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전주] 김정용 기자= 전세계가 지켜보는 경기에서 K리그1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대신 이동국과 전북현대 선수들의 골 세리머니는 “한국의 높은 시민의식”이라는 이동국의 말처럼 품격이 있었다.

8일 전주 월드컵경기장에서 ‘하나원큐 K리그1 2020’ 개막전을 치른 전북현대가 수원삼성에 1-0 승리를 거뒀다. 교체 투입된 공격수 이동국이 선제결승골을 넣었다.

 

# 철저한 방역 속 무관중 개막

K리그는 예정대로 관중 없이 개막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 증가 추이가 크게 꺾이면서 프로스포츠를 개막할 수 있게 됐지만, 관중을 받는 건 시기상조다. 이날 최윤희 문체부 2차관이 현장을 방문해 방역 상황을 점검하고 한국프로축구연맹과 구단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41세 이동국은 “빈 경기장에서 뛰는 건 처음”이라고 했고, 다양한 리그 경험을 쌓은 조세 모라이스 감독에게도 낯선 경험이었다. 경기 전후 선수들 사이 거리 유지,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마스크 착용 등 방역 지침에 따른 경기였다. 이동국의 득점 직후 동료들이 골 세리머니를 하자고 몰려들자, 이동국이 선수들을 진정시킨 뒤 ‘거리두기’ 상태에서 세리머니를 했다.

그러나 격렬한 축구경기가 벌어지는 가운데 방역지침을 실천하는 건 쉽지 않았다. 벤치의 코칭 스태프는 경기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고, 선수들은 침을 뱉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모두 지키기 어려웠다. 한 관계자는 ‘침 뱉는 행위를 완전히 막는 건 어렵지만, 지나치게 반복된다면 주심이 경기 중 제재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 전술적 해답을 찾지 못한 두 팀

경기 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시즌부터 제기된 전술적 숙제에 두 팀 모두 해답을 내놓지 못한 경기였다.

수원은 3-4-1-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경기에 임했으며, 시간이 갈수록 뒤로 물러나다 결국 자기 진영에 갇힌 채 수비에 전념했다. 수비력 자체는 준수했으나 후반전에 나온 안토니스의 퇴장, 일방적으로 공격 당하다보면 자주 내줄 수밖에 없는 세트피스로 실점했다. 이임생 감독은 경기 후 “수비력은 만족하지만 공격 전개가 아쉽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수원의 역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시즌 득점왕 타가트에게 주어진 득점 기회는 단 한 차례에 불과했고, 송범근의 선방에 막혔다. 투톱으로 뛴 염기훈, 공격형 미드필더 김민우 등 많은 선수가 자기 역량을 살리지 못했다. 호평받은 건 센터백 헨리 정도다.

전북은 지난 시즌 알아서 공격을 풀어줬던 로페즈, 문선민이 이탈한 공백을 메우는 데 실패했다. 새로 합류한 무릴로는 드리블러보다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선수다. 적극적인 돌파를 하는 선수가 한교원 한 명뿐이었다. 전북은 많은 슛을 날렸지만 중거리슛의 비중이 높았다. 수원 문전으로 날카롭게 이어지는 패스 전개를 보기 힘들었다. 무릴로, 김보경, 이승기에 교체 투입한 쿠니모토까지 테크니션을 대거 투입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안토니스의 퇴장이 아니었다면 전북도 승리하기 어려웠던 경기 양상이었다.

# 이동국이 보여준 ‘국격’

이 경기를 온라인 중계로 시청한 각국 시청자들이 ‘골이 필요하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며 슬슬 지루해하던 후반 38분, 이동국이 멋진 득점과 골 세리머니로 개막전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냈다.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골을 넣은 이동국은 또 시즌 1호골을 기록했다. 2012년, 2018년에 이어 세 번째다.

세리머니는 품격이 높았다. 이동국과 전북 선수들은 관중석에 오지 못한 팬들을 상상하며, 그 방향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에게 감사를 담은 ‘덕분에 챌린지’다. 경기 후 녹색 마스크를 쓰고 기자회견장에 등장한 이동국은 “이 시국에 고생하는 의료진이 많다. 그들 덕분에 잘 이겨내고 있다 생각한다. 경기 전 누가 넣더라도 의미 있는 세리머니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함께 준비했다”고 했다.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을 증명하는 가운데, 참으로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이 사태 속에서도 우린 모여서 훈련해 왔다. 외국보다 우리나라가 슬기롭게 헤쳐 왔다. 훈련하면서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하다. 한국의 의식이 수준 높았기 때문에 이런 위급한 상황도 좋은 상황으로 빨리 만들어냈다. 선수들은 공인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 속에 생활한다.”

 

# 전주는 축구장 가는 날을 기다린다

경기장 가는 길부터 어색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경기장 바로 앞 호남제일문에서 한 차례 승객들을 떨군 뒤 전주터미널로 간다. 호남제일문에서 내리는 승객들은 대부분 취재진이거나 축구팬인 경우가 많다. 이날은 당연히 축구팬이 한 명도 없었다. 녹색 유니폼도, 닭강정 판매부스도 없었다. 대신 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설치한 해외 입국자 수송 지원 천막이 보일 뿐이었다. 관중석이 빈 대신, 홈 관중들이 보낸 걸개가 잔뜩 걸렸다. 전북은 종종 녹음된 응원가를 틀었다.

전주는 전국에서 축구 인기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다. 취재 후 만난 택시기사는 “전북 경기가 끝난 뒤에는 택시를 잡으려는 타지역 축구팬들을 역까지 실어 나르느라 두세 번씩 경기장으로 돌아올 때도 있다. 전주 택시기사들이 경기장 주위에 미리 모여있곤 한다. 무관중 경기가 아쉽다”고 말했다. 이동국의 세리머니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이동국은 우리 전라북도의 레전드”라고 말했다.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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