복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시나이 반도에 있는 다합은 몰차노바뿐 아니라 내게도 의미 있는 장소였다. 정확히 다합의 바다는 내게 특별하다.


10년 전, 2005년에 4개월 정도의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시작해 체코 프라하 그리고 벨기에 브뤼셀에서 이집트 카이로에 이르는 여정에 3개월이 흘렀다. 여행은 생각의 틀을 바꿔 놓을 정도로 강렬했다. 몸이 피곤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야간 버스, 기차, 배에서 가방을 누가 훔쳐갈까 가방과 몸을 묶기도 했다. 수 차례.

카이로에서 다합으로 갈 때도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야간 버스를 타고 9시간을 달려야 했는데, 시나이 반도에 들어서는 순간 버스가 섰다. 검문이었다. 당시에는 이집트 혁명 전이었는데, 시나이 반도에 반군이 많아서 남자들은 모두 신분증을 보여줘야 했다. 외국인인 나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엄청나게 춥고, 불편했는데 검문까지 받으니 다합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었다.

다합에 도착하자 마음이 조금 풀렸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바다가 있었고, 모든 게 편안했다. 맹렬한 차도, 엄청난 인파도 없었다. 가방과 몸을 묶을 일도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바다다. 모든 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는 카페에 가니 몇몇 한국인들이 ‘뉴비’를 반겼다. 수영을 좋아한다고 하니 한 일본인을 소개시켜줬다. 마사히로 상. 마사 형.

“다들 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요. 그냥 마사라고 불러요” (물론 영어로)

마사 형은 내게 스노클링을 할 수 있는 물안경을 건네며 이렇게 물었다. “수영에는 문제없죠?” 나는 바로 “그렇다”라고 했다. 체구도 조그마한 일본 형에게 “NO”라고 말할 수 없었고, 바다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은 물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유지됐다. 머리를 물에 담그기 전에.

‘죽겠다. 그런데 정말 예쁘다.’ 다합의 바다, 홍해 안을 처음으로 들여다 본 뒤에 본능적으로 든 생각이다. 동해의 경사가 급격하다고 했나? 홍해는 정말 절벽이다. 걸어 들어가다 추락하는 셈이다. 그 절벽 단면에 수많은 산호초가 있다. 조금 과격한 표현을 빌자면 이렇다. 아름다움과 죽음은 맞닿아 있다. 수영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되는, 아니 큰일 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너 바다에서 안 나오는 줄 알았어”

두려움을 떨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온전히 바다 속에만 집중하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익힌 생선을 먹지 않아서인지) 열대어는 현란하고 도도했다. 시쳇말로 책에서만 보던 아이들이 눈 앞에서 돌아다니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산호는 한국에서 온 시커먼 녀석이 쳐다보건 말건 여유로웠다. 바다 속 세상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세계였다.

바다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눈이 아닌 귀 그리고 가슴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바다에 들어갈 때 거칠어졌던 호흡이 들리지 않았다가, 바다가 속삭이듯 귀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바다의 미묘한 진동은 가슴을 만졌다. 그 순간부터 바다 속을 들여다 보는 것보다 바다에 들어가 있는 걸 즐겼다.

스노클링 하는 이들이 다 그렇지만, 바깥에서 보면 산호초 주위에서만 머리가 돌아다니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반달 모양의 해안선을 절단하듯 가로 질렀다. 마치 수박을 자르듯 다합 해변을 잘랐다. 이쪽에서 반대쪽으로, 반대쪽에서 다시 원점으로. 천천히 수영하면서 바다 그 자체를 즐겼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랑블루’와 몰차노바의 아들, 알렉세이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랑블루의 주인공은 자크와 엔초가 아닌 바다였고, 몰차노바는 기록이 아니라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게 좋아서 프라다이빙을 했다. 최고의 프리다이버인 몰차노바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그의 운명은 그리 정해져 있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바다가 그의 목적 그 자체였으니.

내가 처음으로 눈이 아닌 가슴과 귀로 바다를 느꼈을 때, 바깥으로 기어 나와 사람들에게 한 말이 있다. 정말 튀어 나왔다.

“엄마 뱃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깊은 바다로 나가니까 여기가 바로 엄마 뱃속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글= 류청
사진= 그랑블루 포스터, 류청, 몰차노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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