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한국인 유럽파 선수들의 역사적인 경기와 시즌을 돌아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에서 ‘유럽 축구’가 해외 야구, 해외 농구를 뛰어넘는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자리잡을 수 있었다. 유럽파의 한 시즌을 골라 가장 중요한 경기 리뷰, 시즌 소개, 그 시즌의 파급효과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2004/2005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는 한국 선수가 본격적으로 맹활약한 첫 대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 중에서도 PSV에인트호번 소속 박지성의 골과 이영표의 도움이 나란히 나왔고, 그 상대가 무려 AC밀란이었던 4강 2차전은 역사적인 경기다.

당시 상대팀 밀란의 수비수 4명은 모두 당대 최고였고, 카푸와 파올로 말디니는 당대를 넘어 축구사 최고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위대한 선수들이었다. 이들을 묶은 한국식 별명 ‘말네스카’가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박지성과 이영표가 그 수비진을 상대로 여러 번 효과적인 공격을 성공시켰다. 한국 사람들이 새벽 5시에 단체로 깨어 있게 만든 첫 사건이다.

 

▲ 경기 전 상황 : 최약체 PSV, 토너먼트 무실점 밀란

PSV는 4강 진출팀 중 최약체, 밀란은 최강으로 꼽혔기 때문에 경기 전에는 일방적 승부가 예상됐다. PSV는 16강에서 AS모나코를 꺾었고, 8강에서는 올랭피크리옹을 잡아내면서 두 번 연속 프랑스리그앙 팀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그마저 리옹전은 2무승부 뒤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였다. 반면 밀란은 16강에서 맨체스터유나이티드, 8강에서 인테르밀란을 무실점 전승으로 꺾었다.

밀란은 앞선 2002/2003시즌 우승팀의 틀을 유지한 가운데 카카를 추가한 당대 최강팀이었다. 반면 PSV는 당시까지 유럽무대 기준 무명에 가까웠던 이영표, 박지성, 헤페르손 파르판, 35세 노장 필립 코쿠 등이 주전이었다. 앞선 두 시즌 동안 간판 유망주였던 아르연 로번은 이미 첼시로 떠난 뒤였다. 1차전에서 밀란이 2-0으로 역시나 무실점 승리를 거두면서 2차전에도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 라인업 : 박지성, 이영표 상대는 ‘말네스카,’ 카카, 셰브첸코, 피를로…

PSV는 1차전 라인업 중 9명을 유지했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차전에서 최전방에 발 빠른 다마르커스 비즐리를 배치한 것과 달리 191cm 장신 공격수 얀베네고어 오브 헤슬링크를 배치했다. 빠른 역습을 노렸던 원정 경기와 달리 홈에서는 헤슬링크를 활용한 더 적극적인 공격을 염두에 뒀다.

이를 위해 박지성의 위치가 변했다. 1차전에서 비즐리를 지원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박지성은 2차전에서 왼쪽 윙어로 이동했다. 이영표는 두 경기 모두 왼쪽 풀백을 맡았다.

에우렐리우 고메스 골키퍼, 센터백인 알렉스와 조프리 보우마, 수비형 미드필더 요한 포겔, 중앙 미드필더 마르크 판보멀과 코쿠 등이 PSV의 주축이었다. 포메이션은 4-3-3이었다.

박지성이 측면에 배치됐지만 윙 플레이는 거의 하지 않았다. 박지성이 중앙으로 자주 이동해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뛰면서 중원 싸움에 힘을 보탰다. 왼쪽 공격은 이영표에게 일임했다.

밀란은 디다 골키퍼 앞에서 카푸, 알레산드로 네스타, 야프 스탐, 파올로 말디니로 구성된 초호화 포백이 수비를 맡았다. 안드레아 피를로, 클라렌스 시도르프, 젠나로 가투소, 마시모 암브로시니, 카카로 구성된 중원이 전원 주전으로 나섰다. 안드리 셰브첸코가 세도르프, 카카의 지원을 받으며 원톱으로 배치됐다.

 

▲ 전반전 : 박지성의 선제골로 흔들리는 밀란

장신 공격수를 기용한 거스 히딩크 PSV 감독의 선택은 전반 4분 뜻밖의 변수를 만들어냈다. 뜬 공을 헤슬링크가 시저스킥으로 마무리하려다 말디니의 뒤통수를 걷어차 버렸다. 말디니는 잠시 후 그라운드로 복귀했지만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아니었다.

경기 초반부터 한국 선수들이 돋보였다. 이날 이영표는 가투소와 카푸에게 둘러싸인 채 드리블을 해야 했고, 박지성이 상대해야 하는 밀란 포백은 21세기 가장 화려한 라인업이었다. 그러나 이영표는 전반 8분 현란한 드리블로 가투소를 두 번 속이고 크로스를 올리는 등 유독 돋보였다. PSV가 밀란보다 적극적으로 측면을 활용했는데, 오른쪽은 파르판이 뚫고 왼쪽은 이영표의 오버래핑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전반 9분 그 유명한 박지성의 UCL 첫 골이 터졌다. 포겔이 전진패스를 할 때 박지성이 절묘한 위치선정으로 밀란 미드필더 사이에서 공을 받은 뒤 헤슬링크에게 좋은 패스를 내줬다. 헤슬링크가 스탐을 돌파하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스크린 플레이처럼 버티며 박지성이 루즈볼을 잡게 도와줬고, 박지성이 달려들며 왼발로 찬 공이 디다 옆으로 강하게 꽂혔다.

