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한국인 유럽파 선수들의 역사적인 경기와 시즌을 돌아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에서 ‘유럽 축구’가 해외 야구, 해외 농구를 뛰어넘는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자리잡을 수 있었다. 유럽파의 한 시즌을 골라 가장 중요한 경기를 리뷰하고, 그 시즌의 파급효과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박지성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남긴 ‘레전드’ 경기 중에서도 첫 시즌 풀럼전은 중요하다. 초창기 가장 큰 인상을 남기며 한국인의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 경쟁력을 증명한 경기였다. 또한 박지성 하면 떠오르는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파트리스 에브라와의 호흡과 달리 이때는 뤼트 판니스텔로이에게 어시스트를 했고 에브라는 영입되기도 전이었다. 계속 공을 요구하는 모습에서 24세 시절의 적극적인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 경기 전 : 서서히 안착해가던 박지성, 과도기의 맨유

맨유는 2005년 10월 1일(한국시간) 열린 2005/2006시즌 8라운드를 앞두고 3승 2무 1패에 그치며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7전 전승 중이었던 첼시와는 격차가 컸다. 풀럼 역시 부진했는데, 1승 2무 4패로 강등을 걱정하는 처지였다.

맨유의 판니스텔로이, 루니 투톱은 강력했다. 앞선 6경기에서 맨유가 넣은 골은 판니스텔로이의 5골, 루니의 2골이 전부였다. 그러나 나머지 선수의 공격 기여도가 떨어지면서 팀 전체 득점력이 약했다. 그나마 3실점으로 틀어막은 수비가 아니었다면 3승조차 거두기 힘든 초반 전력이었다.

 

▲ 라인업 : ‘좌 긱스, 우 박지성’ 배치

맨유의 투톱인 판니스텔로이와 루니는 탄탄했지만 중원이 문제였다. 왼쪽 미드필더 라이언 긱스도 전성기만큼 강력한 윙어는 못되는 가운데, 중앙 미드필더로 다소 서툴었던 대런 플레처와 앨런 스미스가 배치됐다. 특히 스미스는 잉글랜드 대표팀까지 선발된 공격수였으나 이때 맨유의 중원 공백 때문에 미드필더로 뛰고 있었다.

박지성은 오른쪽 미드필더로 배치됐다. 박지성과 긱스는 중앙 미드필더 성향이 강한 선수들답게 자주 중앙으로 이동하며 패스를 연결했다. 측면 돌파만 반복하는 윙어라기보다 그라운드 전체를 누비는 미드필더에 가까웠다.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만으로 중원을 꽉 채우는 1990년대 EPL 축구의 흔적이 남은 선수 배치였다.

맨유 포백은 키에런 리차드슨, 미카엘 실베스트르, 리오 퍼디난드, 존 오셰이가 맡았다. 골키퍼는 에드빈 판데르사르였다. 아직 풋내기였고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맨유의 후보 센터백이었던 제라르 피케가 벤치에서 대기했다.

풀럼은 콜린 욘과 브라이언 맥브라이드를 투톱으로 기용했다. 왼쪽 측면에는 스피드가 좋은 루이스 보아모르테, 오른쪽 측면에는 기술이 좋은 스티드 말브랑크가 배치됐다. 중원은 클라우스 옌센과 파파 부바 디오프가 맡았다. 수비진은 니클라스 옌센, 카를로스 보카네그라, 알랭 고마, 모리츠 폴츠가 맡았다. 판데르사르가 맨유로 떠난 뒤 골문 앞에 선 건 마크 크로슬리였다.

 

▲ 전반전 : 3골을 만들어낸 박지성의 맹활약

전반 2분 골킥으로 시작된 풀럼의 공격이 쉽게 골로 이어졌다. 맥브라이드의 헤딩 패스를 받은 욘이 퍼디난드를 앞에 두고 슛을 시도했고, 퍼디난드가 제대로 막지 못한 공을 욘이 다시 주워 차 넣었다. 맨유는 전반 5분 긱스, 루니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공격한 끝에 스미스의 중거리 슛으로 마무리했으나 골대를 빗나갔다.

역시 맨유 중원 장악력은 형편없었다. 당시 EPL에서는 마구 세컨드볼 싸움을 벌이는 양상이 자주 벌어졌는데, 활동량과 중원 장악력에서 앞서는 미드필더가 꼭 필요했다. 그러나 맨유의 중원 조합으로는 투톱에게 공을 전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전반 14분 박지성이 세컨드볼을 따낸 다음 루니에게 전달했고, 루니의 전진 패스를 받은 뒤 재치있는 돌파를 시도했으나 수비의 몸싸움에 막혀 파울을 얻는 데 그쳤다.

