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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 ⑥ 조선인 축구팀이 일제강점기 일왕배를 제패했다
김정용 기자 | 승인 2019.08.16 14:00

[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일제시대 조선인들로 이뤄진 축구팀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배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국인은 그때부터 일본이나 중국보다 축구를 더 잘했다. 이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일제시대 일본 최대 대회 중 하나가 전일본축구선수권회(이하 전일본대회)였다. 지금은 일왕배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줄여서 일왕배(일본에서는 천황배)라고 부르는 바로 그 대회다.

일본의 FA컵에 해당하는 일왕배는 역사가 길다. 매년 1월 1일에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연다는 전통이 1960년대부터 자리 잡고 있어서 대회의 권위가 높고, 관중도 많다. 그 시초는 1921년이다. 전일본대회로 불리던 시절의 본선엔 일본의 6개 지방을 대표하는 팀이 참가했다. 그중 한 지방으로 취급된 곳이 식민지 조선이었다.

조선 대표로 나선 팀이 경성축구단이다. 1933년 경성의 축구인들이 모여 경성축구단을 발족시켰고, 기존에 경성을 대표하던 팀 조선축구단에서 여러 선수를 빼와 합류시켰다. 이런 창단 스토리는 영국 리버풀시를 연고지로 하는 에버턴과 리버풀처럼 유럽에서 흔히 보이는 더비 라이벌의 창단 과정과 비슷하다. 전통이 유지됐다면 조선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의 후손들이 지금쯤 서울 더비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축구단은 1935년 와해되고, 경성축구단이 경성의 대표적인 축구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전일본대회에 참가할 조선 대표팀을 꾸리기 위해 조선축구협회는 ‘지역예선’을 치렀다. 예선에서 뽑힌 경성축구단을 중심으로 각 팀의 선발 멤버들이 합류했다. 조선인 대표팀이 결성됐다. 그러나 일본축구협회는 선발팀이 아닌 경성축구단이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을 일구로 예선전에 뽑힌 경축을 중심으로 그동안 두 번이나 픽업팀을 편성하였으나 그 본부격인 일본축협으로부터 차를 인정치 않는다 하여 결국 경성서 우승한 경축 멤버만으로 가게 되었다.” (<동아일보> 1935년 5월 25일)

결국 일본으로 간 선수들은 대부분 경성축구단 소속이었지만 김성간, 김영근 등 평양축구단의 스타 공격진이 합류해 전력이 더 강해진 상태였다. 이미 한국 축구의 두 축이었던 보성전문(현 고려대)과 연희전문(현 연세대) 멤버들이 경성축구단의 주축을 이뤘기 때문에 국가대표급 전력이 갖춰졌다. 6월 2일과 3일에 걸쳐 열린 본선에는 문리과대학(간토), 북해도제대(홋카이도), 센다이축구클럽(도호쿠), 관서대학클럽(간사이), 나고야고등상업학교(도카이)까지 총 6팀이 참가했다.

1935년 6월 2일은 바람이 거센 날이었다. 오전 10시 열린 준결승 첫 경기에서 문리과대학이 관서대학클럽을 꺾고 먼저 결승에 진출했다. 11시에 경기장에 들어선 경성축구단은 나고야고상을 상대로 전반에 2골을 넣었고, 후반에 4골을 더 몰아치며 6-0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오후 3시에 열린 결승에서도 경성축구단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경기 초 문리대가 잠깐 우세를 잡았지만 허둥대다가 좋은 흐름을 놓쳤고, 전반 7분 김성간의 헤딩슛이 문리대 골망을 흔들며 경성축구단의 공격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1973년 <월간축구>(현 <베스트일레븐>) 기사엔 스탠드 절반가량을 채운 조선인들이 경성축구단의 활약에 환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 김성간의 헤딩이 네트에 꽂혔다. 스탠드의 절반을 차지한 조선인들이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16분 문리대 라이트 인사이드 포워드의 슛이 경성 풀백진의 허를 찔러 골이 되었다. (…) 그러나 18분 레프트 인사이드 포워드 최성손, 44분 라이트 인사이 포워드 배종호가 각각 한 골씩을 빼내고 말았다. 20분, 화이팅의 라이트 윙 박효제는 수차 적 문전에 돌입했다. 골키퍼 나까 가끼우찌의 발에 얼굴을 다치기도 했지만 곧 일어나 다시 뛰었다. 문리대는 30분경 단 한 번 경성진 페널티 에어리어에 진출했다. 전반 3대 1.” (<월간축구> 1973년 4월)

이미 승기를 잡은 경성은 후반전을 전술적으로도 압도하며 더 완벽한 승리를 가져갔다. 중거리 슛 기회가 많다는 걸 알고 먼 거리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슛을 노린 게 문리대의 허를 찔렀다.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최성손의 강슛이 추가골을 만들어 냈고, 김성간이 두 골을 더 터뜨리며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후반 11분에 이미 승부는 결정이 돼 있었고 문리대는 오히려 자기 진영에 웅크리고 수비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경성축구단의 우승은 바르셀로나가 하부리그 팀을 상대하듯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한 결과였다. 대회 전적은 12득점 1실점.

일본은 이듬해 열릴 베를린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제8회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이하 메이지대회)도 1935년 10월에 개최했다. 이번에도 조선 대표로 나선 건 경성축구단이었다. 11월 3일, 메이지신궁 경기장에 돌아온 경성축구단은 중국 대표 와호를 6-2로, 홋카이도의 강호 함관을 2-1로, 관서대학을 2-0으로 연파하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결승 상대 게이오 BRB는 게이오대학 재학생과 OB가 섞인 팀으로, 전일본대회 우승을 총 6회나 기록하게 되는 당대 일본 최강 중 하나였습니다.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공격수보다 수비수가 더 빛을 발했다. 경성축구단에선 연희전문의 정용수와 보성전문의 박규정이 라이벌 의식을 버리고 단결된 수비로 골문 앞을 지켰다.

