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들 사이에서 한때 큰 인기를 누렸던 다큐멘터리 <공간과 압박>은 사실 좀 이상한 영상물이다. 일단 야마 - 작품을 관통하는 큰 주제 - 가 안 보인다. 감동적인 장면으로 감정을 몰아가는 것도 아니고 선형적 구성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도 않는다. 전문가가 등장해 뭔가 분석하는 장면도 없다. 그냥 축구를 계속 보여준다. 때론 탐미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촬영 기법으로 계속 선수들을 보여준다. 홍정호, 윤빛가람 얼굴만 봐도 황홀한 사람들에겐 컬트적 인기를 누렸지만 그 밖의 사람들이 보기엔 불친절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렇게 불친절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공영방송의 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청률과 인기의 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곳이 공영방송이니까. 물론 실제로는 압박이 존재한다.)

<공간과 압박>은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작품이다. 인물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을 때부터 제작진 자막이 나오는데, 가장 먼저 ‘미술 김기조’, 뒤이어 ‘음악 디제이 소울스케이프’가 소개된다. 마침 김기조 특유의 폰트로 쓰여 있고, DJ 소울스케이프가 고른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이 순간은 <공간과 압박>을 비롯한 이태웅의 다큐멘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갖는지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의 취향이 곧 그의 작품 세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붕가붕가 레코드의 수석 디자이너인 타이포그래피스트 김기조의 서체도 인상적이지만, <공간과 압박>을 구성하는 ‘신의 한 수’는 사운드트랙이다. 이 불친절한 다큐멘터리가 56분 동안 그리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는 건 다양한 음악의 활용, 그리고 음악에 착착 붙는 편집 때문일 것이다. 특히 타이틀 롤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Drop It Like It's Hot’은 단번에 귀를 잡아끈다. 퍼렐 윌리엄스와 스눕 독이 만든, 힙합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는 히트곡. 이걸 매직 드럼 오케스트라가 더 귀여운 버전으로 편곡한 타악기 연주곡이다. 이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들다보면 <공간과 압박>이 어떤 정서로 흘러갈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반주에 맞춰 라커룸 곳곳을 보여주는 몽타주를 보고 있으면 <공간과 압박>이 아니라 <비트와 리듬>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은 리믹스다

이태웅과 김기조, DJ 소울스케이프의 작업은 <천하장사 만만세> 때 시작됐다. 우린 여기서 힙합 디제이란 어떤 존재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요즘 디제이 하면 G팍 형님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지만, 힙합 디제이의 기초는 디깅이다. digging이란 옛 음악을 탐구하고 수집하는 포괄적인 행위를 말한다. 믹싱이나 샘플링은 일종의 콜라주 작법이므로 여기 쓸 수 있는 소스가 많을수록 디제이의 음악은 풍성해진다. 남들이 모르는 샘플을 많이 갖고 있는 건 디제이나 비트메이커의 중요한 덕목이다.

수집가일 수밖에 없는 디제이 중에서도 소울스케이프는 한국의 고전 소울, 훵크, 블루스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대선배 뮤지션들의 공연을 라디오에서 자주 틀었고, 희자매(인순이가 소속됐던 1980년대 걸그룹) 복각 앨범의 해설지를 쓰기도 했다. 어쩌면 현재 한국의 음악인 중 1970~1980년대 음악에 대한 조예가 가장 깊을지도 모른다. 그는 <천하장사 만만세>에 맞는 음악을 골라줄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태웅이 트위터 메시지로 음악 작업을 부탁하며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김기조도 마찬가지였다.

이 대목에서 우린 이태웅의 작품론을 들을 수 있다. 자료 화면을 짜집기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감독과, 여러 음악에서 일부를 추출해(샘플링) 짜집기로 새 음악을 만드는 DJ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DJ 소울스케이프를)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이 부분에서 공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는 언젠가 접한 <모든 것은 리믹스다(Everything Is Remix)>라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말이지 모든 창작 활동은 일종의 리믹스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의미는 촬영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편집을 통해 순서를 마음대로 배치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인터뷰 기사도 마찬가지다. 긴 인터뷰를 그대로 지면에 내보내는 경우는 없다. 주어진 활자수에 맞추기 위해, 때론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해 불필요한 내용은 잘라낸다. 두서없이 진행된 이야기를 소주제에 맞춰 재배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리믹스다.

다시 <공간과 압박>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다큐의 음악은 <천하장사 만만세>와 전혀 다르다. 시대성이 없는, 즉 더 자유로운 음악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압박>을 준비하며 이태웅은 약간 더 똘끼(?)를 발휘하게 된다. 블랙스플로테이션 영화 OST 같은 느낌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요즘 영화로 치자면 <장고 : 분노의 추격자> 같은 느낌인 셈인데 축구 다큐에 그런 음악을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말고 누가 있겠는가.

다양한 음악을 고르는 과정에서 처음 구상의 희석됐다. 대신 브레이크 비트가 한 축, 옛 보사노바 등 ‘삘 충만한’ 경음악이 또 다른 축으로 번갈아 등장한다. 디제이 소울스케이프 본인의 비트인 ‘People’도 쓰였다. 브레이크비트는 감각적이되 감성이 거세돼 있다. 이태웅 특유의 이지적인 정서와 어울린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세르주 갱스부르의 음악이나 보사노바가 출동해 장면의 멋을 살린다. 갱스부르의 연주곡이 재생되는 가운데 중동의 석양을 등지고 훈련하는 선수들이 슬로모션으로 등장한 순간은 거의 탐미적이다.

축구와 무관한 측면만 잔뜩 살펴봤는데, 사실 2015년에 와서 이 작품을 돌아보면 내용 가지고 할 말이 별로 없다. 선수 홍명보와 감독 홍명보를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 등 최소한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다큐는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아리송하다. 나레이션도 없고 자막도 없기 때문에 잔뜩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다. 특히 자막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의 시청자들이라면 이 다큐가 더욱 불친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공간과 압박>은 2011년을 기록한 사료에 가깝다. 다른 해석을 거창하게 덧붙이지 않은 순수한 기록물이다. 홍명보 감독의 명언인 “이 쉐끼들아”와 “내 마음 속에 항상 칼을 갖고 다녀”, 그리고 선수단 버스 안에서 선수들이 보여주는 해맑은 모습은 이 다큐에서만 볼 수 있다. 축구팀을 이렇게 가까이서 포착한 영상물은 흔치 않다. 이태웅은 홍명보 감독이 멋있어 보이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멋 없어 보이는 순간은 없나’ 고민했다고 한다. 치우치지 않기 위한 노력이 결과물에서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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