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항저우(중국)] 한준 기자= 그 동안 항저우그린타운은 강등권에서 간신히 살아남던 수동적인 팀이었다. 지난 5년 간 개막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홍 감독은 처음 항저우에 왔을 때 팀이 패배 의식에 젖어 있었고, 프로 의식이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준비를 잘한다고 해도 본 게임에 가서는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가 준비한 것이 잘 나타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춘야타이와의 ‘2016 중국 슈퍼리그(CSL)’ 개막전을 준비하며 홍명보 감독은 선수단을 모아두고 이렇게 말했다.

항저우의 운영 방식은 최근 스타 영입으로 주목 받는 CSL의 팀들과 다르다. 값비싼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 공격에 집중 시키고, 중국 선수들은 이들을 서포트하고, 뒤에서 수비를 하는 팀들이 늘어나고 있다. 항저우는 비싼 선수를 사오기 보다 유소년 육성에 투자했다. 2004년에 1군과 각급 유스팀, 축구학교가 한 자리에 모인 대규모 클럽 하우스 시설을 완공했다.

지금 항저우는 유스 팀에서 성장한 1993년생 선수들이 주축이다. 1994년과 1995년생 선수도 다수다. 외국인 선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유스 출신 선수들이다. 그러나 재능을 인정 받은 선수들은 일찍 프로에서 주목 받은 뒤 자만에 빠지거나, 부상을 당해 빛을 잃어갔다. 항저우 회장은 홍 감독과 가진 두 번의 미팅에서 팀 성적보다 선수단의 관리를 당부했다.

항저우가 홍 감독을 원했던 것은 U-20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에서 한국의 어린 선수들로 이룬 성과 때문이다. 선수 시절부터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을 통해 정신적으로 강한 팀을 만들고자 했다.

홍 감독은 부임 후 데이터를 통해 선수들의 프로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선수단의 체지방이 한국의 일반적인 축구 팀 수준 보다 훨씬 높았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규율이 부족했다. 경기장 위에서 주도적인 경기를 할 수 있는 기술을 표현하려면 우선 좋은 몸 상태를 갖춰야 한다.

홍 감독 부임 후 진행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항저우 선수단의 평균 체지방률은 2% 이상 감소했고, 체중도 3kg 이상 줄었다. 근육량은 2% 가까이 늘었다. 태국과 두바이에서 진행한 두 달여 전지 훈련 기간 동안 가져온 ‘실제적 변화’다.

6일 저녁 7시 35분 황룽스타디움에서 열린 창춘과의 CSL 1라운드 경기에서 항저우는 전반전에 2-0 리드를 잡았다. 전반 4분 만에 펑강의 패스를 받은 천보량이 왼발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었고, 전반 20분에 천보량이 얻은 페널티킥을 팀 케이힐이 성공시켰다.

수비적으로도 단단했다. 오범석이 센터백으로 나서 중심을 잡았다. 후반 25분 창춘 공격수 모레노의 헤더에 실점했고, 오범석이 부상으로 빠진 이후 급격히 흔들렸지만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항저우 홍보담당관 리레이는 개막전 경기를 지켜본 뒤 “지난 시즌보다 팀이 훨씬 좋아졌다”며 홍명보 효과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어린 항저우 개조한 홍명보 리더십

홍 감독은 항저우 선수단과의 첫 미팅에서 화이트 보드에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이라는 두 개의 단어를 썼다고 했다. “축구 실력의 발전을 위해선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정신적인 면은 무한하다. 보이지 않지만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

이날 경기에서 항저우 선수들은 기술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를 마친 뒤 홍 감독은 “이긴 것도 좋지만 그 보다 선수들이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팀에 헌신한 모습을 본 것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창춘은 지난 시즌 항저우와 두 번의 대결에서 모두 이긴 팀이다. 오범석은 창춘전을 앞두고 “같이 강등권에서 다투는 경기라 유명 팀들보다 오히려 이 경기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홍 감독은 항저우를 이길 수 있는 팀으로 변화시켰다.

홍 감독이 항저우를 강하게 뭉치게 한 배경에는 엄격과 배려를 적절히 적용한 리더십이 있었다. 항저우에서 홍 감독의 통역을 맡고 있는 유봉은 “선수들 모두 감독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존경한다. 무엇보다 감독님의 배려심을 좋아한다. 선수들과 관계가 아주 좋다”고 했다.

