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파리를 묘사하는 여러 표현 중에 회색 파리(Paris en gris)가 있다. 회색 건물이 많은 데다가 변덕스러운 대서양 때문에 흐린 날이 많은 까닭이다.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있는 것 같다. 회색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도시는 따로 있다. 바로 도쿄다. 천만 명이 넘는 인구를 거느린 이 도시는 너무 급격하게 몸집을 불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온통 회색이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건물투성이다. 개성도 거의 없다. 내장까지 모두 회색이란 말이다. 이 정도면 겉만 색칠한 파리는 상대가 아니다. 여기까지 듣고서 다른 한 도시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서울이다. 나는 도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여행지의 설렘이 아닌 당혹감을 느꼈다. 서울과 너무 비슷했다. 이런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주위의 많은 이들이 서울과 도쿄의 유사함을 입에 올렸다.

매력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쿄는 내가 가본 도시 중에서 가장 소비 지향적인 도시다. 매력적인 상품들이 즐비하다. 구매활동을 하기에도 편하다. 커다란 백화점에서부터 오모테산도의 아기자기한 매장들까지, 누구든 도쿄에서는 자신을 부르는 물건을 만날 수 있다. 도쿄가 패션이나 건축의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중의 기호를 읽지 못하고, 대중을 선도하지 못하면 소비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 제일모직에서 매장 디자이너로 일했던 사촌 누이는 종종 세계적인 경향을 읽기 위해 외국 출장을 다녔는데, 아시아에서는 도쿄가 유일한 대상지였다. 하라주쿠, 신주쿠 그리고 시부야와 같이 사람이 몰리는 곳에 가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지갑을 열고 싶다는 충동이 더 강하게 든다. 어머니에게 “너 같은 놈들만 있으면 옷 가게는 다 망하겠다”는 말을 듣는 필자도 일본에서는 옷을 산다. 물론 흔히 이야기하는 ‘간지’를 위해서는 아니다. 환율에 관계없이 한국보다 더 싸게 옷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류도 많다. 먹을 건 또 어떤가! 오사카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전통 있는 식당들이 많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긴자의 렌카테이(煉瓦亭)다.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이 식당의 대표선수는 돈까스(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가스레스)다. 가격이 1200엔이 넘는데, 수긍하고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맛이다.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일본 돈까스보다 좀 더 두툼하고 살짝 느끼하기도 하다. 어린 시절 경양식 집에서 봤던 웨이터가 돈까스를 가져다 준다. 츠키지(築地) 어시장 근처에는 맛있는 초밥집도 많다. 2010년 2월, 재일교포 기자인 신무광 선배를 따라 한 초밥집에 갔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2011년 3월 일어난 도호쿠지방 대지진의 여파인 방사능 누출 때문에 도쿄에서는 마음 놓고 수산물을 먹을 수 없게 됐다. 2013년 2월에 다시 도쿄를 찾아 신 선배와 후배 하종기 기자를 만났을 때, 신 선배는 저녁 메뉴를 고르며 이렇게 말했었다. “류청 씨,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와서 회 안 먹는다면서. 걱정 말아요.” 신 선배의 말이 얼마나 미안하면서도 아프던지. 비극에 관여하지도 않은 이들이 떠 안아야 하는 책임이 너무 큰 게 안타까웠다. 2014년 8월, 한국도 그러하지만 말이다.


