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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 ⑤ 일제 탄압을 견딘 만주의 조선인 축구, 중국 최강이 되다
김정용 기자 | 승인 2019.08.16 11:17

[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한국인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일제시대에도 가장 축구를 잘 했다.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나중에 중국 대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조선 출신이 많은 길림성, 중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하는 지역이었다

“내가 동북의 호랑이였어.”

축구 수집가 이재형 씨(월간 베스트일레븐 이사)는 지난 1998년 중국의 연변을 찾아 ‘연변노인축구회’ 중 한 분의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집 주인이 ‘조선족 축구의 대부’ 정지승 씨였던 것이다. 1938년생인 정지승 씨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길림성 팀을 이끌었던 중국 축구계의 스타 출신이었다.

정지승 씨는 길림성 팀이 중국 전국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1965년 우승 멤버였다. 정지승 씨는 당시 입고 있던 유니폼을 꺼내 이재형 씨에게 선물했다.

이 유니폼은 불태워질 뻔했다. 길림성의 우승 다음해인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중국식 사회주의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축구 유니폼과 용품도 버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정지승 씨는 유니폼, 사진, 손으로 직접 쓴 교본 등을 뒷산에 몰래 묻어 뒀다가 나중에 파내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옷은 쪼그라들었지만 흰색으로 선명하게 써 놓았던 길림(吉林)이라는 팀명은 지금도 잘 알아볼 수 있다.

정지승 씨는 간도(북한의 북쪽에 닿아 있는 중국의 한 지역)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이 유독 축구를 잘 했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충북 진천 태생인 정지승 씨는 어려서 연변으로 이주했던 교포 1세대였다. 2001년엔 다시 모국인 한국으로 귀화해 국내에서 말년을 보내다 별세했다. 정지승 씨는 문화대혁명이 아니었다면 중국 대표로 발탁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후배 중엔 중국 대표, 옛 만주 대표로 뛴 사람들이 많았다.

길림팀의 위용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9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한 북한 ‘천리마 축구단’은 월드컵을 앞두고 정지승 씨가 속한 길림 팀과 수차례 친선경기를 치렀다. 기량은 막상막하였다고 한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북한 대표팀 또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한에서 “세계 최고 축구선수”라고 자랑하는 ‘기계 다리’ 허죽산(1924~1950)도 간도 용정 출신이었다.

길림팀은 심지어 중국 대표팀보다도 강했다. 정지승 씨가 감독을 맡고 있던 1981년 초 광저우 동계훈련에서 4전 전승을 거뒀는데, 그중 국가 1팀과의 친선경기에서 2-1로 승리했다. 요즘 한국으로 치면 국가대표팀과 K리그2 팀이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K리그2 팀이 승리한 것이다.

당시 을(乙)급리그에 있던 길림팀은 국가 1팀을 꺾은 여세를 몰아 갑급리그로 승격하는 성과를 냈다. 지난 2015년 한국인 박태하 감독이 연변푸더를 1부리그로 승격시켰을 때, 연변에서는 1965년의 전설이 새삼 거론되기도 했다.

 

‘조선인이 많이 죽었는데도 축구를 저렇게 잘 한다니’ 일제 관리가 궁금해할 정도

간도의 조선인들은 왜 축구를 잘했을까? 간도 축구의 뿌리를 찾다보면 먼저 ‘학교’라는 키워드가 나온다. 이 시리즈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축구 선수로 활동했던 명동학교, 독립군 양성 기관이었던 신흥무관학교 등 다양한 학교가 거론되고 있다. 1929년 간도에 조선인 학교 170개소, 교원 347명, 학생 6892명이 있었다고 한다.

간도의 축구 명문 중 안중근 의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동학교로 예를 들어보자. 장동학교는 1910년 세워졌는데, 안중근 의사가 지금의 용정시 덕신향에 위치한 장동을 방문해 항일운동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뒤 그 뜻을 이어받은 항일지사들이 설립한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축구공을 가져온 노상렬 교사가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본격적인 축구 명문이 됐다. 장동학교와 명동학교는 간도의 대표적인 ‘더비 라이벌’이었다.