경성축구단의 아크로바틱한 수비가 하이라이트였다. 정용수는 일본의 롱 패스를 공중에서 보기 좋게 차 내는 기술로 화제를 모았다. 발리슛을 남미에서 발명한 것이 1914년이니까 1930년대 아시아 수비수가 뜬 공을 정확하게 걷어낸 건 시대를 앞서간 기술이었다.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경성축구단은 승리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된다. 페널티킥이 선언됐고, 천재 테크니션 김영근이 골을 넣었다. 후반 15분이 넘어가면서 게이오 BRB의 저항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경성축구단은 안정적으로 승리를 지켰다.

일본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아사히신문 계열 화보 잡지인 <아사히그라프>엔 이혜봉 골키퍼와 정용수가 주인공인 그림이 실렸다. 당시 기준으로 묘기에 가까웠던 정용수의 기술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정용수는 ‘이 정도 반응이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해 서울에 돌아간 뒤 주위 사람들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스포츠 조선의 진출은 거대한 발자취를 신궁 경기장에 남겼다. 마라톤은 물론 중등 농구, 각 부현 대항 정구는 말할 것도 없고 땅에 발을 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쌘 경성 축구단은 일본 관동의 게이오 BRB를 꺾고 마침내 우승했다. 강인하기 짝이 없는 FW도 그렇거니와 수비의 FB, GK는 막강했다. 특히 LF 정군이 높게 올라온 공을 공중에서 보기 좋게 차내는 날렵한 동작 등은 굉장한 것이었다.'”

조선 축구가 일제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준 뒤, 주장 이영민은 자부심에 찬 인터뷰를 남겼다. 조선중앙일보 특파원에게 “우리 실력을 충분히 발휘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더 자중자진하여 세계 제패의 장도에 오를 것을 기약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계와 겨루겠다는 꿈, 조선 민족의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올림픽에 나간다는 건 비록 일본 대표팀 소속일지라도 조선인의 실력을 알릴 소중한 기회였다. 조선 축구단이 두 차례 선발전에서 모두 우승했지만 조선인 선수는 애초 7명에서 점점 줄어들어 김용식, 김영근 2명만 뽑혔다. 김영근 선생이 자진 사퇴한 뒤 김용식 선생 한 명만 올림픽에서 활약하게 된다.

당시 주요 멤버 중에는 광복 이후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전설이 많았다. 메이지 신궁에서 뛰진 못했지만 경성축구단의 주요 멤버였던 채금석 선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해 순사를 폭행(1934년의 일이라는 기록도 있어 시기는 불명확함)했다가 퇴학당한 열혈 청년이었다. 스피드가 빨라 ‘오토바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스타 선수였고, 김용식 선생의 축구 동지였다.

채금석 선생은 해방 이후 군산 지역 축구의 대부가 되어 강철 FC서울 코치, 노상래 전남드래곤즈 감독, 조덕제 수원FC 감독 등 현역 축구인들을 직접 지도했을 정도로 오래 활동했다. 현재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유소년 대회 ‘금석배’의 이름이 채금석에게서 딴 것이다.

주장이었던 송운 이영민 선생은 야구계에서도 ‘레전드’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고교 최고 타자에게 매년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이 바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1948 런던올림픽엔 야구 시찰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는데, 축구 대표팀이 흔들리자 갑자기 임시 감독을 맡았다. 어쩌다보니 ‘한국 축구 최초 올림픽 감독’이라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역시 경성축구단 관계자였다. 여운형은 경성축구단 창단 당시 이사장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만능 스포츠맨으로서 축구, 야구, 육상 등 여러 종목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36 베를린올림픽에 일본 마라톤 대표로 나간 손기정 선생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것도 여운형이었고,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도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손기정 신화는 상당 부분 여운형의 도움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운형은 경성축구단 창단 당시 이미 조선축구협회 회장이었고, 광복 후 조선체육회를 이끌었다. 좌익과 우익이 극심하게 대립하는 해방정국에서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그는 좌우 모두의 표적으로 지내다 1947년 백색테러로 암살당했는데, 그때도 축구 경기를 보기 전 잠깐 집에 들르던 길이었다.

체육인 여운형에 대한 2011년 논문(<여운형의 체육활동과 사상>, 손환 최성진)은 “여운형은 스포츠를 통한 건전한 정신, 강인한 민족을 만들기 위해 애썼으며, 과학적인 체육이론을 역설하며 엘리트 체육을 통한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려 노력하였다”라고 정리했다.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축구 교육을 중시했던 이유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경성축구단의 생명력은 그리 길지 못했다. 양대 세력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선수들이 자기 학교로 돌아가 대회에 나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경성축구단의 전성기가 2년 정도 이어진 뒤에는 경성축구단, 연희, 보성 등이 돌아가며 경성 대표로 전국 대회에 나갔다. 명맥을 유지하던 경성축구단은 1942년 일제의 전시체제에 따라 탄압이 심해지며 강제 해산됐다. 영국식으로 말하면 ‘경성 유나이티드’라고 할 수 있었던 지역 기반 클럽이 그렇게 사라졌다.

사진= 아사히그라프 삽회(‘월간축구’에서 재인용), 일본축구협회 제공

김정용 기자  cohenwise@firstdivis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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