남자분들은 여기까지 읽고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이 들 수도 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알고, 여행기는 끝까지 읽어봐야 하는 법. 도쿄에는 쇼핑에 관심 없는 남자들을 뒤흔들 특별한 게 있다. 바로 축구용품이다. 유럽에 런던이 있다면 아시아에는 단연 도쿄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이민성 때문에 고개를 푹 숙였던 카모 슈 감독의 친 동생이 운영하는 카모(KAMO)샵은 축구용품 백화점이다. 유럽에는 없어도 카모샵에는 있는 물건이 많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워낙 규모가 크고 판매도 잘 돼서 카모샵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판도 나온다. 도쿄에만 매장이 네 개 있다. 시부야, 이케부쿠로, 신주쿠, 하라주쿠에 있다. 한 곳만 둘러볼 시간이라면 하라주쿠에 있는 매장으로 가자. 2011년에 리모델링해서 규모와 편의성면에서 최고다. 지하 1층에는 내가 원하는 축구화를 만들 수 있는 크래프츠맨 센터(아디다스와 합작해 만든 커스터마이징 센터. 축구화를 바로 발에 맞게 수리할 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축구화를 만들 수도 있다)도 있다. 카모샵의 단점은 가격이다. 환율까지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라주쿠에 있는 푸타바는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에게 최고의 장소다. 푸타바는 매장 진열이 조금 어지러운 것을 빼면 카모샵에 뒤질 게 하나도 없다. 거의 모든 축구화와 용품을 할인해서 판매하고, 종류도 많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축구화 정비 장비도 즐비하다. 푸타바에서는 고객들의 발을 직접 측정해 주기도 한다. 각 축구화의 무게, 발볼(발의 너비), 특성이 잘 정리된 유인물도 구비 돼 있다. 소비자가 잘 따져보고 살 수 있도록 매장에서 친절하게 준비한 것. 매장 한 쪽에는 조그맣게 축구 신사도 마련 돼 있다. 놀랍게도 여기에 소원을 비는 이들도 직접 목격했다. 일본의 종교관을 정말 아리송하다. 여러모로 푸타바는 축구 쇼핑의 최적지다. 여기서 끝난다면 도쿄가 축구 쇼핑의 천국이라 말할 수 없다. 우에노(上野)역에 있는 아메요코 시장은 우리로 치면 남대문 시장이다. 여기에는 더 싼 매장들이 몰려 있다. 대표적인 게 런던 스포츠인데 축구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 용품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공을 조금만 들이면 좋은 물건을 아주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널려 있어서 조금 걱정스러울 수도 있지만, 모두 진품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쉽게도 도쿄의 축구는 축구용품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도쿄에는 팀이 단 두 개다. FC도쿄와 도쿄 베르디(2부 리그)가 전부다. 도쿄의 인구가 23구를 기준으로 850만 명(도쿄도 기준으로는 1264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팀 숫자가 너무 적다. 런던이 755만 명의 인구에 팀이 42개 인인 것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재미있지 않나? 도쿄는 축구에서도 서울과 매우 비슷하다. 서울에도 팀이 3개뿐이다.


FC도쿄와 도쿄 베르디는 실력도 신통치 않다. FC도쿄는 창단 후 단 한번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못했다. 2012년에도 J리그에서 12위에 그쳤다. 거대한 도쿄를 배경으로 가진 팀으로는 너무 초라한 성적이다. 도쿄 베르디는 더하다. 사실 도쿄 베르디는 실력보다는 연고 이전으로 관심을 더 많이 받았다. 도쿄와 가와사키를 오고 간 전력이 있다. 1969년에 창단했을 때는 요미우리 축구 클럽이었고, 1992년부터 2000년까지는 베르디 가와사키였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적인 흐름을 일거야 한다. 요미우리 축구 클럽은 1993년 J리그 출범 당시 원래 연고지였던 도쿄를 근거지로 삼으려 했는데,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도쿄를 연고지로 삼으면 일본 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슈퍼클럽으로 성장하여 과도한 인기를 누릴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당시 도쿄 내에는 축구장이 도쿄 국립경기장 하나 밖에 없었는데, J리그 연맹은 이를 한 구단이 독점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며 ‘도쿄 연고 공동화 정책’을 내세웠다. 결국 도쿄 인근의 가와사키에서 출발하게 됐다. 베르디 가와사키는 2001년 도쿄에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이 개장하면서 가와사키를 떠나 바라던 도쿄로 들어왔다. 가와사키를 떠날 때는 가와사키 시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연고 이전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도쿄 베르디는 J리그가 출범했을 때는 강팀으로 군림했었다. 1993년, 1994년 2년 연속 J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미우라 가즈요시와 루이 라모스 등 일본의 슈퍼스타들과 김현석(전 울산 현대 코치) 등이 이 팀에서 활약했다.