홍 감독은 체중 조절에 실패한 선수들의 몸 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해 태국 전훈 기간 아침 7시에 20분씩 조깅을 실시하도록 했다. 조깅 이후 아침 식사를 한 뒤 휴식을 취하고 오전 훈련을 진행했다. 대신 선수들의 계약서에 쓰여 있는 다양한 종류의 벌금 조항을 없앴다. 중요한 몇 가지 항목의 액수를 높이고, 100위안, 200위안 단위로 촘촘히 매겨진 규율 관련 벌금 조항을 삭제했다.

훈련 자체는 많은 체력을 요할지 몰라도, 분위기는 엄하지 않았다. 홍 감독은 훈련 전 마지막 발언에서 "항상 여러분이 운동장에 나가서 가장 즐거워야 해"라고 했다. 훈련 이후 시간에는 더 자연스럽게 농담을 하고, 선수들과 내기 시합을 하는 등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선수 파악을 위해 홍 감독이 선수들과 개별 면담을 했는데, 나중에는 홍 감독이 거절해야 할 정도로 많은 개별 면담 요청이 쏟아졌다.

외국인 선수와 중국 선수들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지난 시즌 후반기부터 활약한 호주 수비수 매슈 스피라노비치를 주장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유스 출신으로 중국 올림픽 대표 선수로 발탁된 자오위하오와 팀내 고참급 선수인 황시앙을 부주장으로 임명했다.

#항저우를 유연하게 만든 홍명보 디테일

경기 내적으로 항저우는 지난 시즌과 비교하면 변화가 크다. 골키퍼를 포함해 수비 라인의 주전 선수 4명이 이적했다. 스피라노비치만 남은 셈이다. 라이트백과 센터백을 겸할 수 있는 오범석은 홍 감독이 택한 영입생이다. 공격진에도 코트디부아르 공격수 다비 클로드 안강 외에 팀 케이힐과 데니우손 가비오네타가 새로운 외국인 공격수로 가세했다.

창춘과의 경기에는 경기 전 훈련에서 홍 감독이 직접 시범을 보이고, 세세한 움직임까지 준비한 패턴이 결과를 냈다. 전방 중앙에 자리하는 케이힐이 측면 배후로 넓게 움직이며 수비를 유인하거나 공을 받고, 2선과 측면에 서는 데니우손이 케이힐이 비운 중앙 배후 공간으로 빠져드는 교차 움직임을 공격 전술 훈련에서 반복했다. 둘의 동선은 여러 패턴으로 변형해 준비했다.

창춘 수비는 둘의 부지런한 움직임에 고전했다. 압박 그물은 쉽게 헝클어 졌다. 케이힐과 공중볼 경합은 물론 세컨드볼 경합에서 모두 밀렸고, 데니우손의 공간 침투와 드리블을 제어하지 못했다. 둘이 존재감을 보이면서 대만 대표팀의 주장인 우측면 미드필더 천보량의 플레이도 살아났다.

멀티 수비수 오범석은 중앙 수비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수비형 미드필더의 영역까지 전진해 위험 지역에서 먼 위치에서 상대 공격을 차단했다. 공격 빌드업 상황에는 중앙 미드필더 천종류가 센터백 사이로 내려오면 측면으로 이동해 풀백의 위치에서 패스 활로를 열었다.

수비 상황에서는 4-4-2 대형으로 콤팩트한 라인을 구성했다. 홍 감독은 “중국은 리그 일정이 일찍 끝나기 때문에 12월부터 프리시즌 훈련에 돌입한다. 내가 12월 말에 선임되면서 우리는 한 달 가량 늦었다”며 개막전 승리 가능성을 높게 점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홍 감독의 발언은 엄살이었다. 항저우는 기대 이상의 조직력을 보이며 승점 3점을 얻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박건하 대표팀 코치는 “팀에 홍 감독의 색체가 느껴진다”고 했다.

이날 홍 감독은 당초 선발 명단에 올렸던 스피라노비치가 끝내 몸 상태를 회복하지 못해 킥오프 직전 교체를 해야 했다. 오범석의 센터백 파트너로 수비형 미드필더 자오위하오가 내려왔고, 측면 미드필더 펑강이 중앙으로 이동했다. 루오징이 측면에 새로 선발 투입됐다.

