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이태웅 피디는 (극?)소수의 팬을 거느린, 국내에서 보기 힘든 스포츠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다. 정확한 직업은 KBS 스포츠국 피디라서 ‘비바 K리그’나 ‘따봉 월드컵’ 등의 프로그램도 제작했고 중계 현장에서도 많이 일했지만, 이 피디 스스로 가장 잘하고 원하는 분야가 다큐멘터리이므로 다큐 전문가로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작년, 그를 인터뷰해 기사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의 여러 다큐에 투영된 취향(앞으로 이야기하게 될 DJ 소울스케이프 등)이 곧 그의 정체성이란 생각이 들었고, 기사에도 이 점을 반영하고 싶었다. 그러나 스포츠 다큐멘터리에 대한 기사에 힙합과 디제이 따위의 단어가 등장하는 건 괴상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기사 아이템은 몇 차례 신문 지면 편성에서 밀렸고, 어쩌다보니 결국 기사를 쓰지 못했다.

‘거의 모든 것의 리뷰’라는 공간은 뒤늦게나마 이태웅의 작품 세계에 대해 소개하기 적절해 보인다. 런던올림픽 남자축구대표팀을 오래 취재한 이PD는 ‘홍명보 전문가’라는 인상이 강했다. 축구에 대한 인터뷰를 여러 차례 했고, ‘주간 서형욱’에서도 관련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심지어 홍명보에 대한 책에 공저자로 참여한 적도 있다. 그러나 여기선 홍명보 감독과 관련된 이야기는 가급적 빼고 이PD 스타일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볼 것이다. 첫 번째로 거론해야 하는 작품은 ‘천하장사 만만세’다.

다큐를 만들라는 지시는, 원래 KBS 스포츠국에서 다들 기피하는 일이라고 한다. 중요한 스포츠 이벤트가 있으면 특집 다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품은 많이 들고 티는 나지 않으며 왠지 스포츠국보다 교양국에서 해야 하는 일 같아 어색하다. 이PD가 다큐를 대하는 태도도 처음엔 비슷했다.

그가 다큐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한 건 씨름에 대한 다큐를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내려온 뒤였다. 추석 특집용이었다. 자료를 조사해나가던 이PD는 이만기, 강호동 등의 인물과 당대 사회에 대해 조사해나가며 재밌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겠다는 느낌을 점점 강하게 받았다. 그의 취향과 관점은 독특한 영상에 담기기 시작했고, 2부작으로 구성된 ‘천하장사 만만세’는 여러모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원래 제작 의도는 ‘민속 씨름이 처한 힘든 현실을 부각시키고, 씨름 부흥의 당위성을 역설하라’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PD는 특정한 주장을 담거나 감동을 조장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특징이다. 늘 이지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카메라도 대상을 볼 때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자료 화면을 조합할 때도 극적인 순간을 부각시키기보다 좀 심심해보일 정도로 차분하게 이어 붙인다.

프로 씨름이 빠르게 인기를 얻고 또 잃어버리는 과정을 2시간여에 걸쳐 담아내면서, 감동 대신 이PD가 제공하는 건 일종의 통찰이다. 씨름이 처음 인기를 얻은 83년은 어떤 시기였나. 억눌린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축제가 필요했던 시대, 눈물과 감정 과잉의 시대였다. 이 시대상을 보여주는 자료화면이 먼저 제시된 뒤에야 프로 씨름과 이만기가 뒤따라 화면에 등장한다. 이어 이만기가 모래판 위의 스타를 넘어 온 국민의 섹시 스타로 거듭나는 과정, 스타 마케팅을 통해 씨름의 인기가 동반 상승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이 다큐는 씨름이 융성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차분하게 해부해 시청자 앞에 늘어놓는다.

씨름의 흥망은 이만기 이후에도 시대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88올림픽 이후 한국 사회가 큰 변화를 맞자, 새로운 스타일과 매력을 지닌 신세대 강호동이 등장한다. 강호동이 퇴장한 뒤인 1993년엔 엑스세대의 출현과 함께 김정필 등 또다른 세대가 뒤를 잇는다.

그렇다면 씨름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몰락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2부는 1부에 비해 슬픈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지만 이번에도 감정은 가급적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말라죽어가는 지렁이의 인서트숏을 통해 씨름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비유하는 과감함이 이 다큐의 특징이다. 씨름의 쇠락은 융성할 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스타들이 퇴장하자,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대중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양보씨름, 즉흥적으로 도입된 ‘계체승’ 등 주먹구구식 운영이 이어진다.

여기까지 다루고 나면 자연스레 ‘무식한 체육계의 한계’ 때문에 씨름이 몰락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씨름계의 여러 모순을 그 좁은 세계 안에 국한시키지 않고, 당대 사회 전체의 한계로 그린다는 점이 이PD 다큐의 (앞으로도 이어질) 또 하나의 특징이다. 시대를 타고 등장한 종목이 시대의 한계에 밀려 쇠락했다. 그 과정을 보는 카메라는 담담하다. 오히려 담담하기 때문에, 감정 과잉인 다큐들보다 보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친다.

다큐에 빠질 수 없는 인터뷰 대상을 선정할 때도, 이PD는 독특한 취향을 발휘한다. 이PD는 당대 씨름에 대해 증언해 줄 인물로 씨름 선수와 전 해설자 등 전문가뿐 아니라 이해영(영화감독), 강헌(음악평론가), 김어준(그 ‘쫄지마’), 정희준(동아대 교수)부터 최초의 씨름만화를 그린 이우정 화백까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을 불러 모은다. 대부분의 인터뷰이는 씨름의 인기를 온몸으로 느꼈고, 그 느낌을 자신만의 사고와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김어준(자막은 그를 ‘딴지일보 총수’라고 소개했다가 중간쯤 가서 ‘이만기 열혈 팬’이라고 한 번 더 소개한다), 이해영, 정희준 등이 보는 각자의 씨름이 시청자에게 제시된다.

자신이 다루는 종목을 감동 코드 안에 가두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시청자 스스로 주위 세계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도록 힌트를 제공하는 태도. 그래서 ‘천하장사 만만세’는 여느 스포츠 다큐보다 정중한 자세로 대상을 존중하는 듯 보인다.

글= 김정용
사진= '천하장사 만만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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