FC도쿄와 도쿄 베르디의 홈경기장인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은 도쿄의 북서부에 있다. 게이오선 도비타큐(飛田給)역에서 매우 가깝다. 걸어서 5분이면 최신식 경기장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된 게 인상적이었다. 한쪽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 경기장은 도쿄 도의 소유인데, 도쿄 도와 게이오 전철 주식회사, 미즈호 은행 등의 출자를 받은 주식회사 도쿄 스타디움이 경기장을 운영하고 관리하고 있다. 거대 식품회사인 아지노모토 사가 2003년 1월 1일 부로 경기장 명명권을 사들여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지노모토 스타디움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10년 2월 동아시아대회(EAFF) 때였는데, 경기장 이름이 낯이 익었다. 알고보니 아지노모토는 미원의 원료가 된 조미료 이름이었다. 어른들은 아직도 미원이 아닌 아지노모토를 원하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역사의 증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축구가 아니라 한국 축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2010년 2월 10일 32년 묵은 공한증이 깨졌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중국 대표팀에게 0-3으로 참패를 당했다. 경기 내용과 결과 모두 참담했다. 덩줘샹이 멋진 개인기로 한국 수비를 무너뜨리고 세 번째 골을 넣었을 때는 기자들이 모두 “아이고” 탄성과 함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중국 기자들이 단체로 강강수월래를 추는데 눈꼴이 시렸다. 인터뷰 장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허정무 감독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기록은 어젠가 깨지기 마련”이라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그 당사자의 심정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음 날 이와 관련된 해프닝도 있었다. 대표팀은 원래 경기 다음날 훈련을 잡지 않았는데, 밖에서 볼 때는 패배의 여파가 미친 것처럼 보였다. 허 감독이 다른 팀들의 경기를 보기 전에 기자들과 잠시 미팅을 만났는데, 한 기자가 그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일이 더 커졌다. 마치 사퇴 발표를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갔고, 도쿄에 있던 다른 기자들은 각자의 회사에서 결려온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의례적인 인터뷰였다.


요요기 경기장이라 불리는 도쿄 국립경기장은 잠실 주경기장을 연상시킨다. 뭔가 분위기가 묘한데, 매년 1월 1일에는 이곳에서 일왕배 결승전이 벌어진다. 교통은 매우 좋다. JR 동일본 주오•소부 완행선 센다가야 역, 시나노마치 역, 오에도 선 국립경기장 역, 긴자선 가이엔마에 역에서 모두 경기장을 찾아갈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벌어졌던 한일전을 직접 관전했다. 2010년 동아시아대회 때였다. 경기 전부터 비장함이 감돌았다. 한국은 중국에 참패를 당하며 꼭 일본을 이겨야 했고, 일본의 오카다 다케시 감독도 퇴진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었다. 양 국 모두 해외파가 제외돈 1.5군 성격의 대표팀이었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기느냐 지느냐, 결과가 중요했다. 경기 전 경기장을 꽉 채운 일본팬들이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는데 소름이 돋았다. 한겨울인데도 운동장에서 기미가요를 선창한초등학생들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 불렀던 애국가는 조금 처절했다. 한국에서는 애국가를 립싱크로 부르던 나도 은근히 목에 힘을 줬다.

경기는 허정무 감독이 연출한 것 같이 흘러갔다. 전반 23분만에 강민수가 페널티킥을 내주며 끌려가다가 전반 33분 이승렬의 페널티킥 골을 시작으로 내리 3골이 터졌다. 한국이 3-1로 역전승 했다. 경기장의 푸른 파도는 일순간 잠잠해졌고, 조그만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중국 기자들처럼 강강수월래를 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기자들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터뷰장에 들어가자 일본 기자들이 오카다 감독에게 질문이 아니라 비수를 날렸다. ”언제 그만 둘 것이냐”는 직설화법도 나왔다. 살벌했다. 오카다 감독이 불쌍했다. 허정무 감독은 구원받은 표정이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오카다 감독이 더 크게 웃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16강에 올랐는데 내용면에서는 일본이 더 앞섰다. 동아시아대회에서 오카다 감독에게 ‘총알슛’을 날린 기자는 기분이 어땠을까? 잘못을 시인했을까?

도쿄는 한국 축구의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나라의 수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프로축구시장을 지닌 두 나라 사이에는 당연히 교류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교류가 양방향이 아닌 한 방향으로만 이뤄지는 데 있다. 한국의 젊고 유능한 선수들이 J리그로 꿈을 이루기 위해 날아드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들이 날아들기로 작정한 이유와 그 이후의 삶이 문제가 될 뿐이다. 2007년 기자가 되면서부터 마음 속 숙제였던 이 현상을 취재하기 위해, 2013년 다시 한 번 도쿄를 찾았다. 도쿄에는 팀이 별로 없지만 오미야, 가시와, 치바, 가와사키 등 많은 팀들이 도쿄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 J리그(1부+2부)에는 무려 61명의 한국인 선수들이 등록돼 있었다. 아마추어리그 JFL(3부 리그)까지 합하면 더 많은 선수들이 있었다.

