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는 최고의 먹방 캐릭터 중 하나다. 20분 남짓한 러닝타임 중 고로가 뭔가를 먹는 장면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는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먹고 또 먹는다. 볼이 찢어질 것처럼 음식을 우겨넣고 먹는다. ‘먹방’의 시대인 요즘, 일본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 중엔 고로를 보며 식도락 욕구를 충전하는 사람이 흔하다.

그러나 잘 알려진 맛집을 골라 돌아다니는 여행으론 고로처럼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여행자의 역설이다. 고로는 모든 식당을 우연히 들어가는데, 그가 먹는 메뉴 역시 해외여행중인 한국인이라면 선뜻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것들이 다수 섞여 있다. 길거리에서 파는 밋밋한 빵, 나폴리탄(케찹에 볶은 일본 가정식 파스타), 가벼운 볶음밥, 채소무침 등 별것 아닌 듯 보이는 메뉴를 먹으며 고로는 감탄사를 연발하곤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일본인다운 음식 세계일지도 모른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장어덮밥 같은 걸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 내는 일본은 대체로 레시피가 간단한 편이다.

그런데 <풋볼리스트>는 교토에서 ‘고로처럼 먹는 법’을 우연히 발견했다. 원래 교토의 유명 카페 요지야를 방문하기로 했던 신우식, 홍성광, 김정용 세 명은 교토 시내를 빙 돌아 걷기로 결정했다. 다리가 아파 잠깐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찾는 소박한 식당을 발견했고, 거기서 여행의 진짜 기쁨을 느꼈다. 교토는 문화재, 관광지, 맛집이 많아 이들을 훑기에도 시간이 빠듯한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름다운 골목과 소박한 식당을 잔뜩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처 없이 걸을 때 교토의 진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이날 동행한 세 명은 골목을 누빈 경험이 만족스러웠노라고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골목에서 만날 수 있는 재미의 한 예를 소개한다. ‘추천 코스’는 아니다. 발길 닫는 대로 걸어야 자신만의 교토를 가질 수 있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출발할 때만 해도 자신들의 운명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세 사람. 이들은 곧 인어공주처럼 다리(최소한 신우식 조원의 무릎 연골)을 잃는 대신 교토의 맨얼굴을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었다.

교토역 근처 숙소에 짐을 푼 뒤 큰길을 따라 니시키 시장으로 가던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이 문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것이 교토의 맨얼굴을 보러 떠나는 첫발이자, 개고생의 시작이었다.

우리를 유혹한 골목은 얼핏 봐도 예사 골목이 아니었다. 관광 명소인 니시혼간지를 오른쪽에 끼고 앞으로 나가자, 절간 사이에 근대 초기 건물들이 섞여 있었다. 류코쿠 대학교 오미야 캠퍼스다. 1639년 승려들을 위한 기숙사로 설립되어 1922년 대학이 됐다. 절간 사이에 강의실, 도서관 등 작은 건물들이 하나씩 숨어 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다음 강의를 위해 이동하려면 먼저 커다란 도리이(鳥居)를 지나 등교해야 한다. 대학 건물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이라 역사의 체취를 느끼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꽤 정취가 있는 곳이구나. 그런데 이렇게 오래된 건물이면 많이 불편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도서관 입구가 자동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셋은 “오오! 문에 모터가 달려 있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도시 전체가 문화재나 마찬가지인 교토에서 유산을 살리면서 고쳐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역사적인 공간’ 자체를 살리면서 현대와 공존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돈과 효율성으로 집약되는 한국의 상황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읽힌다. 문화재급 건물이 많은 연세대는 얼마 전 용재관을 경영관 신축이라는 명목으로 철거해버렸다.

대학교를 지나자 본격적인 골목이 펼쳐진다. 우린 큰길에서 한 블록 들어간 골목으로 계속 교토를 쏘다녔다. 일본은 한국과 여러모로 비슷해 자극의 역치가 높은 사람에게는 심심한 여행지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다른 점이 하나씩 튀어나온다는 점에서 여행하기 재미있는 나라기도 하다. 가장 일본답다는 교토는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이런 별것 아닌 사진도 한국에서는 찍을 수 없다. 공간 활용의 귀재인 일본 사람들 중엔 자전거를 거꾸로 메달아 보관하는 사람이 적잖았다. 그중 한 집은 각도를 맞춘 것처럼, 두 대의 자전거가 절묘하게 대칭을 이루도록 ‘거치’했다. 장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는 시장에 다녀올 때 편하게 타야 하니 땅에 놓고, 더 빠르고 좋아 보이는 자전거는 한바탕 라이딩을 즐기고 난 후 마무리 운동 삼아 번쩍 들어 창틀에 걸었으리라.