“반일애국지사들은 근대교육으로서 학육과 체육을 모두 중시하였으며 체육을 통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반일투쟁의 정신력을 배양하려 하였다. 축구는 철저한 단체정신과 집단의 힘을 요구함으로 하여 근대학교 체육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안성호 <문화적 시각으로 보는 조선족과 축구>)

간도 축구의 두 번째 키워드는 ‘농사’다. 간도는 원래 농사가 발달하지 않은 곳이었으나, 조선인들은 1875년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짓는데 성공했다. 간도(墾島)라는 지명의 유래부터가 ‘우리 농민들이 개간(墾)한 땅’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벼는 노동력이 많이 드는 작물이기 때문에 한국 농촌에선 품앗이가 중요하다. 협동심을 키울 수 있는 차전놀이 등이 한국 전통에 남아있는 것도 그래서다. 그게 20세기 초 간도에선 축구였다. 축구는 테니스 등 다른 신(新)운동들과 달리 11명이 살을 맞대고 하는 집단 종목이라서 팀워크를 키우기 좋다. 주로 단오절에 축구대회를 했다는 건 농경문화의 전통을 보여준다. 한민족의 전통과 당시 상황 모두 축구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축구는 각 조선인 마을과 각 학교를 대표하는 운동이 됐다. 현재 한국 프로스포츠가 갖지 못한 ‘풀뿌리 연고지 의식’이 간도엔 있었다. 조선인들끼리도 격렬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경기를 하다가 판정이 마음에 안 들면 패싸움을 하는 경우가 꽤 있었을 정도다.

1935년 전 만주국대회에서 우승한 간도성 팀

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린 작가, 강경애가 1933년 발표한 소설 <축구전>은 간도에서 축구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 다니는 Y시 D 학교는 윤동주도 다녔던 용정시 대성중학교로 추측된다. 대성중학은 가난한 조선인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D 학교는 부자 조선인들이 다니는 상대팀과 용감하게 싸웠지만 축구화도 제대로 없고 밥도 못 챙겨먹었기 때문에 결국 안타깝게 패배하고 만다. 조선인끼리도 계급에 따른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노선에 따른 반목이 한때 극심했던 것처럼, 한민족이라고 늘 하나로 뭉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축구에선 경쟁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조선인 축구팀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친일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축구팀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1932년 일제는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운 뒤 스포츠를 국민 통합에 이용하려고 했다. 특히 만주국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축구를 만주국의 국민 종목으로 지정하고, 만주국 축구협회를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시키려는 시도를 했다(1933년 요미우리신문 기록). 만주국에서 제일 축구를 잘 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간도 팀은 만주국의 ‘전국 대회’에서 6차례나 우승했고, 조선인이 다수 섞여 있던 길림팀의 활약도 좋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장동 지역 대표팀은 1935년 5월 용정에서 열린 간도성 대회에서 우승했다. 당시 용정 일본 총영사가 “저 자들은 어느 고장 사람인가?”라고 물었고, 장동에서 온 팀이라는 말에 “장골(장동)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또 무슨 사람이 있어서 저렇게 공을 잘 찬단 말인가? 괴상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살과 탄압을 견딘 조선인들은 축구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당시 일제는 일본 대표, 식민지 조선 대표, 만주국 대표를 각각 꾸려 이웃 중국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조선인 선수들은 네 팀에 모두 포함돼 있었다. 1939년 열린 조선 대 만주국 경기에서 조선팀은 당연히 조선인들로 구성됐고, 만주팀은 일본인 5~6명을 빼고 모두 조선인이었다.

같은 해 열린 일본, 만주, 중국 친선경기 참가 명단의 주요 조선인 선수들은 아래와 같았다. 좀 거칠게 말하면 소위 ‘대일본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축구 선수들은 거의 조선인이었다.

일본팀 소속 : 김용식, 이유형, 배종호, 김성간
중국팀 소속 : 이혜봉, 정용수
만주팀 소속 : 5~6명 빼고 모두 조선인

이처럼 축구를 잘 했기 때문에, 일제가 패망하고 간도가 중국 영토로 돌아간 뒤에도 조선인의 축구 실력은 계속 두각을 나타냈다. 대표적인 예가 길림팀의 1965년 갑급대회 우승이다. 심지어 을급(2부)에서 2위를 차지해 승격한 직후였다. 기적적인 성과다.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연변 축구는 발전이 빨라 상해, 대련, 천진, 북경에 못지않았다. 이 시기 연변은 전국 27개 축구팀에 선수 270여명, 성내 축구 전업팀에 30여명을 보냈는데 이 선수들은 중국 축구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 연변은 축구의 고향으로 불렸으며 길림축구팀은 ‘동북 호랑이’라고 불렸다.” (<연변조선족축구운동사>)

중국 전역의 명문팀에 연변 출신 선수들이 진출했다. 중국 대표로 선발된 선수도 많았다. 문정오, 지청룡, 허경수, 장경천, 이주철, 고종훈 등이 대표적인 이름이다. 역대 중국 대표팀에서 조선족 선수 30여 명이 뛰었다. 예부터 간도 지역에선 공을 잘 차는 사람을 ‘뽈개지’라고 불렀다. 지금도 연변에서 쓰는 표현이다.

사진= 축구수집가 이재형 제공, 길림신문 제공

김정용 기자  cohenwise@firstdivis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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