득점 당시 박지성은 수비진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골을 터뜨렸다. ‘말네스카’가 모두 박지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박지성의 영리한 움직임 때문에 어느 수비수도 견제하지 못했다.

이 대회 토너먼트 첫 실점을 한 밀란은 공격을 강화해보려 했지만 PSV는 탄탄한 팀이었다. 특히 미드필더 세 명은 모두 수비력을 갖춘 동시에 깔끔한 빌드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수를 좀처럼 저지르지 않았다. 밀란은 속공 기회가 부족해 카카의 측면 이동을 통한 돌파를 활용해 봤으나 큰 위력이 없었다. 당시 밀란은 지공을 매우 꺼리는 팀이었기 때문에 셰브첸코와 카카에게 빠른 패스를 연결하고, 쉽게 잃어버리는 플레이를 반복했다.

박지성은 훗날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소속으로 유명하지는 ‘피를로 봉쇄’를 이날 부분적으로 선보였다. 박지성은 왼쪽에 머무르지 않고 중앙으로 자주 이동해 피를로의 빌드업을 견제했다. 전반 14분 가투소의 패스를 가로채 속공 기회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밀란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높이 우위를 잘 살렸다. 전반 27분 헤슬링크가 골대를 맞혔다. 이영표가 피를로에게 얻어낸 프리킥을 판보멀이 올렸고, 헤슬링크의 헤딩이 크로스바를 강타하고 벗어났다. 전반 39분에는 알렉스의 헤딩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전체적인 주도권은 전반 30분 즈음부터 밀란에게 넘어가 있었다. 전반 35분 카카와 세도르프가 연속으로 슛을 날렸으나 모두 무산됐다. 전반 40분 카카의 결정적인 슛을 알렉스가 몸으로 막아냈다.

 

▲ 후반전 초반 : 이영표, 카푸를 뚫고 기록한 어시스트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말디니가 빠지고 카카 칼라제가 투입됐다. 경기 양상은 후반 3분 파르판의 패스를 판보멀이 흘려주고, 박지성의 슛이 빗맞으면서 결정적인 기회가 무산됐다. 후반전 초반은 전반보다 더 공수전환이 빠른 공방전으로 흘러갔다. 박지성이 활용할 공간이 많아지면서 더 자주 공을 잡고 경기에 관여하게 됐다.

PSV는 여전히 세트피스가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후반 7분 이영표가 드리블로 카카를 뚫은 뒤 프리킥을 얻어냈고, 잠시 후에는 박지성이 카푸를 등지고 반칙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나온 프리킥이 보우마의 강력한 슛으로 이어졌으나 수비의 블로킹에 막혔다. 이어진 코너킥에서 코쿠가 날린 헤딩슛이 살짝 빗나갔다.

이영표는 왼발 크로스가 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이날은 왼발에서 결정적인 플레이가 나왔다. 후반 11분 돌파 후 날린 왼발 땅볼 크로스가 노마크 상태인 알렉스에게 연결됐으나 슛이 빗나갔다.

후반 20분, 이영표의 축구인생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어시스트 중 하나가 나왔다. 공격 방향을 바꾸며 이영표가 공을 받았고, 카푸와 일대일 대결을 벌일 수 있게 됐다. ‘헛다리’ 한 번 이후 갑자기 빠져나가는 드리블로 카푸를 제친 뒤 이영표가 왼발 크로스를 올렸다. 코쿠의 헤딩 마무리로 PSV가 점수차를 벌렸다. 1, 2차전 합계 점수는 동점이 됐다.

 

▲ 후반전 막판 : 밀란의 극적인 생존으로 명승부 마무리

두 팀 모두 공격을 강화했다. 밀란이 후반 24분 시도르프를 빼고 공격수 욘달 토마손을 투입했다. 곧바로 PSV는 센터백 보우마를 빼고 공격수 호베르트를 들여보냈다. 호베르트는 당시 유망주였으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2013년 제주유나이티드에서도 뛰었던 선수다. PSV는 코쿠를 수비수로, 박지성을 미드필더로 이동시켜 4-3-3 포메이션을 유지했다.

후반 30분 골킥을 헤슬링크가 떨어뜨려 줬고, 호베르트의 결정적인 왼발 슛이 디다의 선방에 막혔다. 이어진 코너킥에서 파르파의 중거리 슛이 살짝 빗나가고

어느 팀도 완벽한 주도권을 잡지 못했던 후반 추가시간, 밀란이 극적인 골을 터뜨렸다. 사실상의 결승골이었다. 카카가 왼쪽 측면으로 빠져 크로스를 올렸고, 암브로시니가 헤딩으로 마무리했다. 문전 침투가 특기인 암브로시니가 순간적으로 헤딩에 가담하며 공격수 숫자를 셋으로 불린 것이 통했다. 밀란 공격수가 더 많은 상황에서 편안하게 골을 터뜨린 암브로시니가 카카, 토마손과 함께 환호했다. 뒤이어 머리를 감싸 쥐는 이영표가 화면에 잡혔다.

원정 다득점 우선 원칙에 따라 2골을 넣어야 하는 것이 PSV의 처지였지만 뜻밖에도 곧장 한 골을 따라잡으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헤슬링크의 헤딩이 또 통했고, 문전으로 파고든 코쿠가 절묘한 발리슛을 성공시켰다. 박지성은 다리가 풀린 상태에서도 또 한 차례 전방압박으로 공을 따냈지만 그 외에는 달리기도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결국 경기는 밀란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글= 김정용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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