비가 오는데도 굳이 육교 위에 올라가야 했다. 한국은 노량진에 있던 유명한 육교도 없애는 추세지만 교토는 교차로마다 육교를, 때론 엄청난 규모의 육교를 세워 놓았다. 정방형으로 설계된 데다 지극히 평면적인 교토 골목을 다니다 잠깐 육교에 오르면 여행이 2D에서 3D로 치환된다. 방금 내가 지나쳐 온 야트막한 건물들의 지붕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눈에 감상하고, 교토 타워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슬쩍 보고, 사거리를 다니는 자동차들의 움직임을 보며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골목으로 들어간다.

쭉 뻗은 길 끝이 소실점에서 만나는 건 전근대부터 풍경화의 단골 구도였다. 이미 골목을 걷고 있지만, 내 옆에 더 좁은 골목이 깊숙하게 펼쳐질 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낡은 건물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일정한 리듬을 형성한다. 거기 서 있는 몇 초 동안 교토의 속마음을 더 깊숙하게 들여다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한국에서도 번화가에서 한 발 벗어난 합정역 인근, 상수역 인근 등이 그렇듯 주택가 사이에 ‘힙’한 가게 하나 둘씩 섞여 있는 것이 유행이다. 교토의 골목에서도 종종 아기자기한 식당과 술집, 카페들이 출몰한다.

신우식 조원의 ‘아재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 운선(雲仙), 즉 쿠모센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카페 앞에서 그는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뭐라고 중얼거리길래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아 여기 이름 마음에 드는데? 장사 안 하나?”였다. 영업 중이었다면 다 같이 들어가 일본식 다방 커피를 한 잔씩 들이켰을 것이다. 커피보다 십전대보탕이나 쌍화차가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세 명은 아주 소소한 것에서도 재미를 느끼는, 봉선화처럼 예민한 프로여행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은 앞으로 다가올 뜻밖의 만남을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했다. 이미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신우식 조원은 어디든 들어가 좀 앉아야만 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만 더 걸으면 니시키 시장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비에 젖은 일행에겐 일용할 양식과 엉덩이를 붙일 의자가 필요했다. 그때 카페 요로즈가 나타났다. 드라마 속 고로가 ‘배가 고프다’라고 중얼거린 후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다 들어갈 법한, 딱 그런 가게다.

‘카페 요로즈 - 월드 커피’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간 가게는 테이블이 5개에 조그만 바가 딸려 있고, 초로의 부부가 분주히 음식을 만드는 집이다. 메뉴판을 보니 오므라이스를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홍성광 조원이 더듬더듬 “오므라이스가 이치방데스까?”라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하신다. 두 가지 맛의 오므라이스를 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의 집에서 먹어야만 제 맛이 날 것 같은 메뉴 나폴리탄도 함께 시켰다. 당근이 떠 있는 맑은 스프와 샐러드가 먼저 나온다.
* 나폴리탄 : 파스타 면을 케찹으로 볶은 스파게티. 한국 중고등학교의 급식이나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파는 바로 그거. 일본에선 대표적인 서민 음식 중 하나다. 주일미군이 전수해준 스파게티를 일본식으로 개량했다.

오므라이스는 대단할 것 없는 음식이다. 소시지, 양파, 파 등 볶음밥에 흔히 넣을 것 같은 재료로 이뤄져 있고 계란으로 위를 감은 뒤 케첩을 뿌린 것이 전부. 그러나 경쟁적으로 숟가락을 놀린 세 명은 짧은 식사 내내 “맛있다”를 연발했다. 조리 실력과 재료의 진귀함이 반드시 맛과 1사분면에서 마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오므라이스는 분명 맛있었고(맛집 프로그램에도 한두 번 나왔다는 걸 보니 일본에서도 맛있는 편에 드는 모양이다) 그날 우리의 여행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나폴리탄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귀여운 ‘제품 맛’이다.

원래 카페라 하니 카푸치노와 아메리카노를 시켜보기로 한다. 에스프레소 머신도 없는 가게에서 어떻게 커피를 파나 의아했는데, 뜻밖에도 나무틀로 된 낡은 드립 기구를 꺼내 커피를 내린다. 드립 커피로 만든 카푸치노는 약간 묽은 대신 자극적이지 않고 편안했다. 동네 할머니들이 좋아하실 법한 향이다. 오므라이스 650엔, 커피 추가 150엔.

귀여운 로고가 찻잔에 그려져 있고, 벽면 한 구석에는 〈소년점프〉 등 잡지가 걸려 있어 요즘 일본 소년 만화는 어떤 분위기인가 훑어볼 수 있다. 구석에 놓인 TV는 무려 VHS비디오 일체형이다. 지금은 박물관에 있어야 하는 유물 아닌가…? 갑자기 신우식 조원과 홍성광 조원이 1980~1990년대의 영상 저장매체에 대한 추억 여행을 시작한다. 아재력이 부족한 김정용 조원은 듣고 있다.