이때부터 박지성이 경기 주인공으로 올라섰다. 바로 다음 공격 상황에서 공을 받은 박지성은 중앙선에서 문전까지 단숨에 대각선으로 돌파했다. 수비수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는 걸 놓치지 않은 박지성은 그 사이의 틈으로 공을 집어넣고 빠져나갔다. 마지막 수비수에게 밀려 넘어진 박지성이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전담키커 판니스텔로이가 마무리했다.

첫 골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박지성이 두 번째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긱스가 중앙으로 패스할 때, 박지성이 자연스럽게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로 이동하며 이를 받았다. 박지성의 판단력은 풀럼 수비수들을 압도했다. 박지성이 오른발로 원터치 패스를 할 때, 판니스텔로이가 수비수 한 명을 유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 순간적으로 공간이 생겼다. 이를 눈치챈 루니가 침투해 오른발로 마무리했다.

경기 초반 풀럼에 밀리던 맨유는 박지성의 맹활약 이후 주도권을 회복했다. 여전히 힘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맨유가 적극적으로 스루패스, 코너킥 등을 시도하며 득점을 노렸다. 그러나 여전히 루니나 판니스텔로이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풀럼은 전반 28분 어렵잖게 동점을 만들었다. 플레처의 반칙으로 주어진 프리킥 기회를 살렸다. 클라우스 옌센의 프리킥이 문전으로 날아들었는데, 퍼디난드가 걷어내지 않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판데르사르가 막지 못했다. 파디난드가 수비 불안을 자주 지적받던 시기의 모습이다.

실점 직후 박지성이 속공을 이끌었다. 박지성이 공을 끌고 올라간 뒤 모처럼 판니스텔로이에게 좋은 패스를 내줬으나, 슛이 골키퍼에게 막혔다. 풀럼은 말브랑크의 하프발리슛으로 응수했다.

박지성은 전반 34분 프리킥도 맡았다. 박지성이 오른발로 올려준 공이 적절한 궤적을 그렸으나 판니스테로이의 쇄도보다 크로슬리가 빨리 잡아냈다.

전반 43분 긱스가 오랜만에 환상적인 발재간을 보여줬다. 왼쪽 측면부터 수비수 2명을 돌파해들어간 뒤 골키퍼까지 제치고 중앙으로 패스했으나 보카네그라의 필사적인 걷어내기에 막혔다.

그리고 박지성이 일찌감치 승부의 마침표를 찍었다. 후방으로 내려간 루니가 침투해들어가는 박지성을 발견했다. 박지성이 큰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박지성에게 멋진 스루패스를 내줬고, 크로슬리 골키퍼가 달려 나오자 박지성이 판니스텔로이에게 공을 쓱 내줬다. 판니스텔로이가 빈 골대에 공을 밀어 넣었다. 박지성이 3골을 모두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 후반전 : 승리 지킨 맨유, 교체 투입된 호날두

후반 들어 비가 내렸고, 전반전에 힘을 쏟아부은 두 팀 선수들 모두 몸놀림이 조금씩 느려졌다. 박지성은 후반전 초반에도 많이 뛰며 적극적으로 공을 탈취하려 했다. 조직적인 압박은 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박지성은 풀럼의 패스 경로를 차단하고, 기회를 노려 슬라이딩 태클을 감행했다. 루니나 판니스텔로이를 향해 롱패스가 날아갈 때, 연계 플레이를 위해 가장 먼저 접근하는 동료도 늘 박지성이었다.

맨유는 후반 12분 리차드슨 대신 라이트백 필 바슬리를 투입했고, 오셰이가 리차드슨의 위치로 이동하며 멀티 플레이어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 27분 풀럼은 맥브라이드 대신 헤이다르 헬거슨을 넣어 공격 조합을 바꿨다. 맨유의 공격에 이어 풀럼 문전에 공이 떨어졌을 때 박지성이 쇄도했으나 수비가 간발의 차로 걷어냈다.

후반 32분 풀럼이 욘 대신 캐나다 대표 베테랑 공격수 토마쉬 라진스키를 투입했다. 이때 맨유는 노장 긱스 대신 호날두를 투입했고, 박지성과 좌우 측면을 이루도록 했다. 박지성은 긱스가 빠진 뒤 더 적극적으로 공의 순환에 관여하면서 다른 공격자원들과 연계 플레이를 했다. 오른쪽에서는 박지성과 바슬리의 콤비 플레이가 전개됐다.

후반 39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판니스텔로이를 폴 스콜스로 교체하면서 ‘굳히기’로 들어갔다. 맨유가 모든 교체카드를 다 쓰면서 박지성의 EPL 첫 풀타임 소화가 확정됐다.

후반 40분 박지성이 바슬리와 함께 수비에 성공한 뒤 루니와 공을 주고받으며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마지막 돌파 때 공이 튀면서 빼앗겼다. 박지성은 이후 코너킥 기회에서 키커를 맡았다. 돋보일 기회가 없었던 호날두는 후반 추가시간 모처럼 공을 받아 시간을 끄는데 특유의 발재간을 활용했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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