“아마 마지막으로 일본 전체에 알려진 선수는 이근호였던 것 같다.” 앞서 언급했던 신 선배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이근호는 이미 2012년에 일본생활을 마무리했다. 2013년을 달리는 66명의 선수 가운데 일본인들의 마음을 빼앗은 선수가 거의 없다는 이야기였다. 마음을 훔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주전으로 활약하던 선수는 30%가 되지 않았다. 대학 혹은 고등학교에서는 날고 긴다던 선수들도 많았다.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지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신명준 팀장은 “이런 현상은 한국축구에 위협”이라며 “K리그는 누가 뭐래도 한국축구의 모태다. 여기에 좋은 선수가 많이 있어야 한국축구가 발전한다. 프로 선수로 살아갈 준비가 안된 선수들이 J리그로 서둘러 진출한 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현상이 많아 안타깝다”라며 “J리그로 나가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많은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하면 그만큼 전체적인 시장이 커지고, 한국축구에는 좋은 일이다. 시기의 문제다. 조병국이나 김창수처럼 K리그에서 활약하다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면서 나가면 된다. (요즘은 J리그 진출이) 금전적인 보상도 크지 않다. 대학에서 바로 프로로 직행하면 실패확률도 높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들을 이끈 건 결국 어른들이었다. 한 에이전트는 “결국에 결정하는 것은 선수 본인”이라고 했지만, 이들은 축구만 해온 경험 없는 젊은이에 불과하다. “너는 일본에 가면 통할 것”이라는 감독, 에이전트의 말을 믿고 일본에 온 이들 중 대부분이 실패하고 돌아간다. 철저한 준비가 아닌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온 선수들은 낯선 환경과 낯선 경기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2013년부터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해외무대로 진출하면 5년 내에 K리그로 돌아올 수 없다는 규정이 생겼지만, 대학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의 일본진출은 이어졌다. 선수를 이적시키면 금전적인 혜택을 받는 감독과 에이전트들의 부추김에 선수와 선수 가족의 허영심이 더해지면서 생긴 결과다. 사실상 J리그 진출이 주는 경제적인 매력은 크지 않다. 홍명보, 황선홍이 활약했던 1990년대 J리그와 현재의 J리그는 완벽하게 다르다. 엔고(高)도 한풀 꺾였고, 1998년 J리그 전체가 연봉을 삭감하면서 선수들의 임금이 크게 떨어졌다. 일보의 물가를 고려하면 대학에서 바로 J리그로 진출한 선수들은 생활비 메우기도 빠듯한 수준이다.

J리그 현장의 분위기는 차갑다. 타테이시 타카유키 FC도쿄 강화부장은 “좋은 한국선수들이 많다”고 운을 뗀 뒤 “성공할 수 있는 선수는 제한돼 있는데, 그보다 더 레벨이 낮은 선수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후자와라 요코하마FC 사업총괄부장은 “실패하는 사례가 많아지다 보니 관계자들 사이에서 ’(한국 선수들은) 어학연수 온 것 같다’는 농담이 오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3세로 현재 요코하마FC에서 통역을 맡고 있는 김명호 씨가 필자를 요코하마 역으로 데려다 주며 했던 말은 뼈아팠다. “여기서 실패하는 한국 선수가 정말 너무 많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중심 도쿄에서는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문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엘리트 축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교육기관과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고 구조적인 문제도 지닌 K리그 그리고 이러한 척박한 생태계에서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주체들. 도쿄에서는 한국축구의 그림자와 치부를 모두 볼 수 있다. 물론 J리그에서 각자의 몫을 다해가며 발전하는 선수들도 많고, 일본 열도를 움직였던 선수들도 있었다. 2014 남아공월드컵에서 축구 인생의 첫 쓴맛을 봤던 홍명보 감독은 일본이 여전히 기억하는 선수다. 홍명보와 황선홍이 있었기에 후배들이 J리그에 많이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다.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다. 그 많던 천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국 축구의 완벽한 거울, 도쿄에 오면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이다.

도쿄에 서면 마음이 무거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2010년 동아시아대회에서 한국이 일본을 시원하게 이긴 다음날에도 생각났던 야스쿠니 신사. 도쿄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장소다. 2007년 한 번 방문했었는데, 그곳에서 군국주의를 봤었다. 신사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자못 고압적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죽은 일본군 이외에 도조 히데키 등의 A급 전범이 안치되어 있어 있기 때문이리라.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과 대만 등 식민지의 병사들이 같이 안치돼 있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 죽어서도 일본과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라니. 그 가족들은 가슴이 찢어질 것이다. 신사의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유치관(遊就館)은 그야말로 전쟁 기념관이었다. 건물 천정에 전투기가 매달려 있고, 전쟁 영상을 끊임 없이 상영한다. 세상 어디에나 외골수는 있고, 정신병자는 있으니 신사 참배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일전에서 졌으니 원치 않게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가 있는 한국인 희생자는 빼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물론 우리나라도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에서 남의 나라에 바꾸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글 / 사진= 류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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