다 먹고 나서 마스터(이렇게 불러야 할 것 같다)에게 얼마나 장사하셨냐고 물어보니 이 자리에서 이대로 31년째란다. 오랫동안 잘 관리한 듯 윤이 나는 나무 찬장도 31년, 손님이 없을 때 조리대로 쓰는 대리석 바도 31년 된 것이다. 유일한 손님이었던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때쯤, 주인장은 밥솥에 앉힐 쌀을 씻기 시작했다. 손님이 앞에 있든 없든 쓱쓱. 고로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일본어가 서툰 관계로 “고치소 사마데시다”라고 중얼거린 뒤 가게를 나왔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때도 뜻밖의 재미가 있었다. 장소 태그를 걸어보려 했는데 교토의 'cafeyorozu‘는 등록된 바가 없단다. 어쩔 수 없이 #cafeyorozu라는 해시태그를 걸어서 올렸는데, 세상에! 이 해시태그를 쓴 사람은 전 세계에서 내가 처음이다. 수만 명이 인스타그램에 공유한 핫플레이스를 찾아가는 것도 여행의 재미지만, 아무도 정복하지 않은 해시태그를 내가 가장 먼저 쓰는 것에도 쾌감이 있다.

일행은 곧 목적지인 니시키 시장에 도착했지만 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한다. 골목 투어에 재미 붙인 우리는 저녁을 먹을 때도 시장 근처 관광지에서 벗어나 주택가 가운데 있는 초밥집으로 들어갔다. 역시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현지인들이 저녁 모임을 가질 때 어떤 집에 가는지 엿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사소한 재미를 발견하며 즐거워하던 세 아재는 마지막 순간 엄청나게 강렬한 자극의 바다에 몸을 던지게 된다. 코스프레 샵인줄 알고 구경하러 들어갔던 서점 ‘노부나가 쇼텐’이 알고 보니 거대 AV샵이었던 것이다. 홍성광 조원의 회고다.

󰡒김 본좌의 성지 노부나가 쇼텐(信長書店). 처음에는 밖에서 보이는 코스프레 복장을 보고 덕들이 가는 데인가보다 하는 생각에 호기심에 들어가 봤는데, 서점이 아니라 성인물 집합소였다. 5층 규모의 건물이 관련 상품으로 가득 찬 걸 보고 일본 성인물 산업의 규모를 체감할 수 있었다. 2009년 기준 일본 AV 시장은 1조 엔대의 시장으로 성장한 반면 한국의 출판시장은 2012년 기준 2조 4천억 원 규모다. 인구수를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신 팀장님의 전문가로서의 면모도 확인했다. 장르별로 어떤 특징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분이 한때는 본좌로서 은총을 내려주시던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하루 종일 혹사한 무릎 때문에 매우 힘겨워하시던 분이 노부나가 서점에서는 예수를 만난 앉은뱅이 같았다.󰡓

뭐 그랬다고 한다. 층을 올라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는 영상물에 이어 꼭대기층에는 최종 보스격으로 온갖 기상천외한 기구와 기계들을 파는, 〈사망유희〉식 구성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었다.

EPILOGUE : “홍보해드릴게요”라는 감언이설과 함께 카페 요로즈의 주인 내외와 사진을 찍었다. 이 집의 누리끼리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어떠한 보정도 하지 않았다. 딱 이런 분위기인 집이다. 대단한 맛집이라고 추천할 순 없지만, 교토 골목을 쏘다니다 만나면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 보셔도 좋다.

교토는 계획도시다. 도로가 격자 형태로 잘 정비되어 있다. 관광객은 큰길만 돌아다니면 길을 잃을 이유가 없고 볼거리가 많은 도시라서 굳이 작은 골목을 돌아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생각보다 외국인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가게가 꽤 있을지도 모른다. 31년간 세계적인 관광도시인 이곳에서 장사를 했음에도 영어로 된 메뉴판 하나 만들어놓지 않은 이 ‘카페 요로즈’처럼 말이다. 이것이 교토가 가진 두 얼굴일 것이다. 외국인과의 대면에 익숙한 곳과 화장이 벗겨진 곳의 깊숙한 곳. 그리고 이곳에서는 조금 낯선 만남이 있다.
낯선 만남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여행을 갈 때 정보가 촘촘히 박혀 있는 여행서를 가져가는 이유는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돈과 시간을 쓰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면 여행서의 저자가 느낀 감정과 즐거움을 유사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내가 본 정보에 동조해서 이 여행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교토에서 우리는 정보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다. 발이 나아가면 눈과 코로 방향을 정하며 걸었고 낯선 곳에서 예측 불가능한 작은 만남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이 교토의 뒷골목이다. 그래서 이번의 교토는 여행이라기보다는 모험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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