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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 ③ ‘속사포’와 신흥무관학교 축구
류청 | 승인 2019.08.15 14:00

[풋볼리스트] 류청 기자= 영화 <암살>에서 속사포가 나온 신흥무관학교에서는 테니스가 아니라 축구를 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축구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종성 한양대학교 교수)

 

신흥무관학교는 매력적이지만 열리지 않는 상자 같았다. 만주 벌판을 달리며 일본군을 무찌르는 독립군 그리고 김원봉 선생이 이끌었던 의열단의 젖줄이었던 신흥무관학교(현재 경희대학교. 해방 후 1949년 신흥초급대학 설립. 1960년 경희대학교로 교명 변경). 2015년 1천 2백만 관객을 모았던 <암살>에서 속사포(조진웅 분)가 나온 학교로 다시 한번 조명을 받았던 곳이다. 이종성 교수를 만나 신흥무관학교 뒤에 축구라는 단어가 붙었을 때 굳데 닫혀 있었던 상자가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았다.

 

<암살>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속사포였다. “독립 운동도 배가 불러야 할 수 있다”던 현실주의자는 성치 않은 몸으로 마지막 작전을 수행하러 나선다. “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요. 끝까지 갑니다.” 영화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속사포를 암살조로 선택한 이유도 바로 출신학교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간단한 학교가 아니다. 영석 이석영, 우당 이회영, 성재 이시영 선생을 포함한 6형제가 가산을 모두 매각해 그 자금을 들고 서간도로 가 학교(신흥강습소)를 세웠고,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신민회(新民會)의 신과 흥국(興國)에서 신흥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신흥무관학교 자료 사진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여 야간에 비상훈련도 실시하고 취침 중 비상나팔로 완전무장을 해야 하는 임전태세도 가르쳤다.” (우당기념관 홈페이지 내 신흥무관학교의 역사 중)

 

신흥무관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 이외에도 장교반(6개월), 하사관반(3개월)을 두고 직접 독립군을 양성했다. 학과와 과목을 둘러보면 이렇다. “학과는 보병, 기병, 포병, 공병, 치중(輜重)등 5개 병과훈련, 그 외에 내무령, 측량학, 축성학, 육군형법, 징발령, 위술복무, 구급의료, 편제학, 훈련교범, 전술, 전략학 등이 있다.” 이런 교육을 감당할 체력을 기르기 위해 체육 교육도 열심히 했다. 6대 정신에 “체련에 필승 한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다. 체육 과목도 무시무시하다. 엄동설한에 야간도강, 70리 행군, 빙상운동, 격검, 유도, 철봉 그리고 축구로 구성돼 있었다.

 

체육 과목은 대개 모두 힘과 지구력 그리고 정신력을 기를 수 있는 것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과목 속에 축구가 있다. 조금 의외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왜 축구를 했을까? 수많은 운동 중에서 축구가 신흥무관학교 체육 과목에 들어간 이유가 있다. 모든 운동은 저마다 어느 정도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조선에서, 축구는 위기 극복과 국권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운동이었다. 지난편에도 언급했듯이 축구와 민족주의가 연결돼 있었다.   

 

“국권상실의 위기의식이 팽배하던 시기에 축구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체육활동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었다.”

 

“하남길(2010)에 의하면 1906년 설립된 대한체육구락부와 1907년에 설립된 대한국민체육회, 1908년에 설립된 대한국민체육회, 1908년에 설립된 대동체육부 또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진화론적 자강론에 입각하여 체육발달을 통한 강력한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한국 근대 축구의 도입과 이데올로기, 1882~1910> 장재훈

축구는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이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상대적으로 ‘모던 보이’였을 가능성도 크다.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들이 거사를 하루 앞두고 살롱에서 춤을 추듯이, 이들은 운동장에서 지금보다 더 격렬했던 축구를 했다. 이종성 교수는 “아마 영화에서는 ‘모던 보이’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기 위해 테니스라는 운동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축구도 당시에는 신문물이었어요”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축구는 단체운동이었기에 동료와 함께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독립운동과도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협동심과 동료애를 고취시키는 데 축구보다 더 좋은 운동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족 원로 사진가 황범송 옹은 “도망다니던 독립군끼리 깊은 산에서 만나 축구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은적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축구장은 독립군들이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제는 집회를 금지했지만 축구 경기가 열릴 때는 어느 정도 자유를 줬다. 워낙 사람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축구장에서 독립군끼리 만나 쪽지를 주고 받으며 정보를 공유했다는 자료와 구술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축구장은 여러 가지 이유로 뜨거웠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모임, 가운데 흰 옷이 성재 이시영 선생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6형제 중에서 해방 이후까지 생존한 이는 성재 이시영 선생뿐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과 법무총장으로 일하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이시영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지만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가 된다. 그는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1951년 5월 이승만 정부의 실정과 부패를 성토하는 ‘국민에게 고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시영 선생에게 몇 차례나 그의 일가가 살았던 집 주변인 서울시 중구 저동 땅 2만평을 주겠다고 이야기했었으나 이시영 선생이 거절했다.

 

“나는 내 땅을 찾으려고 독립운동 한 게 아니다.”
 

이시영 선생은 해방 후 신흥학교를 세워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했다. 하지만, 1950년 이후로 이사진이 교체되고 현 체제가 확립되면서 1960년에 이름을 경희대학교로 바꾼다. ‘경희 20년’은 “신흥이란 이름이 너무 속되고 대중적이어서 시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호 같아 심오한 학술을 연마하는 최고 학부의 이름으로서는 부적당”하다며 “경희는 부르기도 좋고 듣기에도 어감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그 뜻도 심오한 명칭으로 풀이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우당 기념관 제공

류청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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