오범석과 자오위하오는 올 시즌 홍 감독이 전술적 핵심 선수로 꼽는 선수들이다. 두 개의 포지션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다. 홍 감독은 미리 이런 상황에 대비했기에 곧바로 대처할 수 있었다고 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된 것은 아니다. 홍 감독은 경기 내내 벤치에 앉지 않고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선수들의 위치 선정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지속적으로 체크했다.

중국 무대에 처음 도전한 홍 감독은 매일 저녁 TV 앞에 앉는다. 중국 슈퍼리그 팀들이 참가하는 AFC챔피언스리그 경기와 금요일과 토요일 열린 CSL 경기를 빼놓지 않고 봤다. 상하이선화와 원정 경기에서 비긴 연변부덕의 경기는 선수들과 함께 봤다. 몸을 던지며 수비하는 연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배울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항저우 선수들도 이날 몸을 사리지 않고 수비했다.

#숙제가 반가운 프로 감독 홍명보

숙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홍 감독의 염려대로 새로 입단한 골키퍼 장레이는 골킥와 패싱이 불안정했고, 상대 슈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도 불안감을 노출했다. 프리시즌 기간 한 차례도 연습 경기에 나서지 못한 스피라노비치의 컨디션이 아직 정상에 오르지 못했고, 이날 경기에서 부상으로 교체 아웃된 오범석의 상태도 지켜봐야 한다. 당장 2라운드 경기에 큰 전력 손실이 우려된다.

홍 감독은 “지금 만족하긴 이르다. 우리 팀은 선수층이 얇다. 부상 선수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슬기롭게 넘어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홍 감독은 오범석을 어린 항저우의 수비 구심점으로 점찍고 영입했다. 오범석은 7일 정밀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황인우 의무 트레이너는 "일단 인대 부상이 아니라 장기화되지는 않을 것"이라 전했다.

최근 평균 관중이 줄어들고 있는 항저우는 개막전부터 홍명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 경기장 앞에는 오범석의 이름을 마킹한 유니폼이 노점에 깔렸다. 팬들은 전반에만 두 골을 터트린 항저우의 플레이에 크게 환호했다. 5만여 좌석을 채우기엔 부족한 숫자였지만, 이날 경기장을 찾은 1만 5천여 관중들은 모두 만족스런 표정으로 경기장을 나섰다.

경기장 본부석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항저우 서포터즈는 홍명보의 얼굴을 그린 대형 걸개를 준비해 새 감독의 첫 경기에 성원을 보냈다. 홍명보의 이름도 한글로 새겨졌다. 항저우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도 홍명보 감독을 환영하는 대형 현수막을 들고 응원했다. 유명 관광지인 서호(西湖)와 한류 가수 콘서트 등의 인기에 밀린 항저우 축구는 오랜만에 화제가 됐다.

공식 회견 이후 현장을 찾은 한국 취재진과 추가 인터뷰를 마친 홍 감독도 흐뭇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홍 감독은 프로 데뷔전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냥 경기를 하는 것이라 특별한 소감은 없다”고 했다. 다만 “이 선수들과 내일 또 훈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기쁘다”고 했다.

그동안 대표팀에서만 지도자를 했던 홍 감독에게 부족했던 것은 훈련 시간이었다. “대표팀은 경기가 끝나면 해산하는데, 이 선수들과 또 얼굴을 보고 훈련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홍명보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고, 축구로 미소를 되찾았다. “개막 경기이고, 해외에서 처음하는 경기였다. 우리 구단은 개막 경기를 5년 만에 이겼다. 굉장히 기분이 좋다.”

사진=풋볼리스트

풋볼리스트 주요 기사
이재명 성남 구단주, 수원FC에 '시청기빵-깃발라시코' 제안...꿀잼 폭발
'월드컵 준우승' 달성한 일본, 올림픽 본선 사실상 '좌절'...한국은?
'치차리토 멕시코 대표팀 친구' K리그 데뷔전 보름 남았다!
아담 존슨, 아동 성범죄 유죄 징역형...'방출-선수 생명 끝'
[특강 모집] 축구를 직업으로 삼자!

저작권자 © 풋볼리스트(FOOTBALL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