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성남FC의 골키퍼 김영광은 22일 수원FC와의 원정 경기에 풀타임 출전하며 개인 통산 548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이동국이 보유한 K리그 역대 개인 최다 출전 기록 2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프로 20년차에 달성한 위업이다. 

그 영광스러운 날, 김영광은 선수 생활 동안 겪은 적 없던 치욕을 경험했다. 후반 추가시간 1분째에 허용한 세트피스에서의 실점으로 1-2로 뒤진 성남은 남은 3분 동안 동점골을 위한 공격이 급했다. 마지막에 롱볼을 통한 하이포스트 전략으로 공격을 시도하려던 성남은 박수일이 백패스를 했고, 골키퍼 김영광이 왼발로 차 전방에 길게 보내려 했다. 

그런데 뒤로 굴러오던 공이 절묘하게 김영광의 왼발 킥 타이밍에 맞춰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켰다. 김영광은 헛발질을 하고 말았고, 공은 그대로 성남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됐다. 처음엔 김영광의 자책골로 기록됐지만, 나중에는 백패스를 한 박수일의 자책골로 정정됐다. 느린 화면으로 확인한 결과 균일한 페이스로 굴러오던 공이 킥 타이밍에 튀어나온 잔디를 맞고 별안간 솟으며 김영광의 왼발을 지나갔다. 

지난 주말과 주중 사이 비슷한 사례가 쏟아졌다. 김영광의 상황이 벌어진 지 불과 2시간여 뒤에도 흡사한 장면이 나왔다. FC서울과 인천유나이티드의 경기에서는 후반 37분 인천의 오반석이 서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뒤로 준 패스를 골키퍼 정산이 오른발 킥으로 처리하려 하다 역시 잔디에 공이 예상보다 더 튀며 헛발질을 했다. 공은 골대 옆으로 빠져나갔지만, 정산은 이 장면에서 오른쪽 허벅지 근육을 다쳐 이태희로 교체되고 말았다. 

18일 열린 전북현대와 수원삼성의 경기도 주목해야 한다. 수원 한석종의 평범한 인사이드 패스를 골키퍼 양형모가 주발인 왼발로 차려고 했는데, 불규칙 바운드로 인해 아웃프런트에 맞은 뒤 역회전이 걸려 자책골이 나올 뻔했다. 21일 열린 광주FC와 전북현대의 경기에서는 반대로 전북 골키퍼 송범근이 수난을 겪었다. 후반 42분 엄지성이 때린 다소 평범한 중거리슛을 안정적으로 잡기 위해 준비했는데 공이 뒤집어진 잔디 뭉텅이를 맞고 마지막 바운드에서 치솟아 잡지 못했다. 곧바로 쇄도한 엄지성이 조금 더 빨랐다면 실점할 수 있었던 순간이다. 

8월과 9월 K리그 경기가 펼쳐지는 전국의 축구전용구장과 종합운동장의 잔디 상태는 시즌 중 가장 나쁘다. 특히 득점을 위한 강한 디딤발과 킥 동작, 세트피스 상황에서 많은 선수가 운집하며 잔디가 일어난 골문 앞은 곳곳이 위험 지대다. 상대 선수 움직임과 슈팅에 집중해야 하는 골키퍼들 입장에서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탄이 자신들 앞에 숨겨져 있는 셈이다. 

닷새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한 이런 장면들로 인해 각 팀 골키퍼와 코치진은 기술적인 대응을 할 것이다. 백패스를 다이렉트로 처리하기보다는 인사이드 터치로 잡은 뒤 안정적으로 킥할 것을 주문할 수 있다. 중거리슛의 불규칙 바운드 가능성에도 늘 대비하고, 다른 동료 선수들이 상대 선수보다 빨리 쇄도해 2차 수비를 신경써야 한다.

하지만 근본적 과제는 잔디의 질에 달렸다. 잔디 관리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닌, K리그와 한국 축구의 오랜 숙제다. 프로야구 KBO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잔디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을 뿐 상태가 말이 아니다. 6월 정도까지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잔디 상태가 여름철을 지나면 심각한 상황으로 번진다.

K리그 경기장에 깔린 잔디는 소위 양잔디로 불리는 유럽 원산지의 한지형 잔디다. 추운 날씨를 잘 견디는 대신 고온에 취약하다. 기온이 27도를 넘어가면 성장이 급속도로 느려진다. 문제는 K리그가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경기를 치른다는 점이다. 올해는 6월에 A매치와 AFC 챔피언스리그 일정으로 리그 전체 휴식기가 생겨 관리가 용이할 거라는 견해가 있었지만, 코로나 변수로 8월에 경기가 더 쏠리고 말았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8월과 9월에만 8경기(리그 7경기, A매치 1경기)를 치렀다. 전주월드컵경기장은 7경기다. 최악은 수원월드컵경기장이다. 무려 9경기를 했다. 8월부터 수원FC가 기존 홈구장인 수원종합운동장의 잔디 보수 공사로 수원월드컵경기장으로 이전하며 두집 살림을 하고 있다. 게다가 9월 7일에는 월드컵 예선 경기도 치렀다. 9월 들어 치른 4경기는 11일과 12일, 21일과 22일로 하루 간격으로 열렸다. 오는 26일에는 슈퍼매치까지 열려 2달 사이 10경기를 치르게 된다. 물리적인 경기 숫자가 과도해 잔디 관리와 복원에 손쓸 여유를 갖지 못한다. 

최근 한반도 기후가 여름철 집중 호우, 올라간 평균 온도로 인해 잔디 관리의 난이도는 한층 더 올라갔다. 하지만 그 난이도를 쫓아 가기 위한 인력과 재화의 투입은 한계가 있다. 2019년 하반기 전면 교체 후 유럽과 일본 부럽지 않은 최상의 잔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극찬을 받던 울산현대의 홈인 문수경기장조차 최근 AFC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심각한 상황을 노출했다. 

현재도 대전하나시티즌과 수원FC가 기존 홈 경기장의 대대적인 잔디 교체 작업으로 인해 지역 내의 다른 구장으로 옮겨 경기를 치르는 중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도 10월 내 잔디 교체에 돌입해 FC서울이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잠시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지나면 최상의 잔디 컨디션을 볼 거라는 기대감이 생기지만, 대부분의 잔디 전문가들은 식재와 조성보다 관리가 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프로축구연맹도 잔디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지난 2년 간 일본 현지 실사와 용역을 실시해 개선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일본에서 최고의 잔디 관리를 자랑하는 가시마 앤틀러스 구단의 노하우를 정리한 매뉴얼을 공유 중이다. 올해는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골프사업팀 소속인 잔디환경연구소와 파트너십을 맺고 연중 2차에 걸쳐 잔디품질 진단에 관한 현장 조사를 진행 중이다. 잔디 생육을 위한 전반적 개선 방안을 조언 받게 됐다. 

이런 노력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문제 해결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잔디가 생육을 멈추는 7, 8월의 경기수 조절이다. 잔디 관리 난이도가 가장 높은 시기에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해결하지 않는 한 전면 보수와 최신 생육성장조명, 자동 센서를 활용한 관리도 소용 없다. 

팬들은 프로스포츠가 더 나은 질의 상품이길 원한다. 선수들은 최상, 혹은 차선의 조건에서 기술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우당퉁당 거리는 잔디 위에서는 그게 성립되기 어렵다. 수년째 한국 축구와 K리그에 대두된 잔디 문제를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풀어야 하는 시기다. 

사진=풋볼리스트 서형권 기자, 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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